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유 끌로델 Camille Claudel 1915 (2013)

2013.11.09 13:59

DJUNA 조회 수:9558


브뤼노 뒤몽의 [까미유 끌로델]은 브뤼노 뉘탱의 [까미유 끌로델]의 속편이 아닙니다. 뉘탱의 영화가 다루었던 실존인물의 이후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죠. 하지만 뒤몽의 영화를 온전하게 감상하려면 뉘탱의 영화를 보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뉘탱의 영화가 뒤몽의 영화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뒤몽이 의도적으로 뉘탱의 영화와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두 영화는 정말 다릅니다.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죠. 뉘탱의 영화는 옛날 스튜디오 시절에 나왔을 법한 고풍스러운 예술가 전기영화로, 이자벨 아자니의 연기나 가브리엘 야레의 음악은 로맨티시즘의 극단을 달립니다. 하지만 뒤몽의 영화는 쥘리에트 비노쉬라는 국제적인 스타를 캐스팅한 것을 제외하면 화려한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저예산 소품이며, 쨍하니 차가운 디지털 화면이 음악없이 냉정하게 그려내는 짧은 이야기는 로맨틱함과 거리가 멉니다. 뒤몽의 원래 스타일을 고려한다고 해도 이는 의도적이었을 겁니다. 속편이 아니고 주연배우도 다르다면 전작과 비슷한 영화를 만드는 건 의미가 없죠. 될 수 있는 한 멀리 달아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러는 동안 전작이 건드리지 못한 새로운 영역을 찾아낼 수도 있을 거고요.

뒤몽의 [까미유 끌로델]은 까미유 끌로델이 정신병원에 감금된 지 2년 뒤인 1915년의 사흘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표면상으로 드러난 이야기는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까미유 끌로델은 동생인 폴 끌로델이 정신병원을 찾아와 자신을 꺼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영화 중반 이후에 드디어 병원을 찾은 폴은 그럴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까미유는 정신병원에 감금된 채 남은 인생을 보냅니다.

뒤몽의 이야기는 당시 일어났던 일을 그대로 재현한 게 아니지만, 당시에 충분히 있을 수 있었던 일입니다. 이 각본을 쓰기 위해 그는 까미유 끌로델과 폴 클로델이 남긴 글들과 병원자료들을 꼼꼼하게 참고해서 재구성했다고 해요. 이들의 대사 상당수는 그들 자신의 목소리를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아까 로맨틱함과 거리가 먼 영화라고는 했지만, [까미유 끌로델]은 구세대의 로맨티시스트 글쟁이들이 끝도 없이 써먹었던 익숙한 상황을 다루고 있습니다. 정신병원에 감금된 멀쩡한 여자 이야기요. 영화 속 쥘리에트 비노쉬는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있지만 정신병원 밖의 이자벨 아자니보다 훨씬 멀쩡해 보입니다. 편집증 증상이 살짝 보이긴 하지만 그렇게 심한 것 같지는 않아요. 정신병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는 저에게만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라 영화 속 병원 의사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굳이 감금될 이유가 없는 사람인 거죠.

뒤몽은 까미유 끌로델의 상황을 정확하게 그리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합니다. 진짜 병원을 로케이션으로 삼아 진짜 환자들과 진짜 병원직원들을 출연시킨 거죠. 특히 영화에 나오는 환자들 대부분은 척 봐도 배우일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온전하지 못한 정신으로 수십 년을 살아온 흔적이 몸에 그대로 배어 있어요.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쥘리에트 비노쉬가 비극적인 여자주인공을 연기하고 있으니 관객들은 당연히 주연배우와 환경을 대비해 보게 되고 그를 통해 감금상황의 고통과 공포를 그대로 체험하게 됩니다. 특별히 잔인하거나 부당한 일이 벌어지는 곳은 아니에요. 하지만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도 거기 있는 것만으로 미쳐버릴 것 같은 곳입니다.

이러니 관객들은 까미유 끌로델과 함께, 곧 병원을 찾는다는 폴 끌로델을 기다리게 됩니다. 우리의 주인공과는 달리, 그가 누나를 병원에서 꺼내줄 거라는 희망은 없죠. 다들 까미유 끌로델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극장을 찾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폴 클로델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게 될 거라는 기대는 있습니다.

영화는 그 기대를 온전하게 채워주지 않습니다. 폴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몇십 분 동안 관객들은 왜 그가 가톨릭 신앙을 택했는지, 종교와 예술에 대한 그의 신비주의적 관점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왜 그런 잔인한 선택을 했는지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어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신앙과 지적인 태도가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정신적으로 죽어가는 누나를 이해하고 동정하고 도와줄 수 있는 기초적인 인간적인 감정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곧장 말해 무지 재수 없습니다.

뒤몽의 영화는 까미유 끌로델의 후반 인생 중 사흘만을 추려냈습니다. 그것을 다시 90여분으로 압축한 영화를 보면서 쥘리에트 비노쉬의 클로즈업을 감상하는 건 예술적으로 만족스러운 경험일 수도 있죠. 하지만 까미유 끌로델이 그 이후 43년에 죽을 때까지 여기에서 살았고 그동안 겪었던 일들이 그 90여 분의 반복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예술적 감흥이니 뭐니 하는 생각은 싹 사라지지 않습니까? 남은 건 공포와 분노뿐인 겁니다. (13/11/09)

★★★☆

기타등등
그냥 원제대로 [까미유 끌로델 1915]라고 제목을 붙이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뉘탱의 영화와 구별하는 예의는 있어야죠.


감독: Bruno Dumont, 배우: Juliette Binoche, Jean-Luc Vincent, Emmanuel Kauffman, Marion Keller, Robert Leroy, Claire Peyrade, Armelle Leroy-Rolland

IMDb http://www.imdb.com/title/tt2018086/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9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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