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스 갬빗 The Queen's Gambit (2020)

2020.11.02 23:26

DJUNA 조회 수:6593


30년 전, 영화잡지에서 몰리 링월드가 소련 체스 마스터와 대결하는 천재 체스 선수로 나오는 영화가 기획 중이라는 뉴스를 본 적 있습니다. 영화는 엎어졌고 제목은 잊었지만 그 뉴스는 제 기억에 남았었어요. 보고 싶지만 존재하지 않아 볼 수 없는 수많은 영화들 주 하나였지요.

스콧 프랭크의 넷플릭스 리미티드 드라마 [퀸스 갬빗]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전 기초적인 조사를 했습니다. 원작이 있더군요. [허슬러]와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를 쓴 월터 테비스의 소설이었습니다. 80년대에 나왔고 그 뒤 꾸준히 영화화 계획이 있었다고요. 혹시 몰리 링월드가 주연하려고 했던 그 영화의 원작이었나? 당시엔 인터넷에 자료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에 뉴욕 타임스 기사가 걸리더군요. 그 영화의 원작 맞았어요. 그리고 히스 레저가 죽기 전에 감독을 맡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접했어요. 당시 주연으로 염두에 두었던 배우는 엘렌 페이지였습니다. 잘했을 거 같아요. 십대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지금 주연인 아냐 테일러-조이보다 더 설득력있었을 거 같고요. 하지만 레저는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에 요절했고 영화는 또 엎어졌지요. 그걸 다시 살려 7부작 드라마로 만든 게 스콧 프랭크였고요.

위에서 말했지만 주인공 베스 하먼은 체스 천재입니다. 어린 시절 역시 천재였던 어머니를 잃고 고아원에 간 베스는 관리인 사이벨 아저씨에게 체스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15살이 되어 입양된 베스는 첫 대회에 나와 대승리를 거두고, 체스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어린 천재에게도 삶은 쉽지 않습니다. 1960년대 배경의 체스 이야기 주인공이라면 마땅히 정복해야 할 소련 체스 마스터 바실리 보르고프가 버티고 있었지요.

80년대에 쓰인 소설이니, 테비스는 당연히 바비 피셔를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썼을 겁니다. 왜 주인공을 여자로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적어도 제가 아는 테비스의 소설들은 모두 남자들의 이야기였으니까요. 바비 피셔와 완전히 다른 인물을 만들기 위해 멀리 가다가 성이 바뀌었을지도 모르죠. 아니면 어쩌다가 [퀸스 갬빗]이라는 제목이 걸렸고 그 때문에 여자 주인공을 만들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는지도. 체스는 소위 '홍일점'인 천재 주인공을 내세우기에 좋은 소재이기도 합니다.

[퀸스 갬빗]이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점은 이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 중 체스를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체스를 아는 시청자라면 훨씬 재미있게 볼 수 있지만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사람들도 드라마를 즐기고 체스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관객 대부분이 게임의 룰을 알고 있다고, 적어도 이들 대부분이 선수들의 움직임을 통해 게임의 규칙을 감 잡을 수 있다고 여기고 만들어지는 야구나 축구 소재의 스포츠물과 비교해보면 그 어려움이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결과만 보면 드라마는 성공입니다. 물론 체스를 모르는 사람들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여전히 모릅니다. 하지만 해독하기 어려운 체스 전문 용어들이 남발하는 동안에도 선수들이 무언가 멋지고 아름다운 대결을 벌이고 있다는 걸 능숙하게 영화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외국어로 부르는 오페라 아리아 같달까요.

하지만 체스 게임만으로는 7부작 드라마를 만들 수 없습니다. 베스 하먼의 캐릭터가 7시간 동안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어야 합니다. 그 재료는 익숙하기 짝이 없는 것이죠. 불행한 어린 시절, 반짝이는 천재성, 정신적 스트레스, 약물과 알코올 중독. 하지만 드라마는 이 익숙한 재료를 익숙한 방식으로 다루지는 않습니다. 익숙한 클리셰로 만들어진 길을 가더라도 조금씩 다르게 느껴지죠.

