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의 얼굴

2010.02.22 10:58

DJUNA 조회 수:9506

1.

아톰 에고이얀의 [스위트 히어애프터 The Sweet Hereafter]가 미국 개봉을 시작했고 얼마 전부터 사라 폴리의 사이트를 열고 있는 사람과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어서, 이 캐나다 배우의 얼굴을 갑자기 자주 접하게 되었답니다. 아마 아카데미 시즌이 되면 더 자주 접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 배우의 최근 얼굴을 보면 볼 수록 생각나는 게 있어요. "얘가 정말 우마 서먼을 닮았구나." 1년 전까지만 해도 몰랐었죠. 지금은 어른이 다 되었지만 그래도 사라 폴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론의 대모험]의 쪼끄만 말괄량이 샐리나 [애본리]의 새침떼기 사라니까요. [스위트 히어애프터]나 [엑조티카]에서 보여주는 사라 폴리의 나이 든 모습은 아직 낯섭니다.

그러다 어느 날 보니까... 너무 닮았어요. 사라를 우마 서먼의 작고 파리하고 깡마른 동생으로 소개하면 다들 믿을 겁니다. 게다가 그 빈 공간에서 약간 탁하게 울리는 듯한 목소리까지도 닮은 것 같아요. 나이가 들면 더 비슷해질 걸요.

생각해보니, 이 둘은 [바론의 대모험]에서 같이 출연한 적도 있고, 아직 스타가 아니었던 우마 서먼은 당시 시간이 빌 때마다 사라 폴리의 베이비시터 노릇을 했었죠. 아마 그 때 우마가 사라의 점심에 자기 유전자가 든 약물을 타서 먹인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바로 얼마 전 일이에요. 사라 폴리의 최근 사진이 실린 [사이트 앤 사운드] 잡지를 누군가에게 보여주면서 그 동안 얘가 너무 크지 않았냐고 묻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어요. "얘 어딘가 에이미 웨슨을 닮지 않았니?"

그러고 보니 또 그런 것 같더군요.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한다면 에이미 웨슨은 무지무지 깡마른 패션 모델로 소위 '헤로인 쉬크' 이미지의 표본처럼 여겨지는 사람이죠. 하여간 웨슨이 폴리보다 훨씬 키가 큰 것만 빼면 둘은 정말 닮았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웨슨은 '헤로인 쉬크'말고도 패션계의 우마 서먼으로 통하고 있었지요.

이러고 보니 우마 서먼에서 에이미 웨슨으로, 웨슨에서 사라 폴리로 이어지는 선을 그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마 서먼의 [펄프 픽션] 룩에서 약간 선을 조금 더 길게 끈다면 위노나 라이더나 미란다 리처드슨까지 닿을 거고 반대쪽으로 그으면 가브리엘 앤워까지 가겠지만, 그렇게까지 하면 너무 멀어지니 대충 그 정도로 자르기로 하죠.

하여간 서먼, 웨슨, 폴리는 모두 단단하게 짜여진 광대뼈와 시원스럽게 뜨여진 큰 눈을 가진 사람들로 이 사람들의 공통분모를 뽑아내면 하나의 마스크가 만들어질 수도 있을 거예요. 여기에 대충 우마 서먼 마스크라는 이름을 붙일 수도 있겠죠. 이 세 사람이 가진 각자의 개성은 없어도 분명 아름다운 어떤 것이 될 겁니다.

2.

지하철을 타고 용산역을 지나치면 오가는 군인들을 꽤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면 제복이라는 게 얼마나 사람들을 똑같이 만드는지 알 수 있지요.

그런데 그 개성 말살의 기능은 엉뚱한 역할도 합니다. 개성들을 뭉뚱그려서 사람들의 외모를 일정한 카테고리 안에 가두어 버리는 거죠. 그 때문에, 저는 똑같은 외모를 한 몇 명의 군인들이 십여년 동안 나이도 먹지 않고 용산역 주변을 얼쩡거리는 꼴을 보게 되었답니다. 이런 데자뷔 현상은 물론 당연한 거지만 그래도 기괴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요.

세상에는 수십억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고 또 수천억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태어났다 죽었겠죠. 지독한 기형이 아니라면 그 사람들은 대부분 눈 두 개에 코 하나, 입 하나, 귀 둘인 얼굴을 하고 있었고 또 있을 겁니다. 솔직히 말해 비슷비슷한 재료로 만든 그리 크지도 않은 얼굴이 달라봐야 얼마나 다르겠어요? 어딘가 우리와 아주 비슷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이고 예전에도 있었을 거예요. 예전에 살았던 어떤 사람의 유전자들이 돌고 돌아 다시 저한테 와서 합쳐졌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우마 서먼이 자기 유전자를 먹이지 않았어도(설마 그런다고 정말 닮게 된다고 믿는 사람은 없겠죠?) 사라 폴리는 여전히 우마 서먼을 닮게 자랐을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엘리나 뢰벤존이 크리스틴 스코트 토머스를 그렇게 닮았고 모니카 벨루치가 왜 갈수록 이자벨 아자니를 닮아가는가에 대한 고찰로 이야기를 더 연장할 수 있을 거예요. 하여간 할 말은 간단합니다. 결국 우리는 전혀 특이한 존재가 아니란 말입니다.

