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2013)

2014.09.20 00:13

DJUNA 조회 수:8582


유영선의 [마녀]는 올해 나온 한국 영화 중 제작비 효율이 가장 높은 영화입니다. 총제작비 3천만원, 실제작비 천만원. 간신히 단편 하나 찍을 돈으로 버젓한 장편 영화를 만들었는데, 결점이 없다고 말할 수 없어도 장르적 재미도 상당하고 그림도 예쁘게 잘 나왔으며 연기도 좋습니다.

오피스 괴담이라고 홍보하는 영화입니다.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는 몰라도 여성 비중이 높은 사무실이 배경이죠. 새로 온 신입사원 세영의 보고서가 맘에 안 든 팀장 이선은 여덟시까지 일을 끝내지 못하면 손가락이라도 하나 걸라고 말하는데, 세영은 정말 그 제안을 받아들이며 이선 역시 손가락을 걸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영은 8시가 되자 정말 새 보고서와 가위를 들고 나타납니다...

이 정도면 단편 소재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이야기를 씨앗으로 삼아 세영을 주인공으로 한 조금 큰 이야기를 그립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야기'들'이죠. [마녀]는 세영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의 모음입니다. 처음에는 직장 동료들의 뒷담화로 끝날 것 같았지만, 겁에 질린 이선이 어설프게 세영 주변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점점 큰 이야기들이 쌓이기 시작해요.

[마녀]의 재미 중 하나는 이 이야기들을 다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화자는 세영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을 뿐이고, 어떤 화자는 중요한 사실을 감추고 있고, 어떤 화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들의 가장 중요한 정보원과 화자는 여전히 세영 자신입니다. 영화는 추리물의 형식을 반대로 뒤집어 놀려대는 것처럼 보입니다. 추리물은 탐정이 앞으로 전진하면서 미스터리가 조금씩 풀리지만 이 영화는 아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이 이야기들을 통해 꽤 재미있는 초상을 그립니다. 같은 인물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유기적인 흐름을 타고 조금씩 변화하는 초상이죠. 이 초상을 이루는 부분들이 모두 사실은 아니겠지만 심지어 그 거짓말들도 세영이라는 인물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부분입니다. 어차피 이선과 관객 모두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끝까지 알 수 없으니 진실여부에 지나치게 신경 쓸 필요는 없겠죠. 애정 갈구, 사랑받는 사람들에 대한 질시처럼 그럴싸한 것들을 던져준다고 해서 그런 걸 다 받아먹을 필요도 없는 거고.

장르물로서 영화의 위치는 다소 애매합니다. 들어보니 감독/작가인 유영선은 유명한 호러 팬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이 영화는 호러보다는 스릴러에 더 기울어 있습니다. 호러 캐릭터와 호러 재료를 잔뜩 쓴 스릴러죠. 고어는 절제되어 있다가 막판에 터지는 구성인데 클라이맥스 장면은 [오디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단지 그 강도까지 올라가지는 않아요. 제작비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이야기의 성격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이 정도로 충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손가락 내기를 다룬 전반부에 비해 탐문수사가 이어지는 중반부의 긴장감이 좀 약해보이긴 하는데, 그렇다고 그 부분에서 이야기의 재미가 많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요.

이 영화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사람은 역시 세영을 연기하는 박주희입니다. [족구왕]의 안재홍이 그랬던 것처럼, 이전에도 여러 번 봤지만 한 사람으로 묶지 못하다가 이번에 확 각인된 배우죠. 일단 기본이 좋습니다. 대사 예쁘게 치고 멋들어지게 싸가지가 없으며 적절하게 싸늘하고 섬뜩합니다. 여기까지는 평판이 좋아서 기대를 했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박주희의 세영이 의외로 러블리했다는 것이죠. 거짓이건 아니건, 통쾌하거나 감정이입이 가능한 부분도 많고. 물론 제가 세영과 같은 직장에서 일했다면 사정이 달랐을 수도 있지만. (14/09/20)

★★★

기타등등
논리적으로 따진다면 영화에서 가장 믿을만한 부분은 누군가의 회상을 통하지 않은, 세영의 과거 묘사입니다. 그 때문에 그 부분이 영화 안에서 조금 튀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 장면이 다른 이야기보다 더 많은 정보를 주는 건 아니란 말이죠.


감독: 유영선, 배우: 박주희, 나수윤, 이미소, 강기화, 신예진, 안선영, 이익준, 이규형, 다른 제목: The Wicked

Hancinema http://www.hancinema.net/korean_movie_The_Wicked.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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