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아침의 나라 코리아." - 실존하는 책이었을 줄이야.
10년 전쯤 지학사였던가, 출판사는 까먹었지만 어디 영어교과서에 나와 있던 본문에, 제인이라는 여자애가 "서점에서 오늘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이라는 책을 샀어" 라고 편지에 쓰는 부분이 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당시에는 참 80년대스러운 작위적인 (프로파간다?) 설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YBM의 창시자 민영빈 회장은 자서전에서 '한국의 영어 교과서니까 당연히 한국을 찬미하는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교과서를 만들었다' 라고 술회하고 있기도 합니다. ) 그런데 나중에 실제로 저 책 - 새비지 A.랜도어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 을 읽고 나니까 의외로 재미있는 책이더군요. 제가 제인이라도 서점에서 금새 질렀을 듯한 흥미가 있었습니다.
몇 가지 눈에 띄던 대목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민영환 공에 대한 부분입니다. 저는 국사시간에 나오는 내용대로, '명성황후의 인척이었는데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자결했다'- 정도로만 파악하고 있었는데 랜도어는 '조선국의 평시 국군통수권을 쥐고 있는 장군'으로 보고 있더군요.
병조판서가 그런 자리긴 합니다만 조선 후기의 벼슬자리에서 무관의 향취를 느끼긴 힘들었는데, 이런 점은 역시 당시 영국인의 관념답다, 는 느낌입니다.
(전략)
... 야심한 시각에 궁궐로부터 전갈이 왔는데, 그것은 내가 하얀 상복 대신에 아름다운 검푸른 비단옷을 입은 인물을 그리고 싶어한다는 말을 듣고서 국왕이 민 씨(민영환 공)에게 나의 바램을 들어주도록 명한 내용이었다. 궁중뿐만 아니라 전 왕국에서 장례에 대한 규칙이 얼마나 엄격한가를 생각해 봤을 때, 왕의 윤허는 실로 파격적인 일이었다.
... 문을 크게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것은 아침 6시 30분밖에 되지 않은 시각이었는데 .... "랜도어 귀하, 민 장군께서 그림 때문에 우리 집에 오셨습니다. 빨리 와 주십시오" 라는 것이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4시간 반이나 먼저 그 장소에 도착하다니! 나는 즉시 그 곳으로 달려갔다.
평소와 같이 그는 매우 상냥했고 기지와 유머가 넘쳤다. 그는 이 시간을 매우 열망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을 불멸로 남게 해 줄 이 날을 학수고대했으며 그것은 그가 왜 약속 시간보다 "약간" 빨리 왔는지를 설명해 준다. 민영환은 방 안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서 '상복을 벗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밝은 색조의 용 무늬가 그려 있고 소매가 아래로 늘여진 푸른 비단옷... 가슴에는 비상하고 있는 색색의 봉황과 호랑이가 수놓아.... 또한 가슴과 등 부분에서 돌출되고 양 옆구리의 고리에 의해서 고정되어 있는 정방형의 보석이 박힌 금속 허리띠를 차고 있었다.... 그는 하얀 색의 넓은 가죽끈 옆에 있는 세 개의 하얀 가죽 가방과 그의 왼쪽에 놓여져 있는 글 쓰는 도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같았다. 이 가방 안에는 전시에는 최고 지휘권을, 평화시에는 최고 군통수권자임을 나타내는 검이 대대로 전해지고 있다.
내가 자세를 취하게 하자 그는 말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거의 세 시간이나 되는 시간을 그는 조각과도 같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내가 "끝났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으로 일어나 작품을 보기 위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대단히 기뻐했다. 그는 나의 손을 잡고 거의 30분 간이나 흔들었다.
... 그는 당황한 것 같았다. "무슨 일이십니까?"라고 내가 묻자 그는 매우 낙담한 표정으로 "당신은 비취 장신구를 빼먹었소!"라고 대답했다(주: 아마도 벼슬을 나타내는 면류관의 호박을 말하는 듯). 나는 유럽의 미술 기법으로는 앞과 뒤를 동시에 보여 주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점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가 여전히 낙담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다시 앉게 하고는 측면의 장신구를 빠른 스케치로 크게 그려 넣는 것으로 해결을 보았다. 이 책의 삽화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초상화를 본 민영환은 앞서보다 더 큰 슬픔에 잠겼다. 장식은 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다른 쪽 눈을 볼 수 없어서였다.
.... 하루는 그레이트하우스 씨의 집 정원에서...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그들은 조선군의 총사령관인 민영환 공이 보낸 것이라고 하며 편지를 보여주었다.
