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2018)

2019.08.29 00:24

DJUNA 조회 수:5009


2011년, 김보라는 [리코더 시험]이라는 단편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올림픽이 한창이던 1988년을 보내는 은희라는 여자아이의 이야기였지요.

2018년, 김보라는 [벌새]라는 장편영화를 들고 왔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도 이름이 은희였어요. 시대배경은 뜨거운 여름과 김일성의 죽음과 성수대교의 붕괴로 기억되는 1994년. 이 두 은희는 여러 모로 같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언니와 오빠가 한 명씩 있는 방앗간집 딸이고, 아빠는 공부 잘하는 오빠를 편애하고. [리코더 시험]의 은희는 도봉동에 살고 [벌새]의 은희는 대치동에 살지만, 그 사이에 가족은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이사를 갔던 거겠죠.

하지만 [벌새]는 [리코더 시험]의 속편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리코더 시험]의 짧은 러닝타임 동안 제시했던 여러 주제와 소재를 보다 깊이 있게 다룬 작품처럼 보여요. [리코더 시험]을 이루는 수많은 재료들은 [벌새]에 거의 모습을 바꾸지 않고 다시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제 중학생이 된 [벌새]의 은희는 이 비슷한 세계에 훨씬 다채롭고 격렬하게 반응해요.

[벌새]에서 재미있는 것은, 중학생 여자아이의 일상을 그린 이 영화가 의외로 장엄하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응답하라]와 비슷한 시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 시대에 대한 감상적인 향수도 없고, 아이들의 일화를 귀엽게 축소하지도 않습니다. [벌새]에서 은희는 아이를 둘러싼 작은 우주의 중심이며 아이가 겪는 모든 일들 그러니까 가족내의 차별, 한문학원 선생님과의 만남, 단짝친구와 남자친구의 배신과 같은 일들은 신화적인 무게로 진지하게 다루어집니다. 성수대교 붕괴라는 거대한 사건이 영화 속 이야기에 스며들어와도 어색해 보이지 않는 것은 이 작은 여자아이가 보편적인 성장물의 주인공으로서 자격을 획득했기 때문입니다.

보편적인만큼 개인적인 작품이기도 합니다. 완벽하게 자서전적인 영화는 아니겠지만, 영화는 1994년이라는 구체적인 시기를 보낸 여자아이가 직접 체험한 거의 모든 경험을 거의 심장박동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작비 때문에 현대로 무대를 옮기라는 말을 들었지만 거절했다고 하던데 이해가 되는 일입니다. 90년대의 아이들과 지금의 아이들은 전혀 다른 세계를 살고 있지요. 은희를 21세기로 옮겼다면 김보라는 이 영화에서 느껴지는 거의 압도적인 친근함을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연히 은희를 연기하는 배우가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박지후는 더 이상을 선택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해요. 그건 은희의 인생에 영원한 흔적을 남긴 영지 선생님을 연기하는 김새벽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배우가 같이 나오는 장면은 특별히 연기 근육에 힘을 준 티가 나지도 않으면서 관객들의 감정을 휘어잡는 힘이 있습니다. 아직 2019년은 몇 달 더 남았지만 올해의 연기 커플을 뽑으라면 전 주저 없이 이 두 사람을 뽑을 거 같아요. (19/08/29)

★★★☆

기타등등
[우리들]의 설혜인 배우가 이 영화에도 작지만 중요한 역으로 등장합니다. 일주일 전에 개봉한 [우리집]에서도 카메오로 나왔었는데 말이죠.


감독: 김보라, 배우: 박지후, 김새벽, 정인기, 이승연, 박수연, 손상연, 박서윤, 정윤서, 설혜인, 다른 제목: House of Hummingbird

IMDb https://www.imdb.com/title/tt8951086/
Naver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79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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