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원래 10여년 쯤에 멜 깁슨 주연으로 만들어질 뻔했던 시리즈의 4편입니다. 그 동안 온갖 일이 다 있었다죠. 9/11 사태의 후유증으로 제작은 무기한 연기, 깁슨은 반유태주의 발언 때문에 캐스팅에서 떨려나갔고 대신 뽑은 배우가 히스 레저, 하필이면 촬영 얼마 전에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무대가 되어야 할 사막이 꽃밭으로 변하는 일까지 있었다죠. 이런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시리즈의 3편이 개봉된지 꼭 30년만에 나왔습니다. 그 동안 감독 조지 밀러는 70대 할아버지가 되었고, [매드 맥스] 1편이 나왔을 때는 꼬꼬마였던 톰 하디가 제2대 매드 맥스가 되어... 이야기가 길어지니까 괜히 슬퍼지네요.

이 영화와 앞에 나온 세 편의 연관성을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원래 이전 세 편도 그렇게 확실하게 연결되는 영화들이 아니었으니까요. 다들 독립적인 영화로 봐도 큰 문제가 없는 작품들입니다. 네 편의 영화에 나오는 맥스가 꼭 한 사람일 필요도 없고요. 실화에 바탕을 둔 수많은 이야기들이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로 수렴되는 경우는 흔하니까요.

하여간 영화가 시작되면 맥스는 정신적으로 고생이 심합니다. 그 동안 안 좋은 일이 많이 있었던 모양으로 자신이 구하지 못한 사람들, 특히 어린 소녀의 유령이 마구 나타나요. 그는 납치되어 임모탄 조라는 독재자가 다스리는 시타델이라는 도시로 끌려가 혈액형 0형의 피주머니 노릇을 하게 되는데,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자기 의지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이모탄 조의 다섯 아내들과 함께 시타델을 탈출하려는 임퍼레이터 퓨리오사라는 군인과 엮이게 됩니다.

[매드 맥스] 영화들이 원래 드라마를 최소화하고 그 자리를 액션으로 채우려는 경향이 강한데, 이 영화는 그 중 가장 극단적입니다. 거의 모든 장면이 액션이죠. 그것도 원래 3부작의 재료들을 긁어 모아 10배 속도와 강도로 마구 돌린 것 같은 액션입니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미친 것처럼 질주하고 충돌하고 부서지고 날아갑니다. 영화는 모래와 불과 금속의 발레입니다.

이 정도면 여름마다 나오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액션물 일반에 대한 묘사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요새 블록버스터 영화 중 이 정도로 액션의 비율과 강도가 높은 영화는 없어요. 그렇게 만들기도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 액션이 나와야 할 이유를 만들기 위해 넣은 지루한 설명이 반 이상이죠. 액션 역시 러닝타임을 꽉 채울만큼 재미있기가 힘들어요. 10분만 넘어도 지루해지기 마련이죠. 마이클 베이의 최근 [트랜스포머] 영화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조지 밀러는 30년전에 이미 본전을 다 뽑아먹었다고 생각한 재료들을 갖고 끊임없이 관객들을 흥분시키는 엄청난 구경거리를 만들어낸 겁니다. 어떻게 그런 것들이 나왔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나마 답이 될 수 있는 것은 3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동일한 문제에 대한 새로운 기술적인 답이 꾸준히 제시되었고 누적되었다는 것이죠.

여기서 많이들 'CG'를 떠올릴 텐데, 이건 보기만큼 쉬운 답이 아닙니다. 이 영화에서 CG는 20퍼센트 정도밖에 쓰이지 않았고 그것도 상당수가 와이어를 지우거나 잘린 팔을 표현하는 것처럼 소극적이니까요. 이 영화의 액션 대부분은 프랙티컬 이펙트와 재래식 스턴트를 통해 얻어졌습니다. 하지만 지우고 싶은 것들을 지울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둘은 엄청난 자유를 얻지요. 80년대 이후 순수한 액션물을 거의 만들지 않은 사람이 (굉장한 액션장면을 품고 있는 영화 하나가 중간에 나오긴 했습니다. [꼬마돼지 베이브 2]요) 이 변화된 환경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감과 개성을 고수하면서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영화는 이에 대한 가장 정신나간 답입니다.

