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열정 A Quiet Passion (2016)

2017.12.01 21:07

DJUNA 조회 수:3732


테렌스 데이비스가 에밀리 디킨슨의 생애를 다룬 [조용한 열정]이라는 영화를 만든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다들 신기하고 재미있어하면서도 조금 어리둥절해했죠. 디킨슨이 강렬한 캐릭터임은 부인할 수 없겠지만, 그에 어울리는 긴 호흡의 드라마는 별로 없잖아요. 영화보다는 그림이나 연가곡이 더 잘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조용한 열정]을 개봉 당일날 보고 왔어요. 분명 드라마틱한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에밀리 디킨슨의 틴에이저 시절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일어났던 여러 에피소드를 한 줄로 엮은 거 같은 영화였어요. 중간중간에 그 자잘한 이야기들에 어울리는 디킨슨의 시가 삽입되고요. 많이들 이 영화를 에밀리 디킨슨 영상 시집 정도로 보고 있더군요.

이 정도면 고상하지만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처럼 들릴 텐데... 안 그렇습니다. [조용한 열정]은 의외로 재미있는 영화예요. 그리고 많이들 기대하지 않으셨을 거 같은데 위트가 넘칠 뿐만 아니라 상당히 웃기기도 해요. 이 영화에 나오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자기가 쓰는 언어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그 말들을 시도 때도 없이 표창처럼 상대방에게 집어던집니다. 특히 상대적으로 분위기가 밝은 초반은 오로지 아이러니와 위트만으로 무장한 대사들만 나오는 옛날 희극을 보는 느낌도 들어요. 물론 이 밝은 분위기가 언제까지 이어질 수는 없죠. 삶은 원래 실망스럽고 에밀리 디킨슨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영화는 끝까지 물렁해지거나 감상적이 되지 않습니다. 디킨슨 전기 영화가 그래서도 안 되는 거겠지만.

이 영화의 에밀리 디킨슨이 실제 인물과 어느 정도 닮았는지는 모르겠어요. 에밀리 디킨슨의 문학적 이미지, 전기적 사실, 감독의 상상력, 배우 신시아 닉슨의 해석이 결합된 21세기의 창조물이겠죠. 하여간 영화는 디킨슨을 초기 페미니스트로 봅니다. 당시 미국 중산층 여성들의 모든 말과 행동을 제한했던 시스템에 갇혀 허우적거리고 있고 그 이유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돌파할 수 있는 힘이나 현실감각이 없는 사람. 결국 새벽마다 일어나 쓰는 시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던 사람요.

물론 이건 에밀리 디킨슨의 절반에 불과합니다. 인간 에밀리 디킨슨은 보다 정밀한 도구를 통해 보여져요. 특히 가족들, 친구들과의 관계를 통해서요. 영화가 예상 외로 재미있었던 것은 이들의 이야기가 인공적인 가공을 해서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만들지 않아도 극적이고 흥미진진하기 때문이었죠. 에밀리 디킨슨 역시 재미있는 사람이지만 그 주변 인물들도 마찬가지로 자기만의 개성과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일상을 일부러 과장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긴장감이 형성됩니다. 그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감정의 폭도 엄청나게 크고요.

여기서 우리는 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영화에서 디킨슨의 시는 단순한 분위기 조성용이나 배경 음악이 아니에요. 캐릭터의 심장에서 나와 영화 전체를 정의하죠. 자신과 세상에 대한 엄격함 그리고 거기서 필연적으로 만들어지는 시적 표현은 테렌스 데이비스의 영화에 대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17/12/01)

★★★☆

기타등등
찰스 아이브즈의 [대답없는 질문]이 영화 후반에 정말 아름답게 쓰였어요. 하긴 이 음악만큼 에밀리 디킨슨의 생애에 어울리는 작품도 상상하기 힘들군요.


감독: Terence Davies, 배우: Cynthia Nixon, Jennifer Ehle, Jodhi May, Duncan Duff, Keith Carradine, Joanna Bacon, Emma Bell, Rose Williams, Benjamin Wainwright

IMDb http://www.imdb.com/title/tt2392830/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48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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