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범 (2017)

2017.08.13 08:35

DJUNA 조회 수:9724


허정의 [장산범] 영화화 계획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전 이 이야기가 전형적인 한국 귀신 영화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목의 장산범은 독특한 생김새의 괴물이죠. 흔한 귀신과 다른 공포를 줄 수 있고 다른 종류의 액션을 연출할 수 있는 호러 재료입니다.

하지만 아쉬워라. 영화엔 장산범이 안 나옵니다. 특수효과에 자신이 없었을 수도 있고 제작비가 부족했을 수도 있고 이런 연출이 옳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아쉽죠. 가장 중요한 차별점을 날려버렸으니까.

영화는 장산범 자체보다 장산범의 특기 중 하나, 그러니까 사람의 목소리를 내는 흉내에 집중합니다. 그래도 장산범이 아주 안 나오면 안 되니까 샤머니즘으로 연결시켜놓죠. 장산범 대신 장산범을 섬기는 무당이 나옵니다.

드라마의 재료는 사실 상당히 좋습니다. 아이를 잃은 엄마의 고통요. 염정아가 연기하는 희연은 오래 전에 아들을 잃었습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시어머니에게 맡겨놓았는데 사라져버린 거죠. 희연네 가족은 시어머니의 고향인 장산에 팬션을 하러 내려가는데, 거기서 길잃은 어린 여자아이를 발견합니다. 말을 못하는 줄 알았던 그 아이는 이상하게도 희연의 딸 준희와 똑같은 목소리를 갖고 있습니다.

[장산범]의 호러 재료에서 가장 좋은 부분은 호러와 연민이 흥미로운 비율로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의 호러는 주인공을 향한 직접적인 공격 대신 고통받으며 흐느끼는 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주인공은 여기에 대해 합리적인 의심을 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통받는 아이를 방치해야 하나요? 이는 공포라는 감정을 더 입체적으로 그릴 수 있는 기회이고 마지막 결말의 아이디어도 그런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좋다고 할 수 있죠. 무엇보다 영화의 키를 쥐고있는 여자아이 역의 배우 신린아의 캐스팅이 참 좋습니다.

문제는... 이 아이디어를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을만큼 영화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일단 각본에 문제가 많습니다. 아이디어에 맞는 창의력이 부족해요. 처음엔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며 겁을 주다가 후반에 설정집 가이드가 되는 음침한 동네 주민과 같은 클리셰가 너무 많죠. 희연과 가족 묘사도 너무 기본 설정에 종속되어서 갑갑합니다. 아무리 호러 영화 주인공이라고 해도 버텨내고 유지해야 할 일상이라는 게 있는데 희연에겐 그 중립적인 상태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배우가 '아이를 잃은 엄마의 고통'이라는 당연한 감정을 연기하는 동안에도 이게 제대로 흐르질 못하는 거죠.

영화는 청각공포라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데, 이게 잘 살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원래 진짜로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무서운 소리는 암시적이고 희미하죠. 이들의 배경이 되어주는 침묵과 백색소음 역시 필수고요. 하지만 [장산범]의 소리는 너무 시끄럽고 빽빽하며 의미도 지나치게 단순합니다. 관객들이 겁먹지 않을까봐 겁먹은 티가 나요.

한마디로 [장산범]의 드라마와 공포는 원래 가진 재료의 가능성을 충분히 살리고 있지 못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머리로는 알겠는데, 이게 제대로 느껴지지 않아요. 이 영화 저편에 같은 주제를 다룬 더 나은 영화가 있을 거 같습니다.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무섭게 느꼈던 건 극중인물들이 겪는 공포스러운 경험이 아니라 자신의 작품이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이야기꾼의 정신상태였습니다. 그게 뭔지 경험을 통해 알기 때문에 더더욱 무서웠어요. (17/08/13)

★★

기타등등
나중에 추가한 설명용 보이스오버처럼 공허하게 슬픈 건 없는 거 같습니다.


감독: 허정, 배우: 염정아, 박혁권, 허진, 신린아, 방유설, 이준혁, 다른 제목: The Mimic

IMDb http://www.imdb.com/title/tt7046826/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37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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