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시간 Children's Hour (1961)

2019.03.06 23:58

DJUNA 조회 수:1621


그러니까 이렇게 됩니다. 릴리언 헬먼의 희곡 [아이들의 시간]은 1934년에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해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작품을 할리우드에서 노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죠. 하지만 여기엔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시간]은 19세기 초반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희곡이었고, 그 사건의 내용은 두 여자교사가 학생에게 동성애자로 고발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윌리엄 와일러에 의해 영화화된 1930년대 중반에는 헤이즈 규약 때문에 동성애 소재로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그 때가 어떤 때였냐고요. 당시 할리우드에서는 [오만과 편견]의 목사 캐릭터가 우스꽝스럽게 나온다고 도서관 사서로 직업을 바꾸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세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 버전에서는 동성애 이야기가 완전히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신 스캔들의 내용은 두 주인공 마사와 카렌이 카렌의 약혼자 조셉과 난잡한 관계라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릴리언 헬먼 자신이 직접 각색을 했고 영화는 좋은 평을 받았는데, 아무래도 좀 갑갑할 수밖에 없습니다. 헬먼 자신은 이 작품이 동성애에 대한 것이 아니라 거짓말에 대한 것이라고 말했다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런 식의 검열을 거친 각색은 갑갑하고 어색할 수밖에 없죠. 원작을 알고 보면 내용 자체보다는 검열이 더 많이 보입니다. 특히 카렌과 조셉의 연애 이야기는 왜 그렇게 긴 건지요.

와일러 자신도 갑갑했던 것 같습니다. 헬먼의 원작을 [아이들의 시간]이라는 원제를 살려서 1961년에 다시 만든 걸 보면요. 그 동안 헤이즈 규약은 사라졌고 할리우드는 당시엔 못 다루었던 이야기를 조금씩 건드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셀룰로이드 클로짓]의 중간 정도에 왔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아주아주아주 조심하면 오드리 헵번과 셜리 맥클레인 주연의 동성애 소재 영화도 만들 수 있었던 거죠.

영화의 시대배경은 현대, 그러니까 1950년대 말이나 60년대 초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헬먼의 원작을 많이 바꾸지 않고 가져왔습니다. 마사 도비와 카렌 라이트는 함께 여자 기숙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카렌은 의사인 조셉 카딘과 약혼한 사이입니다. 마사는 카렌이 결혼해서 자신을 떠나는 게 두렵습니다. 마사는 이 일로 숙모이고 학교 교사인 모타르 부인과 언쟁을 하는데, 이걸 학생들이 들어버립니다. 학교와 교사를 싫어했던 악동 메리 틸포드는 동급생인 로잘리를 협박해 마사와 카렌이 동성애 연인이라는 루머를 퍼트리고 두 사람의 삶은 산산조각이 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가장 비극적인 부분은 마사가 실제로 카렌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이 작품은 어느 기준으로 보더라도 시대의 유물입니다. 지금 현대 미국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죠. 호모포비아가 미국에서 갑자기 사라진 건 아니지만, 더 이상 사람들은 이 영화 속에서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 동안 동성애는 어느 정도 정상성을 확보했습니다. 그 때문에 이 영화는 당시와는 다른 의미로 고통스럽습니다. 마사가 카렌에게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는 장면은 셜리 맥클레인의 연기가 절절하기 짝이 없는데, 60년대 관객과 지금의 관객은 조금 다른 식으로 반응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기준에서 보면 마사의 자기 혐오가 끔찍할 정도로 두드러지니까요. 60년대의 평균적인 관객들은 이를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우리의 기준은 조금 다르지 않습니까?

같은 장면을 보는 기준이 바뀌었다고 해도 [아이들의 시간]이 강렬한 작품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영화가 그리는 호모포비아의 묘사는 은밀하지만 정확하고 드디어 헤이즈 규약에서 벗어난 이야기는 온전하게 자기 자리를 찾았습니다. 비록 지켜보는 게 고통스럽더라도, 셜리 맥클레인의 마사 도비는 1960년대 할리우드 레즈비언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로 기억될 것이고, 오드리 헵번 영화로도 참 좋은 작품입니다. 이 영화의 헵번은 다른 영화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비극적인 위엄이 있어요. 하지만 우리나라의 헵번 팬은 이 영화를 건너 뛰는 경향이 있지요. (19/03/06)

★★★☆

기타등등
원작에서 마사를 연기한 미리엄 홉킨스는 이 영화에서 모타르 부인을 연기합니다.


감독: William Wyler, 배우: Audrey Hepburn, Shirley MacLaine, James Garner, Miriam Hopkins, Fay Bainter, Karen Balkin, Veronica Cartwright, 다른 제목: Underdog

IMDb https://www.imdb.com/title/tt0054743/
Naver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28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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