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2011)

2012.06.20 13:51

DJUNA 조회 수:16532


안드리아 아놀드의 [폭풍의 언덕]은 흑인 히스클리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최초의 각색물입니다. 하지만 혁명적인 캐스팅으로 원작을 뒤집어보자고 시작한 계획은 아니었어요. 아놀드는 원작에 맞추어 집시나 서남아시아 계열의 배우를 뽑으려고 공개 오디션을 열였던 모양인데, 그 중 아마추어 배우 제임스 하우슨이 가장 좋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하긴, 로렌스 올리비에 같은 백인 배우가 히스클리프를 연기하는 것보다야 흑인 배우가 나오는 게 더 그럴싸할 수도 있겠죠. 게다가 아놀드의 영화는 윌리엄 와일러의 [폭풍의 언덕]이 그렇듯, 원작 소설의 절반만을 다루고 있거든요. 이후 스토리 진행에 얽매일 필요가 별로 없는 겁니다.

아놀드의 [폭풍의 언덕]은 심술궂은 십대 소녀처럼 고전 각색물에 대한 기대를 밟고 부수고 으깨는 영화입니다. 일단 영화는 1.33대 1의 스탠더드 비율이에요. 요새 같은 HD 텔레비전 시대에 말입니다. 화면은 디지털 티가 팍팍 나고, 사람들이 고전 각색물에서 기대하는 전통 연기나 호사스러움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영화는 거칠고 투박하고 날것이고 지독하게 초라합니다. 아마 워더링 하이츠가 이처럼 암담한 상태로 나오는 영화는 없을 거예요. 동물들이 죽는 장면이나 시체들이 이처럼 자주 보이는 영화도 드물 거고.

괴상해 보이지만, 아놀드의 영화는 완벽한 자기논리를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원작에서도 워더링 하이츠는 그렇게 호사스러운 곳은 아닙니다. 무대가 되는 요크셔의 시골은 거의 야만적일 정도로 황량한 곳이고요. 흑인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히스클리프는 인종편견의 대상이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고전 각색물에 동원되는 고풍스러움을 지워버리고 소재의 날것을 취하는 건 이치에 맞습니다. 그리고 그 날것의 상태에서 영화는 무척 아름다워요. 스탠더드 화면의 디지털이라니, 화면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으실 듯 한데, 정반대입니다. 단지 고전 할리우드 영화나 BBC 각색물의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을 뿐이죠.

아놀드의 버전의 또다른 특징은 캐시와 히스클리프의 아역 시절의 비중이 크다는 것입니다. 거의 절반 정도 쯤 차지하는 것 같아요. 실제로 배우들의 연기도 더 좋아 보입니다. 보다보면 이 영화에서 가장 본전을 뽑은 배우는 성인 역의 제임스 하우슨이 아니라 아역 시절의 솔로몬 글레이브라는 생각이 들 정도. 하긴 거의 인위적인 연기를 시키지 않는 이런 스타일의 영화에서는 어린 배우들이 이득일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아놀드가 집중하는 것도 어린 시절의 캐시와 히스클리프입니다. 그들의 길들여지지 않고 거칠고 순진무구한 감정과 관계요.

취향을 심하게 탈 영화입니다. 전 이 작품이 윌리엄 와일러 영화에 비해 특별히 원작에서 떨어져 있다고 보지는 않아요. 하지만 지난 100여년 동안 대중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이미지라는 것이 있죠. 특히 영화가 그린 히스클리프에 대한 의견은 심하게 갈릴 겁니다. 그가 흑인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연기하는 소극적이고 위축되어 있는 히스클리프가, 우리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바이런식 안티 히어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전 이런 식의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도 이해해요. (12/06/20) 

★★★☆

기타등등
제임스 하우슨의 목소리는 더빙되었다고 합니다. 


감독: Andrea Arnold, 출연: Kaya Scodelario, James Howson, Shannon Beer, Solomon Glave, Simone Jackson, Steve Evets, Lee Shaw, Jonny Powell, James Northcote, Nichola Burley, Oliver Milburn,  다른 제목: Wings of Hope

IMDb http://www.imdb.com/title/tt1181614/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86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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