그렇다고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가 내용이 없이 오로지 액션만을 담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영화가 드라마를 담는 방식은 여러 모로 본받을만 하죠. 대사가 별로 없고 장황한 배경 설명도 없지만 캐릭터와 드라마는 이 시리즈에 속한 그 어느 영화보다도 꽉 차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액션을 주도합니다. 아까 발레 비유를 들었는데, 이 영화의 드라마가 빈약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백조의 호수]의 파드되가 그냥 무용수의 손짓과 발짓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보통 영화에서는 대사가 맡을 이야기 전개를 액션이 맡는 거죠. 맥스, 퓨리오사, 눅스가 처음 만나는 부분을 보세요. 그냥 고함을 지르며 서로에게 주먹질이나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각의 의지와 입장이 복잡하게 충돌하는 무척 수다스러운 장면입니다. 영화는 단순한 게 아니라 무성영화스럽습니다.

페미니즘 이야기가 나올 때가 되었죠. 영화가 쇠고기도 아니고, 이 작품이 페미니즘을 몇 등급까지 구현하고 있는가를 따질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이 영화가 의식적으로 페미니즘 주제를 탐구하고 있고 그 탐구가 시리즈 안에서 논리적인 동시에 발전적이라는 것은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존 시리즈에서 성폭력이라는 소재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떠올려보시죠. 애들 나오는 3편은 없지만 1편과 2편에는 각각 하나씩 나오는데, 모두 당시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혹하기 짝이 없습니다. 1편에서 달아나는 남성 희생자는 놀림감이고 2편에서 강간살해당하는 여성을 그리는 태도는 사자에게 죽임 당하는 영양을 바라보는 것처럼 냉담하기 짝이 없죠. 다시 말해 기존 시리즈는 성폭행을 [매드 맥스] 세계가 품은 야만성의 일부로만 보고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30년 뒤에 나온 영화는 이 태도를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이 영화에는 관객들을 자극하기 위한 성폭행 묘사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성폭행이 조직적으로 행해지는지를 설명하고 피해자에게 적극 감정 이입하면서 이것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죠. 지금까지 사막에 묻혀있던 주제가 30년만의 폭우라도 맞은 것처럼 활짝 피어난 것입니다.

여성캐릭터의 발전도 보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에서 강인한 여성은 드물지 않아요. [매드 맥스]에만 해도 버지니아 헤이가 연기한 여전사나 티나 터너가 연기한 '아주머니' 캐릭터가 있었죠. 하지만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처럼 여성 캐릭터들을 전면에 세우고 이들에게 다양성과 입체적인 관계묘사를 부여한 영화는 드물죠. 퓨리오사나 신부들은 선례를 들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부발리니 할머니들을 보고도 같은 이야기를 하긴 어렵지 않습니까?

결정적으로 [매드 맥스 3]에서와는 달리 주인공 맥스는 이들의 이야기와 겉돌지 않고 잘 어울립니다. 쓸데 없는 거부감을 표출하며 이야기를 질질 끌지도 않고요. 하긴 맥스 같은 진성 마초가 그런 데에 신경을 쓰면 오히려 이상하겠죠. 오히려 여자들에게 이야기의 무게가 넘어가는 동안에도 무덤덤하게 그들과 함께 싸우는 그의 모습은 굉장히 듬직해보이지 않습니까? 톰 하디가 연기한 맥스에게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지내왔던 멜 깁슨의 맥스와는 다른 종류의 광기와 매력이 있는데, 앞으로 시리즈가 지금의 힘을 잃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면 우린 멜 깁슨보다 더 성공적인 맥스를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멜 깁슨도 성공적인 맥스였던 영화는 2편 하나밖에 없잖아요. (15/05/19)

★★★★

기타등등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페미니즘 논쟁에서 우리가 진짜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건 이 영화의 '페미니즘 등급'이 아닙니다. 조지 밀러가 어떤 종류의 자기 검열 없이 이런 직설적인 이야기를 통쾌하게 할 수 있었던 건 그가 '늙은 백인 이성애자 남자'의 특권을 누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죠. 물론 이런 식으로 자기 특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영감님이야 대환영이지만.


감독: George Miller, 배우: Tom Hardy, Charlize Theron, Nicholas Hoult, Hugh Keays-Byrne, Josh Helman, Nathan Jones, Zoë Kravitz, Rosie Huntington-Whiteley, Riley Keough, Abbey Lee, Courtney Eaton, John Howard, Richard Carter, Iota, Angus Sampson

IMDb http://www.imdb.com/title/tt1392190/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7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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