스토커 Stoker (2013)

2013.02.20 00:44

DJUNA 조회 수:26138


인디아 스토커는 18살 생일날 아빠를 교통사고로 잃었습니다. 아빠의 장례식에 예고도 없이 나타난 건 지금까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삼촌인 찰리.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며 무언가 멋진 일을 하고 다녔다는 찰리 삼촌은 아빠 대신 스토커 저택에 눌러앉고, 노골적으로 엄마 에블린을 유혹합니다. 그런데 아빠의 교통사고 말입니다. 과연 그게 사고였을까요? 아마도 인디아의 고모할머니는 알고 있을 것 같은 찰리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왜 찰리는 인디아에게 그렇게 집착하는 걸까요?

웬트워스 밀러가 각본을 쓴 박찬욱의 [스토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의혹의 그림자]의 영향입니다. 시골 마을에 사는 소녀가 갑자기 나타난 찰리라는 삼촌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광기와 살인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의혹의 그림자]에서 그냥 가져온 것이나 다름이 없죠. 박찬욱의 말을 들어보면 원래 각본에서는 [의혹의 그림자]의 오마주가 더 강했다고 하더군요. 

밀러는 [의혹의 그림자] 말고도 다른 인용들을 각본에 숨겨넣었습니다. 오해받기 딱 좋은 제목인 [스토커]만 해도 그렇죠. 이 영화는 브램 스토커의 전기 영화도 아니고 (공식적으로는) 뱀파이어 영화도 아닙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 이름을 썩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스토커]의 이야기를 [햄릿]에 비교하는 것인데, 이 역시 그럴싸하게 말이 됩니다. 박찬욱이 후자에 관심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의식은 하고 있었겠죠. 

영화는 히치콕의 영향에서 시작하고 있지만, 히치콕이 당시엔 할 수 없었던 영역으로 넘어갑니다. 더 야하고 폭력적이고 사람들도 많이 죽으며 당시에는 불가능했던 결말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박찬욱의 복수 삼부작에 나왔던 화려한 폭력을 기대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정작 스크린 위에 그려지는 폭력의 수준은 온화한 편입니다. 이 영화에서 위험하고 매혹적인 것은 구체적인 폭력이나 섹스가 아니라 그 뒤에 숨어 있는 미친 정신입니다. 

박찬욱이 얼마나 많이 건드렸는지는 몰라도 (인디아가 생일날마다 똑같은 구두를 선물로 받는 설정은 박찬욱의 아이디어라고 합니다) 웬트워스 밀러의 각본은 완벽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야기는 재미있습니다. 흥미로운 설정과 인상적인 개성의 인물들이 강렬한 드라마의 가능성을 품고 웅크리고 있지요. 하지만 심리묘사와 대사가 거칠고, 이야기 전개는 종종 믿을 수 없으며, 몇몇 캐릭터들은 활용하지 못한 채 방치됩니다. 이들은 모두 개선될 수 있는 것이죠. 전 이중 번역의 과정을 거치더라도 박찬욱이 자기 팀과 함께 본격적인 각본 작업을 했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신 박찬욱이 택한 것은 각본, 특히 대사의 영향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웬트워스 밀러의 각본 안에 있는 킹키한 괴상함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는 각본의 결함을 수정하는 대신 그냥 품고 그에 맞는 영화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 결합은 썩 잘 어울려요. 여전히 각본의 구멍은 보이지만 말입니다.

[스토커]는 과도하게 장식적이고 모든 미장센이 불필요할 정도로 빽빽한 의미로 채워져 있는 영화입니다. 갑갑하게 들리지만 이건 박찬욱의 영화이고 그의 개성입니다. 그리고 그의 [스토커]는 그런 그의 개성이 할리우드의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피어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소박한 예입니다. 미국 시골 마을에서 영어권 배우들이 그럭저럭 영어권 사람들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기는 한데, 그의 폭발적인 폭력성향과 오페라적 과장, 컴컴하고 엉뚱한 유머는 그대로 남아있거든요. 취향을 많이 타지만 언제나 재미있고 예쁩니다. 네, 굉장히 예쁜 영화예요. 주인공 인디아처럼 극도로 신경질적이고 위험하지만 여전히 예쁜 고딕 소녀 같은 영화지요.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는 에블린 역할의 니콜 키드먼이지만, 영화의 주인공은 인디아와 찰리 삼촌을 연기한 미아 바시코프스카와 매튜 굿입니다. [의혹의 그림자]가 사랑으로 묶인 선과 악의 주인공을 그렸다면, [스토커]는 혈통이라는 운명으로 묶인 미치광이들의 이야기죠. 비슷한 근친상간적 설정에서 시작하지만 두 주인공이 추는 춤은 전혀 다른 성격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따로 있을 때나, 같이 있을 때나 환상적입니다. 

어떻게 봐도 완벽한 영화는 아닙니다. 박찬욱의 실력이 총동원된 영화도 아니고요. (그의 독특한 언어 감각이 이전 박찬욱 영화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세요.) 하지만 김지운의 [라스트 스탠드]와는 달리 영화는 철저하게 그의 개성에 의해 지배되고 있고, 그는 거기에 가서도 한국에서는 쓸 수 없었던 재료들을 멋대로 가져다 쓰면서 신나게 놀았던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제 감도 익혔으니 다음 작품에서는 더 잘 놀 수 있겠죠. (13/02/19)

★★★

기타등등
주디트 고드레슈가 나옵니다. 하모니 코린도 거의 스치듯이 등장하니까 찾아보시길.  

감독: 박찬욱, 배우: Mia Wasikowska, Matthew Goode, Nicole Kidman, Jacki Weaver, Dermot Mulroney, Phyllis Somerville, Harmony Korine, Judith Godrèche, Ralph Brown 

IMDb http://www.imdb.com/title/tt1682180/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80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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