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사용설명서 (2013)

2013.02.05 13:51

DJUNA 조회 수:18870


최보나는 5년 째 CF 조감독 노릇을 하느라 인생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미래는 없고 일은 고되고 (대부분 남자들인) 동료들과 직장 상사에게 투명인간 취급당하고 있지요. 그 동안 본 못 볼 것들 다 모아서 정리하면 책 몇 권이 나오겠죠. 트위터에 'CF 조감독 대나무숲'이 있다면 최보나는 거기 단골일 겁니다. 

한류스타 이승재 주연의 CF 야외촬영을 하러 나왔다가 해변에 버려진 채 방황하던 보나 앞에 기적이 나타납니다. 자칭 닥터 스왈스키라는 야바위 사기꾼이 보나에게 [남자사용설명서]라는 비디오테이프 세트에 [왈도를 찾아라] 그림책을 끼워 50만원에 팔아넘긴 겁니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어하던 보나. 하지만 닥터 스왈스키의 조언은 예상 외로 잘 맞아 떨어집니다. 오만방자한 이승재가 보나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이원석의 [남자사용설명서]는 타협과 편법의 이야기입니다. 결국 세상 반은 남자, 그들의 영향력은 반 이상. 그러니 남자들에게 맞서는 대신 그들의 비위를 맞추고 조종하는 것이 현실적. 맥빠지는 이야기지만 현실적인 처세술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겠죠. 다행히도 이런 말을 대놓고 하는 영화들이 그렇듯, 영화는 이 처세술의 한계와 부작용에 대해 비교적 솔직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더 나가지 못하는 건 아쉽습니다만, 그래도 걱정했던 것보다는 생각이 바른 영화입니다.

이 [남자사용설명서]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는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남자들을 이용하는 처세술입니다. 다른 하나는 연애하는 남자를 조종하는 방법입니다. 닥터 스왈스키는 이들을 모두 같은 취급을 합니다만, 그래도 사용자 입장에서는 달라야 하겠죠. 이 경계선이 영화에서는 흐릿한 편입니다. 그 때문에 로맨스의 감정선이 잘 살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어요.

로맨스보다는 코미디에 강세를 두고 있고 또 거기에 집중해야했던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직장 코미디일 때 가장 농담이 많고 재기발랄해요. 보나도 감정이입하기가 가장 쉽고요. 하지만 로맨스에서는 입장이 조금 흐릿합니다. 이승재에 대한 보나의 입장은 정확히 뭘까요? 어디서부터 이들의 연애가 시작되고 그것은 얼마나 진실할까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서부터는 무조건 그래야한다는 장르의 당위에 휘말린 것 같아요. 후반부의 클라이맥스도 연애보다는 직장 이야기로 끝내는 것이 더 좋았을 겁니다. 지금은 뭔가 해결되지 못하고 끊긴 것처럼 보입니다.

수줍음이나 두려움 따위는 전혀 없는 코미디입니다. 코미디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은 다 하고 있어요. 작정하고 키치로 가고 있고 상황은 과장된 현실을 넘어 판타지의 세계로 갑니다. 배우들은 특별히 과장된 연기를 하고 있지 않지만 상황이 극단적으로 과장되어 있어서 꽝꽝 터지는 장면들이 상당히 됩니다. 단지 후반 이후에서는 로맨틱 코미디의 도식성이 끼어들어 분위기를 좀 깹니다. 이런 의무봉사를 하는 동안 날아갔을 코미디를 생각하니 아쉽기 짝이 없습니다.

이시영은 이상적으로 캐스팅된 배우입니다. 물론 투명인간이 되기엔 이시영은 지나치게 예쁩니다. 초반 장면에서는 자신의 미모를 감추기 위해 변장/은폐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 그러나 이시영은 이미 이런 식의 쑥맥 연기에 완벽하게 적응한지 오래되었습니다. 변신전/변신후 모두 현실감이 팍팍 돋습니다.

오정세의 경우는 재미있지만 조금 아슬아슬합니다. 우선 이 배우가 '한류스타'로 캐스팅되었다는 것 자체가 (모두가 인정하다시피) 코미디죠. 자신의 캐릭터에 완전히 적응한 이시영과는 달리 처음부터 패러디로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시영과 오정세는 죽이 잘 맞지만, 이들의 화학반응은 로맨스보다 코미디 쪽이 더 좋습니다. 연애 이야기를 할 때도 '한류스타와의 로맨스'보다는 오정세의 특기인 '흔한 한국남자의 구질구질 찌질함'이 더 잘 보이고요. 하긴 한류스타라고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만.

여기저기 트집을 잡았지만, [남자사용설명서]는 신나는 코미디 영화이고 즐거운 데뷔작입니다. 무엇보다 코미디를 억지로 하는 티를 전혀 내지 않으면서 농담들을 빵빵 터트리는 여유가 좋아요. 이원석은 무엇이 웃기는지 알고 있고 그런 웃긴 짓을 하는 게 체질인 사람입니다. 그의 차기작이 기다려집니다. (13/02/05)

★★★

기타등등
어떤 분은 이 영화와 [잼 필름즈 2]의 [탁상공론] 에피소드와의 유사점을 지적하시더군요. 전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닮았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런 식의 가이드식 설정은 독창성의 영역이 아닌 것 같습니다.   

감독: 이원석, 배우: 이시영, 오정세, 박영규, 김정태, 이원종, 경수진, 김준성, 안용준, 다른 제목: How to Use Guys with Secret Tips

Hancinema http://www.hancinema.net/korean_movie_How_to_Use_Guys_with_Secret_Tips.php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9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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