"친애하는 랜도르 씨에게. 당신에게 약간의 닭과 계란, 감, 소고기, 돼지고기, 밤, 대나무 발, 그리고 표범 가죽을 보내오니 부디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그려 준 훌륭한 초상화에 감사드리며 작은 보답의 표시로 이것들을 보냅니다. 당신의 친구, 민영환"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웬만한 신용이나 돈으로도 구하기 어려운 대나무로 만든 창문 발이었다. (주: 강화 화문석) 감탄할 만한 아름다운 털을 가진 닭들은 며칠간 자유롭게 내버려 두었는데, 새벽마다 울어댔기 때문에 너무나 시끄럽고 귀찮아서 곧 잡아먹어 버렸다....
(후략)
개중에는 동시대의 일본과 비교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랜도어 외에 이사벨라 버드 비숍도 동시대의 나라를 많이 여행하면서 일본과 비교하는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두 사람 다 일본의 첫인상은 좋았다 -> 비판 쪽으로 흐르는 반면, 조선에 대해서는 불결한 첫인상 -> 거부할 수 없는 매력, 이라는 식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질겅질겅 씹으면 쓴맛 뒤에 감칠맛이 우러나오는 칡뿌리마냥 생각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전략)
... 또한 외래 문화의 일본적 수용이란 센스와 넌센스의 기묘한 공존을 지켜 보는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중략) 일본인들이 끓는 물로 매일 목욕하는 습관은 그들의 조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도 지속하고 있으나 나는 일본인들은 매우 불결한 국민이라고 단정한다.... 만약 깨끗한 물로 목욕한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깨끗할 것이다.... 당신 차례가 오기 전에 당신 앞에 이미 수백 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조그만 욕탕 속에서 몸을 씻은 결과 그 물 위에 기름진 큰 무늬(eyes)가 떠 있는 것을 직접 상상해 보라.
(중략)
... 나는 그들이 친절의 의미로 함께 목욕하자는 청을 받고는... 욕탕에는 우아하지 못한 세 사람의 여위고 늙은 여자들이... 내가 이들 늙은 세 도마뱀들고 같이 목욕을 하다니! 아니 안 돼. 난 싫어! 내가 황급히 문 쪽으로 달려나갔기 때문에 그들은 대단히 불쾌하여 나를 매우 불결하고 정중한 초대를 무시한 놈으로 여겼다. 다음날 아침 내가 평소와 마찬가지로 깨끗한 우물물로 냉수욕을 하자 그들은 나를 불쌍한 미치광이라고 욕했다. 이러한 일들은 상이한 국민들간의 관습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이 책을 읽는 사람의 재미를 위한 영역으로 남겨두고.... 책의 맨 마지막에 저자가 적어 둔 글을 보면, 영국 사람 특유의 풍자와 위트도 이 대목에서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전략)
... 결국은 미개인이든 문명인이든 간에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어떻게 만족시킬 것인가에 대해서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가난하고 선량한 조선 사람들은 특별한 취급을 받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비록 풍자적인 표현일지언정 '은둔의 왕국'또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다소 싯적인 표현으로 자신의 나라를 부른다. 고요함에 대한 갈망은 실로 이 나라의 오랜 꿈이다. 그러나 그 꿈이 한번도 실현되지 않았다. 은둔의 삶을 사는 동안 그들은 증오해 마지않는 불청객들에게 자주 괴롭힘을 당해 왔다.
... 가련한 조선! 정부의 무능은 개선될 것 같지 않았다. 이것은 조선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현실이었다. 평화를 애호하는 마음씨 고운 조선 사람들은 자신들이 외국의 약탈자들에게 침략당하고 가난해진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조선은 잠자고 있었고 누구의 입에도 회자되지 않았으며...
... 이제 조선은 신생국으로서의 대망을 이루기 위해 만인의 안녕을 추구하고 장차 닥쳐올 수많은 재앙과 절망을 예비해야 할 때이다.
가련한 조선이여! 슬픔의 날들이 오고 있다. 신비로움과 은둔 때문에 더욱 매력적인 조선이여. 그대의 애국적인 후세들이 그토록 열망해 온 평화를 다시는 볼 수 없을 만큼 많은 재앙이 닥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대 앞에 닥쳐올 모든 재난들이 그대를 개화하기 위한 시도보다 더 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끝)
이걸 보고 저는 '아, 이 사람은 정말로 조선이란 나라에서 같이 부대끼며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더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