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가시 (2012)

2012.06.28 23:08

DJUNA 조회 수:17785


연가시의 학명은 Spinochordodes tellinii. 곤충 몸에 기생하며 내장을 먹고 살다가 성충이 되면 알을 낳기 위해 숙주의 뇌를 조종해 물가로 유도한 뒤 빠트려 죽인다고 하죠. 연가시는 몇 년 전부터 한국 인터넷의 스타가 되었는데, 그건 연가시를 다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클립과 캡쳐가 인터넷에 돌면서 온갖 음모론과 도시전설의 재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나름 한국적인 소재라고 할 수 있어요. 박정우의 [연가시]가 척 봐도 호러인 소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체 손상 묘사가 별로 없는 건전한 영화가 된 건 연가시 도시전설에 익숙한 어린 관객들을 끌어오기 위해서라는 이야기가 돕니다.

연가시는 사람의 몸에 기생하지 않기 때문에, 이 영화에 나오는 연가시는 돌연변이 변종 연가시입니다. 언젠가부터 갑자기 대한민국 전역에 퍼지기 시작한 이 작은 괴물에 감염된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식욕증가와 갈증에 시달리다가 물가로 뛰어들어가 죽습니다. 연가시를 없애려 구충제를 먹으면 부작용 때문에 감염자들은 또 죽고요. 정부에서는 일단 감염자들을 격리시킨 뒤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데, 우연히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구충제 하나가 치료에 효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어차피 과장은 있죠. 하지만 인간의 뇌가 기생충이나 미생물에 취약하다는 건 사실입니다. 기생충들에게 조종당하는 건 곤충 뿐만이 아니라는 거죠. 만물의 영장이라고 온갖 폼을 잡고 돌아다니지만, 인간의 정신과 몸은 다른 동물들과 조금도 다를 게 없는 걸요. SF 재난 영화의 형식을 통해서라도 이런 걸 알려주는 건 유익한 일입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네 사람의 주인공을 통해 전개되는데, 모두 연가시 사태의 발생과 해결 과정을 그리기 위해 편리하게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주인공 1번은 대학교수였다가 주식으로 전재산을 말아먹고 제약회사 영업사원이 된 재혁인데, 그는 '남자주인공'입니다. 주인공 2번은 역시 주식으로 정신이 나간 재혁의 동생이며 형사인 재필인데, 그는 연가시 사건의 배후를 밝히는 '탐정' 역입니다. 주인공 3번은 재혁의 후배이고 재필과 데이트 중인 국립 보건원 면역병리센터 연구원인 연주로, '과학자'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혁의 아내인 경순이 재혁의 두 아이들과 함께 '감염자'를 대표합니다.

그런데 기생충을 악당으로 삼아서 어떻게 액션영화를 만들죠? 그거야 인간을 진짜 악당으로 만들면 되지요. 하긴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변종 연가시들이 갑자기 등장하는 것 자체가 수상쩍지 않습니까. [연가시]는 음모론을 사건 배후에 놓고 있는데, 많이 극단적이고, 중간중간에 빈틈이 많이 보이긴 하지만 큰 그림 안에서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 장르에서는 원래 이런 종류의 악당들이 자주 등장하기도 하고, 보건과 관련된 대형 사건이 터지면 유사 음모론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익숙하거든요.

영화는 페이스가 빠르고 박진감도 있는 편입니다. 관객들을 지루한 상태에서 방치해두는 영화는 아니에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끊임 없이 사건들이 일어나고 영화는 계속 앞으로 갑니다. 반복되는 군중 장면이 쉽게 지겨워지고, 아무리 상황이 급하다고 해도 왜 다들 저렇게 고함만 질러대는 건지 궁금해지긴 해도 영화 자체는 결코 멈추지 않아요. 좋은 거죠.

단점은 엄연히 SF인 이 영화가 그렇게 머리를 쓸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한국 액션 영화가 서스펜스를 만들기 위해 동원하는 방법들 중 가장 나쁜 걸 쓰고 있어요. 주인공들의 지능을 떨어뜨리는 거죠. 충분히 복잡하고 영리한 추리물이 될 수 있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추적과정은 극단적으로 단순하고, 그 직선에 가까운 미로 속에서도 주인공들은 계속 길을 잃는데, 보다보면 중반부터 짜증이 날 정도입니다. 특히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의 정보를 조립해 진상에 도달할 위치에 있는 재혁은 왜 저러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중저음의 근사한 목소리로 완벽한 발성의 고함을 질러대며 전력질주를 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분명 있을 텐데 말입니다. 하긴 그건 '탐정' 재필이나 '과학자' 연주도 다를 게 없긴 하군요.

[연가시]는 걱정했던 것만큼 나쁜 영화는 아닙니다. 나름 사회 비판도 있으며 속도도 빠르고 인상적인 장면들도 있어요. 딱 [해운대] 정도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하지만 한국식 재난 영화는 꼭 이런 식으로만 만들어져야 하는 걸까요? 조금 더 머리를 쓰면 안 되겠습니까? 왜 이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한국 관객들이 재혁같은 인물에게만 감정이입할 거라고 믿는 거죠? (12/06/28) 

★★☆

기타등등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인데, 재혁과 재필이 올바른 절차를 따라 행동했다면 10만명이 며칠 일찍 약을 구했을 거고, 최소한 수백명이 목숨을 건졌어요. 가장의 입장이니 뭐니 하며 미리 공감하기 전에, 그런 가족 이기주의와 급한 성미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감독: 박정우, 출연: 김명민, 이하늬, 김동완, 문정희, 이형철,  다른 제목: Deranged

Hancinema http://www.hancinema.net/korean_movie_Deranged.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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