3.

마릴린 먼로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만 남긴 게 아닙니다. 마릴린 먼로라는 하나의 틀을 남겼지요. 먼로의 죽음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먼로의 이미지를 모방해왔으며 또 지금도 모방하고 있습니다.

먼로 뿐만 아니라 수많은 스타들이 자신의 틀을 남기고 죽습니다. 그런 것들은 루이즈 브룩스식 헤어스타일처럼 독립적인 스타일의 일부로 남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그 사람 자체가 이미지로 남게 되지요. 대표적인 예로 제임스 딘을 보세요. 그는 여전히 많은 젊은 남성 배우들이 사용하는 틀을 제공합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같은 요새 배우들이 제임스 딘 식 이미지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합니까?

언젠가 누군가 크리스티 털링턴에게 "자신이 누구를 닮았다고 생각하세요?"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나 봐요. 털링턴은 잽싸게 레슬리 캐론, 오드리 헵번, 진 세버그를 예로 들었죠. 물론 털링턴은 러버 페이스라는 자기 별명을 증명하듯 그들을 멋지게 모방하는 작업을 여러차례 능숙하게 해냈지만, 그 사람은 그 때 헵번, 세버그, 캐론을 마치 갈아입을 옷처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스타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개성을 특정 사회적/문화적 현상으로 보편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말일 겁니다. 스타가 되었다고 확신하고 싶으시다면 뒤에 모방자들이 있나 알아보세요. 가장 간단한 체크 방법입니다. 만약 모방자들이 자신의 모방을 모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더 대단한 성공이고요.

이 경우, 스타가 연기해낸 연기 자체가 스타일에 압사당한다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미 [에덴의 동쪽]에서 제임스 딘이 보여준 연기(그것도 아주 뛰어난 연기였는데)를 연기 자체로 보기는 상당히 힘들지 않습니까?

4.

사라 폴리는 분명 우마 서먼을 닮았지만 연기 패턴은 전혀 다릅니다. 사라 폴리의 방식이 보다 정통적이며 정교하죠. 얼굴이 닮은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렇다고 사람까지 따라가야 한다는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사라 폴리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사람을 '제2의 우마 서먼'이라고 합니다. 폴리 자신은 화도 좀 날 거예요. 그래도 모국인 캐나다에서는 자기한테 헌정된 노래까지 있을 정도로 국민적인 스타인 사람이 '제2의 아무개'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니 얼마나 짜증날까요. 적어도 저같으면 그랬을 거예요.

그래도 홍보 전문가들에게 '제2의 아무개'는 꽤 유용한 도구입니다. 이건 헐리웃에서 계속 속편을 만들어대는 심리와 같죠. 원본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꽤 본전을 뽑아낼 수 있는 도구인 겁니다. 그래서 세월이 흐른 뒤에 보면 상당히 엉뚱하게 느껴지는 캐치프레이즈들이 등장하기도 하죠. 마를레네 디트리히처럼 막강한 자기 개성을 과시하는 사람도 초짜 시절에는 '제2의 그레타 가르보'라는 말을 들었다는 걸 아세요?

지금은 디트리히를 제2의 가르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디트리히 자신의 개성이 '제2의 아무개'라는 것으로 누르기엔 너무나도 강렬했기 때문이지요. 디트리히가 별로 가르보를 안 닮았다고요? 그렇다면 '제2의 비비안 리'로 시작한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어때요?

결국 여기서 사람의 가치가 드러납니다. 은퇴할 때까지 '제2의 아무개'라면 결국 그 사람은 능력이 없거나 능력을 펼 기회가 없었던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능력있고 자존심도 있는 예술가라면 마땅히 자신이 모방작이 되는 것을 거부할 것이고 어쩌다가 비슷해진다면 일부러 멀리 달아날 겁니다.

이건 배우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겠죠. 결국 스타일의 모방으로 끝나고 마는 다른 예술가들(예를 들어서 영화 감독이라는 사람들)의 미래도 결코 길지는 못할 겁니다. 그들의 작품들이 표절이 아니라고 판명된다고 해도요.

따지고 보면 모두 자질 문제인 겁니다. 일본 문화가 개방되어서 표절이 어려워진다고 해서 요새 유행하는 스타일 모방의 영혼 팔기가 없어질 리는 없겠지요. 상황이 바뀐다고 해서 자신만의 무언가가 없는 사람들이 갑자기 그 무언가를 만들어 낼 리는 없는 겁니다. (97/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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