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2012)

2013.05.27 14:15

DJUNA 조회 수:11833


마르가레테 폰 트로타는 80년대부터 바르바라 주코바를 주연으로 독일어권의 중요한 역사적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한 전기영화를 만들어왔는데요. 주코바에게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로자 룩셈부르크],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된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전기 영화 [위대한 계시], 이번 여성영화제에서 소개된 [한나 아렌트]가 모두 이 시리즈의 일부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아렌트의 경력 중 가장 논쟁적이었던 시기를 다룹니다. 아이히만 재판 이야기지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르헨티나에서 숨어지내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1960년에 모사드에 의해 체포되어 이스라엘로 끌려가 공개재판을 받았고 62년에 처형되었습니다. 아렌트는 당시 뉴요커의 지원을 받아 이스라엘로 가서 그 재판을 지켜보았고 그 결과 나온 것이 유명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죠. 책을 안 읽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꾸준히 인용되는 '악의 평범성', '사유의 부재'와 같은 말들이 모두 여기서 나왔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주제를 전달하고 있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여기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그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꼭 극영화라는 매체를 이용했어야 했나?

영화를 보면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이 영화에는 드라마가 없어요.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모든 말들은 한나 아렌트를 통해 나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그 중요한 주제를 제대로 반박하거나 맞서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아요. 아이히만에게 면죄부를 주고 희생자인 유태인들을 공범자로 몰았다고 분노하는 무리들이 있을 뿐이죠. 심지어 그들 대부분은 아렌트의 책을 제대로 읽지도 않았습니다. 남들이 하는 말을 듣고 기계적으로 화부터 낸 거죠. 그러니 영화는 일종의 강연처럼 흘러가고,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상당한 비중으로 그려낸 '아렌트 대 분노한 대중' 스토리는 불필요한 주석으로 남습니다.

아렌트를 주인공으로 할 생각이었다면 다른 시기를 택하는 게 나았을 것 같습니다. 영화 속에도 의무감 때문에 조금씩 삽입되는 아렌트와 하이데거와의 관계는 어때요? 거기엔 드라마가 있습니다. 철학적 주장들을 담아도 인간관계 속에서 인간 감정을 담아 표현할 수 있지요. 물론 이 시기를 택했다면 주코바를 캐스팅할 수 없었겠지만요.

한나 아렌트의 주장에 대해 보다 잘 알고 싶다면, 영화에 드문드문 나오는 대사를 챙기는 대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는 게 낫습니다. 굳이 이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면 텍스트를 설명하고 보완하는 다큐멘터리를 택해야했지요. [한나 아렌트]는 강한 메시지를 담은 진지하고 심각한 영화지만, 수상쩍을 정도로 많은 시간 동안 불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굳이 있을 필요가 없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13/05/27)

★★☆

기타등등
보면서 [서프라이즈]가 자꾸 생각나더군요. 배우들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주코바는 언제나처럼 훌륭하죠), 드라마를 통해 전달하기 어려운 내용을 강연이나 연설의 형태로 전달하는 스타일 말입니다.

감독: Margarethe von Trotta, 배우: Barbara Sukowa, Axel Milberg, Janet McTeer, Julia Jentsch, Ulrich Noethen, Michael Degen, Nicholas Woodeson, Victoria Trauttmansdorff, Klaus Pohl

IMDb http://www.imdb.com/title/tt1674773/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98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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