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닝 크레딧을 보면 [죽음의 긴 머리칼]은 앤소니 도슨이라는 사람이 감독을 하고 줄리안 배리라는 사람이 각본을 쓴 영화죠. 하지만 도슨과 배리는 모두 가명. 도슨은 안토니오 마르게티, 배리는 에르네스토 가스탈디의 가명입니다. 수많은 이탈리아 영화인들이 이런 가짜 영어 이름을 붙어 자기 영화를 국제 시장에 팔았지요.

시대배경은 15세기 말입니다. 훔볼트 백작과 그의 아들 쿠르트는 백작의 형제인 프란츠를 살해했다는 죄로 아델 카른스타인을 화형에 처합니다. 아델은 죽으면서 훔볼트의 가문에 저주를 내리고, 어머니의 처형을 막으려던 딸 헬렌은 훔볼트에게 강간당하고 살해당합니다. 카른스타인 집안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딸인 리사베트는 어른이 되자 쿠르트에게 강제로 결혼당하죠. 그리고 그 날 헬렌과 똑같이 생긴 메리라는 여자가 결혼식장에 들어와 기절합니다.

제목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참 6,70년대 한국 호러 영화스럽습니다. 그것도 당연한 것이, 당시 한국영화들은 국내 전통 안에서 자생한 게 아니기 때문이죠. 알게 모르게 다 바깥 영화들의 영향을 받았어요.

이 영화에도 다른 영화나 문학작품의 영향이 많이 보입니다. 마녀의 처형으로 시작하는 흑백 호러 영화인데다가 주연배우가 바바라 스틸이니 무엇보다 마리오 바바의 [사탄의 가면] 생각이 나고 비슷한 장면도 많습니다. 바바의 총기는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그 나름대로 아름다운 장면들이 많아요. 대부분 피사체가 바바리 스틸일 때. 감독의 예술혼을 자극하는 배우였나 보죠.

그런데 중반부터 영화가 좀 괴상해집니다. 메리는 쿠르트를 유혹하고 두 사람은 리사베트를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시체는 사라지고... 네, 맞아요. 6,70년대 유로 트래시 호러 영화에서 끝도 없이 표절한 모 영화의 방향으로 가는 겁니다.

당연히 문제가 많습니다. 우린 이미 메리가 무덤에서 살아나온 헬렌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사탄의 가면]을 변주한 설명 장면이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반전이 목표인 이 이야기는 먹히지 않죠. 초자연적인 존재가 초자연현상을 조작해서 복수 대상을 광기로 몰아간다니 아귀가 안 맞는 것이죠. 배우들은 최선을 다하지만 이렇게 결말이 보이는 상황에서 이야기가 지루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고. 전체보다 조각이 좋고, 영화 자체의 가치보다는 팬질의 소스로서 가치가 더 높은 영화입니다. (15/04/05)

★★☆

기타등등
정작 머리칼은 별 역할이 없더군요.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정도 있긴 하지만.


감독: Antonio Margheriti, 배우: Barbara Steele, George Ardisson, Halina Zalewska, Umberto Raho, Laura Nucci, Giuliano Raffaelli, Nello Pazzafini, Jeffrey Darcey, 다른 제목: The Long Hair of Death

IMDb http://www.imdb.com/title/tt0058307/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