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리처즈의 모자 던지기

2010.02.22 11:04

DJUNA 조회 수:5032

1.

아직도 메리 타일러 무어 Mary Tyler Moore의 모자 던지기가 '쉬크한' 제스처라는 사실이 놀랍지 않나요? 올해만 해도 이 유명한 제스처를 흉내내는 장면을 두 번이나 보았습니다. [언지프 Unzipped]에서 아이작 미즈라히 Isaac Mizrahi가 그랬고 [엘렌 Ellen]의 오프닝에서 엘렌 드제너러스 Ellen DeGeneres가 그랬죠. 후자의 경우, 원조인 메리 타일러 무어가 직접 등장해서 레슨까지 해주었습니다.

모두 다른 분위기의 장면이었지만 그 경건함과 애정만은 동일했습니다. 그런데 [메리 타일러 무어 쇼 The Mary Tyler Moore Show]가 언제 프로그램인가요? 종영된 해인 77년으로 계산해도 벌써 20년 전 쇼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구닥다리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이 이리도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일까요?

몇 가지 답이 있습니다. 지금은 앞의 글에서 언급했던 걸 살짝 비틀어서 다시 써먹기로 하죠. '새 것'은 언제나 새로 만들어진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한 개인에게 '새 것'은 그 사람이 처음으로 접한 것 이상은 아닙니다. 따라서 일정한 질을 유지하고 있고 지속적인 보급만 이루어진다면 옛 작품들은 상당히 긴 수명을 유지하며 새 독자/관객/시청자를 얻을 수 있죠(그렇지 않았다면 [어린 왕자]가 그렇게 오랫동안 여러 출판사를 먹여 살리지 못했겠지요.) 그리고 옛 프로그램의 재방송으로 방영시간을 채우려는 방송국들이 전국에 우글거리는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이런 보급이 정말로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은 있나봅니다. 초기 단계지만 그래도 케이블 TV가 있고 앞으로 채널의 수는 점점 늘어만 갈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청자들이 [아씨]나 [청실홍실]을 다시 보면서 질질 짜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미안하지만 어림반푼 어치도 없습니다.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여러분도 알죠. KBS에서 [아씨]를 리메이크 해서 방영했던 때를 기억해보세요. 명성에 비해 참으로 빈약한 시청률이었지만 때맞추어 몰아친 IMF 파문이 없었다면 그 정도도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요새 관객들에게 '감'이 안 왔기 때문이지요. 기본 정서부터가 틀립니다. 몇 십 년 기억상실은 상당히 치명적인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대중문학은 참으로 수명이 짧습니다. 한 때는 장안의 지가를 올리던 [자유부인]과 같은 소설들을 요새 누가 읽겠어요? 주말 저녁마다 시청자들을 집안에 붙들어 매놓았던 TV 드라마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요샌 아무도 [맨발의 청춘]을 [카사블랑카]만큼 진지하게 보려하지 않습니다. 결국 남은 것은 그나마 보존이 쉬웠고 정보량이 적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지속적 향유가 가능했던 몇몇 유행가들이 전부인 것 같아요.

이걸 보고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바보스럽습니다. 꼭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것도 못되니까요. 사정이 그러니까 그냥 그렇게 된 거죠. 몇 개 되지도 않는 방송국들이 닳아빠진 옛 드라마들을 재방송 안 해주었다고 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2.

물론 [만추]나 [아리랑]과 같은 우리 영화의 고전을 잃어버린 것은 정말로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일이며 그건 앞 세대의 근시안적이고 편협한 문화행정의 잘못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옛 영화들의 잘 보존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옛 세대와 요새 세대의 갭은 그대로 남았을 겁니다.

여기서 [메리 타일러 무어 쇼]와 [맨발의 청춘]을 비교하는 또 다른 답이 나갑니다. [메리 타일러 무어 쇼]는 독자적인 문화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독자적인 쇼입니다. 미국의 70년대는 그냥 그들의 70년대이며 지금까지 길게 이어지는 긴 문화적 흐름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메리 타일러 무어 쇼]는 그런 문화를 구성하는 상당히 큰 덩어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문화를 밖에서 물려받습니다. [맨발의 청춘]이 쉬크해지려고 발버둥치면서 끌어당긴 것들은 모두 물 건너서 온 것들입니다. 기억상실은 당연한 일이었죠. 우린 필립 K. 딕 Philip K. Dick 소설 주인공처럼 남의 기억으로 뇌를 채우고 있었으니까요. 쉽게 삭아가는 우리의 과거를 대신해 우리 기억을 채웠던 것은 '그들의 70년대', '그들의 60년대'였습니다.

고유의 스타일은 생각만큼 쉽게 낡지 않습니다. 쉽게 낡는 것은 모방자들과 원조들보다 재능 없는 2차 수용자들입니다. 옛날 사진들을 보면서 그 당시엔 참으로 쉬크하게 느껴졌던 옷들이 얼마나 촌스러워 보이는지 알아차리고 얼이 빠진 적 있습니까? [티파니에서 아침을 Breakfast at Tiffany's] 같은 옛날 헐리웃 영화들을 보면서 이미 3, 40 년이나 유행이 지난 옷을 입은 오드리 헵번 Audrey Hepburn이 얼마나 세련되게 보이는지 알고 역시 같은 수준으로 얼이 빠진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그런 경험이 있다면 더이상 종이 낭비하면서 설명을 질질 끌 필요 없겠지요. 뼈속까지 느끼고 계실테니까.

문제거리가 하나 더 나갑니다. 그건 한 시대를 보존하는 것은 당시에 나왔던 개별 작품들의 질이 아니라 스타일이라는 것입니다. [오발탄]의 예를 다시 들어 봅시다. 힘있고 감동적인 작품입니다. 내용만 따진다면 시대를 탈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일반 관객들이 [오발탄]이나 비슷한 시기에 나온 다른 영화를 즐기려면, 촌스러운 영화 음악과 신파의 극을 달리는 성우들의 연기, 당시 대중 문화를 지배했던 그 감상적인 정서를 넘어서야 합니다. 게다가 배우의 외모에 대한 관객의 반응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엄앵란 아줌마의 젊은 시절 모습을 보면서 왕년의 인기 비결을 찾는 게 왜 이리 힘이 드는 건지요. 죄의식까지 느껴집니다!

평론가들이나 영화 매니아들에게 그런 벽은 그렇게 높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평범한 일반 관객들에게 그건 상당히 큰 벽입니다. 적어도 저녁의 오락을 위해 영화를 보려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높은 벽입니다. 그리고 시대의 흔적을 보존하는 사람들은 평론가들이나 매니아들이 아닌 이런 보통 관객들입니다. 그들에게 어필할 수 없다면 그 스타일은 죽은 것입니다. 평론가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소용없습니다. 예술 향유는 의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98/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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