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나 Sauna (2008)

2010.02.23 01:18

DJUNA 조회 수:4559

감독: Antti-Jussi Annila 출연: Ville Virtanen, Tommi Eronen, Viktor Klimenko, Rain Tolk, Kari Ketonen, Sonja Petäjäjärvi

핀란드 감독이 사우나를 소재로 한 호러 영화를 만드는 건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린 대충 그런 영화가 어떤 공포를 자극할 것인지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폐소 공포증, 육체의 변형이나 열에 대한 공포. 그런 거죠. 하지만 안티-유시 아닐라의 [사우나]는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영화입니다.

시작부터 기대와는 다릅니다. 이 영화는 사극이거든요. 시대배경은 1500년대로 스웨덴과 러시아 사이에서 벌어졌던 25년의 전쟁이 막 끝났습니다. 두 나라에서 파견된 위원회가 새로운 국경선을 결정하기 위해 파견됩니다. 스웨덴 측의 대표는 핀란드 출신인 에릭과 크누트 스포레 형제입니다. 에릭은 16살 이후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직업 군인이고 크누트 스포레는 언젠가 스톡홀름 대학의 교수가 될 희망을 품고 있는 지리학자입니다.

도입부는 이해가능합니다. 스포레 형제는 핀란드 동쪽의 카리알라 지방에서 농사꾼 부녀가 사는 집에 머무는데, 그만 성미 급한 에릭이 아버지를 스파이라고 생각하고 죽여버립니다. 크누트는 형으로부터 딸을 보호하기 위해 그녀를 지하의 식량 창고 안에 가두는데, 에릭은 풀어줬다고 동생에게 거짓말을 하고는 그냥 가버리죠. 이 정도면 죄와 복수라는 전형적인 유령 이야기의 공식이 마련됩니다. 하얀 여자 유령이 스포레 형제를 따라올 때, 관객들은 이 영화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겠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영화는 점점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요. 스웨덴/러시아 위원회는 북쪽에서 작은 마을에 도착합니다.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늪에는 누가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는 사우나가 하나 세워져 있었고요. 이상할 정도로 깨끗한 마을 사람들의 인구는 지금까지 전쟁 중 에릭이 죽인 사람들의 수와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여기서부터 논리와 설명은 포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큰 그림은 읽을 수 있어요. 영화는 전쟁의 무자비함과 그 속에서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죄의식과 방관하는 지식인의 책임과 같은 것들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아마 사우나나 마을은 에릭의 심리나 기억이 투영된 주관적인 공간일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를 구성하는 개별 장치들을 완벽하게 이치에 맞게 설명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관객들의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원래부터 완벽하게 아귀가 맞도록 계산된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좋게 말하면 데이빗 린치답고 나쁘게 말하면 무책임하죠.

개인적으로 이 주관적인 미로는 절반만 성공했다고 봅니다. 안티-유시 아닐라가 만들어낸 세계의 시각적 이미지는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주제는 묵직하고 드라마도 그에 맞는 무게를 갖추고 있지요. 하지만 영화의 미스터리는 그만큼 재미있지는 못합니다. 미해결의 미스터리가 주는 매력은 분명히 있어요. 하지만 전 해결이 불가능한 설정일수록 주인공들의 심리묘사는 더 정확해야 한다고 봅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인 스포레 형제의 심리묘사는 일관성이 없고 전체적으로 붕 떠 있어요. 호러 장르를 기대하고 온 관객들의 선입견을 극복할만큼 드라마가 알찬 것도 아니고요. 의도와 야심은 이해하겠는데, 그걸 지탱할만큼 미스터리가 좋지 않아요.

여전히 전 이 영화를 꽤 재미있게 봤습니다. 다소 늘어지는 편이지만 러닝타임이 짧은 편이라 장황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16세기 핀란드라는 역사적 배경 역시 흥미롭지요. 전 이들이 당시 지식인들을 그리는 방식 또한 좋았어요. 하지만 잔인무도한 호러 영화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았던 제 옆자리의 커플 같은 사람들은 실망이 대단했을 거예요. 이 영화에서 린치식 악몽을 기대하고 온 사람들은 거의 없었겠지만 그들 역시 이 영화에 만족했을 것 같지는 않아요. 안티-유시 아닐라의 악몽은 아직 데이빗 린치의 것과 같은 교묘함은 갖추고 있지 못합니다. 기다려보면 이보다 더 나은 것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요. (09/07/22)

★★☆

기타등등

전 이 영화보다는 이 감독이 중국 합작으로 만든 [옥전사]를 더 보고 싶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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