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를 보았다 (2010)

2010.08.14 10:04

DJUNA 조회 수:33895


(스포일러가 있거나 말거나.)


[악마를 보았다]로 김지운은 늘 새로운 장르를 찾아 떠돌아다녔던 그의 경력에 또 하나의 장르를 추가했습니다. 70년대식 익스플로이테이션물이죠. 이걸 의도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우선 오리지널 각본부터가 그의 것이 아니잖아요. 그가 이 영화를 연출한 것도 주연배우 최민식의 추천과 요청에 의한 것이고요. 하지만 과정이 어떻건 리스트는 만들어졌습니다. 


묘사의 강도만 따진다면 [악마를 보았다]는 그럭저럭 견딜만 합니다. 보기 편한 영화라는 건 아니에요. 여전히 살인, 강간, 폭력 장면으로 질펀하니까. 하지만 영화는 스토리가 요구하는 이상의 불편한 장면을 예상 외로 많이 넣지 않고 있어요. 영화가 불편하다면 그건 자극이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극이 약속한 것보다 훨씬 모자라기 때문이죠.


복수극은 쾌락주의적인 장르입니다. 이런 영화들은 고통스러운 초반 몇십 분을 견디고 나면 관객들에게 도덕의 굴레에서 벗어난 무차별 폭력을 허락하겠다고 약속하죠. 소위 강간복수극 장르의 경우는 심지어 그런 초반묘사까지 노골적인 쾌락으로 제공해주겠다고 암시합니다. 


[악마를 보았다] 역시 그런 약속으로 시작합니다. 국정원 직원이 약혼녀를 죽인 연쇄살인마를 사냥한다는 이야기잖아요. 주인공 수현은 살인마 장경철을 단번에 끝장내는 대신 고문했다 풀어주기를 반복합니다. 아마 여기서 관객들과 주인공은 앞의 고통을 상쇄하는 사디스틱한 즐거움 기대했을 것입니다. 


영화는 그렇게 흐르지 않습니다. 물론 주인공의 실수도 있고 살인마가 만만치 않은 상대여서 그렇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계획 자체의 문제점에 있습니다. 이 위치에서 그는 장경철에게 가한 것만큼 당하게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희생자들은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장경철은 보통 사람이 아니죠. 그는 죄의식도 없고 자기 연민도 없으며 공포심도 느끼지 않습니다. 수현의 게임은 그에게 대단한 고통을 주지 않아요. 한마디로 뻘짓인 겁니다. 


[악마를 보았다]는 복수의 매커니즘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완벽한 복수가 완성될까. 복수자의 쾌락을 만족시키면서도 대상에게 최대한의 고통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답은 대상에 대해 지식을 쌓고 거기에 맞춘 복수를 하면서 복수자 자신은 최대한의 냉정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거죠. 수현이 이 사실을 지나치게 늦게 깨달은 건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그는 너무 자기 위주로 생각했어요. 사실 장경철에게 복수하는 방법은 여럿 있습니다. 단순한 짐승에게는 단순한 방법을 써야죠. 물론 복수 과정 중 환멸과 권태로 제풀에 지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장경철은 더 아팠을 겁니다. 


하지만 영화는 개별 복수의 실패담에서 조금 더 나아가 하나의 일반론을 개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영화는 복수가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악몽이죠. 우리가 익숙한 복수가 가능한 세계는 악당들과도 어느 정도 정서적 교류가 가능한 곳입니다([몬테 크리스토 백작]의 악당들은 얼마나 인간적입니까.) 하지만 [악마를 보았다]는 그 통로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관객들은 그 통로 저편에 있는 건 장경철 하나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종말론이 따로 없습니다. 


영화의 결말에 대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저에게 이것은 복수의 포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감정을 제거한 단순한 청소로 보기엔 너무 복잡하며 상관 없는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해를 끼칩니다. 그 과정 중 장경철이 고통 비슷한 뭔가를 느꼈다는 암시는 믿을 수 없고요. 전 그냥 수현이 끝까지 자기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모르는 상태로 자기 정신만 추려서 간신히 빠져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요. (10/08/14)



기타등등

잘려나간 부분들을 다 더했다고 해도 영화가 특별히 더 잔인해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잘린 부분들은 대부분 시신 손상과 관련된 것들이죠. 시체는 아프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아프죠. 


감독: 김지운, 출연: 이병헌, 최민식, 전국환, 천호진, 오산하, 김윤서, 최무성, 김인서, 다른 제목: I Saw the Devil


IMDb http://www.imdb.com/title/tt1588170/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2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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