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밤 (2017)

2017.11.24 16:05

DJUNA 조회 수:7426


장항준의 신작 [기억의 밤]의 주인공 진석은 얼마 전부터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새 집에 이사온 지 얼마되지 않아 형 유석이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납치당했다가 풀려났는데, 그 뒤로 돌아온 형이 진짜 형이 아니라고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죠. 진석은 신경증 때문에 약을 먹고 있고 그런 의심이 시작된 날 하필이면 약을 먹지 않았는데, 그래도 진석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해 확신이 있습니다. 주변에서 무언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거죠.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이 진짜가 아니라고 믿는 증상은 실제로 있습니다. 그리고 이 증상을 소재로 쓴 아주 유명한 소설과 그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이 있지요. 잭 피니의 [바디 스내처스]요. 이 소설에서 그 증상에 대한 해답은 외계에서 온 식물이 진짜 가족을 흉내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장항준은 이 설명을 쓰지 않습니다. 그에겐 다른 원대한 계획이 있죠. 그는 이 반전이 상당히 자신이 있었던 모양이고 영화사에서도 그에 맞추어 홍보를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에 진행된 시사회에서는 첫 번째 진상이 밝혀지기 직전인 초반 60분만을 관객들에게 보여주었다죠.

하지만 그가 정말로 놀라운 반전을 만들어낼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극단적인 상황일수록 설명의 폭이 좁거든요. 도입부에서 영화는 진석이 믿을 수 없는 주인공이라는 걸 분명히 했으니 폭은 더 좁아졌습니다. 엉뚱하게도 영화의 배경이 1997년이니 폭은 아까보다도 더 좁아졌어요. 결국 진상이 드러나는 60분대에 이르면 그냥 모든 게 무덤덤해집니다. 그만큼 익숙한 이야기인 거죠.

더 문제가 되는 건 이 영화의 트릭에 이전 한국 영화들의 영향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죠. 그 중 하나는 김지운의 [장화, 홍련]입니다. 강하늘이 연기하는 진석은 그냥 [장화, 홍련]의 수미를 성전환한 버전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엔 [장화, 홍련]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나 다름 없는 장면들이 지나치게 많아요. 전 열 개 정도 세다가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두가 원본이 나아요. 다른 영화는 스포일러가 될 거 같아서 말하지 않겠지만 역시 유명한 영화이고 피어스 콘란은 [장화, 홍련] 대신 이 영화 제목을 언급했더군요. 그리고 장항준이 가져온 건 그 영화에서 한국 영화의 이상한 클리셰라고 지적받은, 그렇게 좋지 않은 부분입니다. 그런데도 역시 그 원본이 된 영화 쪽이 더 좋죠.

독창성이 부족한 것보다 더 문제가 되는 건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는 설명이 지나치게 많아요. 첫 번째 진상이 밝혀지고 나머지 절반은 거의 전부가 내레이션이 끌고가는 설명이거나 설명용 회상입니다. 그리고 이 설명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초반에도 무시할 정도로 많죠. 캐릭터 소개를 전부 주인공의 내레이션에 의존했는데 거기서 멈추지도 못한 영화예요. 그리고 그 남은 부분도 설정에 맞추기 위해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모든 진상이 드러나는 영화 후반의 회상 장면은 억지로 끼워맞춘 티가 너무 나서 거의 웃음이 나올 지경입니다. 결코 웃어서는 안 되는 상황인데도요.

영화가 끝날 무렵엔 왜 장항준이 이 이야기를 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진상이 드러납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아무리 둔한 관객이라도 십여분 전부터 그게 무엇인지 확신하고 있었지만요. 그 이야기는 심각하고 비극적이며 지난 몇 십 년의 한국 현대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 이야기가 이렇게 인위적이고 진부한 트릭을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었던 걸까요? 더 나은 길이 있지 않았을까요? (17/11/24)

★★

기타등등
네, 맞아요. 외환 위기 20주년 기념 스릴러였던 거 같아요.


감독: 장항준, 배우: 강하늘, 김무열, 문성근, 나영희, 다른 제목: Forgotten

IMDb http://www.imdb.com/title/tt7057496/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60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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