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12 21:47
비행사인 피트는 피아니스트인 산드라와 매릴랜드의 농장주인 매기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습니다. 어이없는
건 두 여자들 중 어느 누구도 피트의 흐릿한 태도를 비난하지 않는다는 거죠. 이미 매기와 두 차례 약혼했다가
파혼한 경력이 있는 피트는 술김에 산드라와 결혼해버리는데, 그만 산드라와 전남편과의 결혼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을 알게 됩니다. 피트는 산드라가 정식으로 독신이 된 날 다시 청혼하려 하지만 산드라는 그날 공연이 있다면서
필라델피아로 떠나고 포기한 피트는 그냥 매기랑 결혼해버려요. 그리고 브라질로 날아갔다가 그만 실종되어버립니다.
졸지에 과부가 된 매기는 산드라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 둘은 협정을 맺는데, 산드라가
아기를 낳으면 그 아기는 매기가 갖고 대신 산드라를 경제적으로 책임진다는 것이죠. 그런데 아기가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피트가 살아서 돌아옵니다. 세상이 다들 피트의 아들을 매기의 아기로 알고 있는데 돌아온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할까요? 아기를 다시 빼앗겠다고 온 산드라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요?
알아요. 많이 바보 같은 이야기죠. 폴란 뱅크스라는 당시 통속 작가의 소설 [January Heights]를 각색한
[더 그레이트 라이]의 각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당시에도 없었습니다. 그냥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별 생각없이 나온 공장생산품이죠. 복잡하게 이야기를 펼쳐놓긴 했지만 대단한 갈등이 나올 구석은
없어요. 세 사람이 한 자리에 앉아 한 5분 동안 대화를 나눈다면 다 해결될 문제입니다. 실제로 영화도 그렇게
끝나버려요. 베티 데이비스와 메리 애스터 주연의 영화가 없었다면 누가 이 이야기를 기억하겠어요.
베티 데이비스도 원래는 이 영화에 출연할 생각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번엔 제발 착한 역 좀 맡으라는 팬들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다고 해요. 자기도 이미지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거 같고. 그래도 이야기나 대사가 너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데이비스는 산드라 역의 메리 애스터와 함께 대사를 멋대로 자르고 빈 자리를 즉흥연기로
채워버렸다고 합니다. 감독인 에드먼드 굴딩 역시 그런 두 사람을 적극 지지했다고 하고요. 그래서 두 사람이 나오는 장면을
보면 무척 흥겨워요. 내용은 여전히 유치하고 공허한데 캐릭터와 대사의 통제권을 쥐고 있는 두 배우가 완벽한 교감을
나누며 즐기는 게 보이지요. 좋은 배우의 좋은 연기가 나오기 위해 굳이 좋은 내용까지 필요하지는 않은 겁니다.
(15/05/12)
★★★
기타등등
1. 메리 애스터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2. 비행사와 피아니스트가 나오는 영화인데, 피트를 연기한 조지 브렌트는 실제로 비행기 자격증이 있었고, 메리 애스터
역시 피아노를 썩 잘 칠 줄 알았다고 합니다. 브렌트는 당연히 직접 착륙 장면을 찍었어요. 산드라가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는 장면의 연주는 막스 라비노미츠의 것인데, 그래도 배우가 피아노를 칠 줄 알아서 당시 할리우드
영화치고는 드물게 싱크가 잘 맞는다고 하죠.
3.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우조연상 수상자 해티 맥대니얼이 이 영화에 흑인하녀 바이올렛으로 나옵니다. 흑인하인 제프리로 나오는
샘 맥대니얼은 해티 맥대니얼의 오빠이고요.
4. 40년대 영화가 아니랄까봐 다들 담배를 엄청 피워대요. 근데 그 흡연 장면 대부분이 매기가 임신한 산드라를 돌보는
장면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대본엔 매기가 산드라의 흡연량을 줄이려고 노력하다고 나와있는 모양인데, 산드라는 여전히
굴뚝처럼 담배를 피워대고 매기 역시 만만치 않아요. 몇십 년 동안 흡연의 위험에 대해 교육받은 저 같은 관객들에겐 좀
무섭게 보입니다.
감독: Edmund Goulding, 배우: Bette Davis, Mary Astor, George Brent, Lucile Watson, Hattie McDaniel, Grant Mitchell, Jerome Cowan
IMDb http://www.imdb.com/title/tt0033677/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43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