그 이유 중 가장 큰 건 역시 베스가 여자라는 사실입니다. 드라마는 베스를 중심으로 1960년대 미국 여성들이 맞닥뜨렸던 다양한 억압과 차별을 그려보입니다. 죽은 친모, 피아니스트로서 자기 경력을 잇지 못하고 가정주부로 주저앉은 양모, 인종차별 때문에 입양되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 길을 개척해야 했던 단짝 친구 졸린과 같은 사람들이 이를 위해 등장하고, 드라마는 베스와 이들의 관계를 아주 설득력있게 그려보입니다. 그 중 제가 가장 좋았던 건 베스와 양모 앨마와의 관계였어요. 작가의 결점과 상처가 있는 두 사람의 아주 열정적이지는 않지만 굳건한 연대요.

베스와 보로고프의 대결을 다룬 후반부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드라마가 의도적으로 정치를 제거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정치적인 이야기를 했다는 게 아니라 정치를 개입하려는 외부의 시도를 적극적으로 물리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한 것이죠. 대부분 미국 사람들은 바비 피셔와 보리스 스파스키의 대결을 미국인 천재가 소련이 가장 잘 하는 게임에서 승리한 드라마로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체스 애호가이기도 했던 원작자 테비스는 조금 다른 식의 드라마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원작 소설에서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드라마에서 베스는 적군의 영토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체스에 별 관심이 없는 모국을 떠나 체스의 나라로 갑니다. 거기서 전설적인 인물들을 만나고 그들의 인정을 받지요. 모스크바 장면은 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납치된 공주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이건 좀 판타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소련은 체스를 체제선전에 이용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까요. 여기에 대한 별별 이야기가 다 있지요. 하지만 체스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면 국적과 상관없이 훌륭한 게임을 즐기고 훌륭한 선수를 존중하는 사람들도 그만큼 많지 않았을까요. 전 여전히 이 드라마가 결말을 만드는 방식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30년 전에 만들었다면 이 분위기가 잘 안 살았겠지요.

주연배우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작품입니다. 아역시절을 다룬 1부를 제외하면 베스 역의 아냐 테일러-조이는 늘 드라마의 중심에 있습니다. 테일러-조이는 몰리 링월드나 엘렌 페이지와 비교하면 화려한 외모를 갖고 있죠. 하지만 이 배우의 조금 외계인스러운 독특한 존재감은 평범함과는 담을 쌓은 베스 하먼의 캐릭터에 적절하게 이용되었습니다.

토머스 브로디-생스터, 해리 멜링과 같은 조연배우들도 잘했지만 이들은 좀 기능적인 인물들이고, 전 양모 앨마를 연기한 마리엘 헬러가 좋았습니다. 헬러는 최근 [미니의 19금 일기], [날 용서해줄래요?], [뷰티풀 데이 인 더 네이버후드] 같은 영화의 감독으로 주목 받고 있는데, 배우로서도 정말 훌륭했어요.

[퀸스 갬빗]은 재미있고 매력적인 영상물입니다. 그것도 아주 정통적인 의미로요. 효과적인 연출, 훌륭한 연기와 앙상블, 재미있는 캐릭터라는 고전적이고 당연한 재료들로 이루어진 작품이지요. 옛날에는 이게 '잘 만든 할리우드 영화'의 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것들이 점점 텔레비전의 세계로 옮겨가고 있는 거 같아요. (20/11/02)

★★★☆

기타등등
가리 카스파로프와 브루스 판돌피니가 드라마 속 체스 게임을 만드는 데에 참여했다더군요.


감독: Scott Frank, 배우: Anya Taylor-Joy, Chloe Pirrie, Bill Camp, Marielle Heller, Marcin Dorocinski, Matthew Dennis, Russell Dennis, Thomas Brodie-Sangster, Moses Ingram, Harry Melling,

IMDb https://www.imdb.com/title/tt10048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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