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3.05 09:52
이 글은 Fandango!님이 1월 27일 게시판에 남겨주신 질문에 대한 저 나름대로의 답변입니다.
우선 제가 별 생각 없이 가장 로맨틱한 영화라고 생각하는 작품은[밀회]입니다. 제가 아주 어린 시절에 본 영화여서 유달리 기억에 더 잘 남은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저한테 로맨틱한 영화에 대한 상을 제공해준 영화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죠. 가장 로맨틱하다고 생각하는 장면은 역시 로라와 알렉의 이별 장면일 겁니다. 전 로라의 어깨 위에 살짝 올려졌다 사라지는 알렉의 손, 그리고 갑자기 미친 것처럼 철로로 뛰어나가는 로라의 모습에서 매우 영국적인 로맨스의 이미지를 읽습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레베카]에서 가장 로맨틱한 장면은 로렌스 올리비에와 아무 상관 없습니다. 사실 막시밀리언 드 윈터가 그렇게 로맨틱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아니, 이 사람에게 성격이 있기는 했던가요?). 하지만 전 가정부 댄버스 부인은 굉장히 로맨틱한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조앤 폰테인이 연기한 이름 없는 화자 앞에서 죽은 전 주인의 속옷을 쓰다듬는 부분에서는요. 페티시즘과 네크로필리아가 근사하게 결합된 이 장면에서 전 죽음을 초월한 로맨틱한 사랑을 본답니다.
네크로필리아 말이 나왔으니 [현기증] 이야기를 안하고 넘어갈 수는 없죠. [현기증]은 히치콕의 영화 중 썩은 로맨티시즘 냄새를 가장 강하게 풍기는 영화입니다. 특히 버나드 허먼의 로맨틱한 음악이 깔리는 동안 미치광이 스코티가 주디를 매들린으로 변신시켜 놓고 황홀경에 빠지는 장면은요. 여기서 우리는 교훈을 하나 얻을 수 있으니, 그건 진짜 변태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로맨틱하다는 것입니다.
미친 사람들도 정상인들보다 로맨틱합니다. [앤젤 베이비]가 그걸 증명하는 영화가 아닐까요? 정신분열증에 걸린 두 오스트레일리아 연인들이 아이를 낳기 위해 약물 요법을 중단하자, 그들은 말 그대로 미쳐 버립니다. 둘은 아기와 사랑을 위해 광기의 지옥을 택한 거죠. (이 로맨틱한 미치광이에 대한 관점을 사실로 받아들이지는 마시길.)
로맨티시즘은 연애담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로맨스에서 중요한 것은 감정의 흐름이며 이것은 꼭 연애담이 아니더라도 쏟아져 나올 수 있습니다. 쇤베르크의 [정화된 밤]은 기가 막히게 로맨틱한 음악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게 원작이 되었던 '로맨틱한' 시 때문일까요? 천만에요. 문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곡 자체의 음악적인 특성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적절하게 리듬을 타고 감정을 쏟아내는 방법만 안다면 연인들 따위는 쓰지도 않고 굉장히 로맨틱한 영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제가 자주 언급하는 예로 [플레전트빌]에서 서서히 컬러를 찾아가는 플레전트빌의 흑백 사람들이 있습니다. 연애담과는 거의 상관이 없지만 흑백의 이미지에 불과했던 사람들이 완벽한 리듬에 맞추어 칼라의 살아 숨쉬는 인간들로 변하는 과정에는 강렬한 로맨티시즘이 묻어 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아미스타드]엔 제가 아주 로맨틱하다고 생각하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감옥에서 싱케이와 볼드윈이 대화를 하는 장면이죠. 이 두 남자들은 상대방의 언어를 한 마디도 못하면서 어떻게든 서로에게 의사를 전달하려 하는데, 말도 안되는 이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갈팡질팡하던 둘은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말이 통하기 시작합니다. 볼드윈은 흥분해서 뛰어다니기 시작하고 영화는 진짜 알짜배기 로맨스 영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역시 연애담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로맨틱한 장면으로는 [화씨 451]에 나오는 '북 피플' 마을 장면이 있습니다. 버나드 허먼이 작곡한 아름다운 음악이 깔리고 눈이 조금씩 쏟아지는 동안 이 초라한 행색의 사람들은 입으로 그들이 품고 있는 문학 작품들을 되새기며 걸어다니고 있습니다...
버나드 허먼을 한 번만 더 꺼내보죠. [유령과 뮤어 부인]에서 선장과 루시가 밤바다를 바라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허먼의 음악이 거친 밤바다를 그려내는 동안 위기에 처한 선박의 구조신호가 들려옵니다. 우리의 두 주인공은 연애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대사를 나누고 있을 뿐이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그렇지가 않죠. 왜일까요? 아마 찰스 랭의 흑백 촬영과 허먼의 음악이 두 배우의 존재감과 결합한 결과일 겁니다. 역시 구체적 내용보다는 영화적 특성 때문이겠죠.
로맨틱한 캐릭터들.... 전 [소년은 울지 않는다]의 라나 티스델이 로맨틱하기 짝이 없는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로맨스에는 환상과 자기 기만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로맨틱한 연인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의 환영과 사랑에 빠지고 그 환영을 유지하는 사람들입니다. 로맨스는 컴퓨터가 등장하기도 전에 존재했던 가상현실 게임입니다. 영화 속의 라나 티스델은 그 극한을 보여줍니다. 티나가 브랜든을 창조했던 것만큼 라나 역시 브랜든을 창조했으니까요.
[아델 H의 이야기]의 주인공 아델 위고도 빼놓을 수 없죠. 아델 위고의 미치광이 사랑은 너무 지나쳐서 어느 순간에는 사랑하는 남자 자체의 중요성까지 사라져 버립니다. 실제로 영화 후반부에서 아델은 남자를 알아보지도 못하죠. 사실 이 단계에 있어서 남자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니, 이전부터 중요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죠. 그는 감정을 열어놓는 문에 불과했을테니까요.
그레타 가르보가 연기한 수많은 캐릭터들에게도 남자들은 부수적입니다. 대책없이 아름다운 [크리스티나 여왕]의 마지막 장면을 보세요. 배 위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화면밖을 바라보는 크리스티나 여왕의 얼굴에는 얼마 전에 살해당한 애인의 존재 따위는 찾을 수도 없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운명을 알고 있기에 그 사랑을 어른답게 포기하는 캐릭터 역시 로맨틱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한 사람]에 나오는 동성애자 비평가 로드니가 그런 사람이죠.
레이프 파인즈는 수많은 로맨틱한 캐릭터를 연기해왔지만, 제 생각엔 그가 연기한 캐릭터들 중 가장 로맨틱한 인물은 [쉰들러 리스트]의 아몬 괴트인 듯 합니다. 아마 파인즈가 연기한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그가 로맨틱한 주인공이 될 자격을 전혀 갖추지 못한 인물이기 때문이겠죠. 그는 야비하고 타락한 뚱보 나찌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가 헬렌에게 품는 애정이 더 절실하게 느껴졌던 것이 아닐까요? 그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애정 때문에 고통받고 그 때문에 더욱 추해져 버립니다. 결과는 폭력적이지만 외양과는 달리 그 폭력은 오히려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음악은... 물론 지금까지 수도 없이 언급한 버나드 허먼이 있군요.[천상의 피조물]에서 줄리엣(아, 이 친구를 왜 언급하지 않았을까? 아마 너무 분명해서였을 겁니다)이 부르는 [라 보엠]의 아리아 [소노 안다티]가 있고요. [베니스의 죽음]에서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도 있죠?
더 있지만 오늘은 이 정도로 족할 것 같군요. (01/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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