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 한 방울의 물
한 방울의 물
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등의 수용소에 감금된 포로들에게 비밀리에 시행했다는 나치의 생체실험에 대한 기괴한 소문들을 당신도 하나쯤 접했을 것이다. 때로는 의학적인 목적으로 때로는 신비주의적 망상으로 이루어졌다는 실험에 대한 괴담들 중 몇몇은 이후 사실로 확인되어 모두를 경악케 만들기도 했다. 고교시절 사회과목을 가르치던 선생님은 그런 소문에 밝았다. 30대 초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반쯤 머리가 벗겨져 항상 스포츠로 짧게 머리를 깎고 다니던 그는 수업시간에 아이들 졸음을 쫓아내겠다는 명분으로 그런 지식들을 하나둘씩 늘어놓곤 했었다. 문제라면 우리 학교가 여학교였단 점이고 여고생들 중에 그런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는 아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는 거다. 나 역시 그 기괴한 이야기들 대부분을 잊어버렸지만 그 중 단 하나만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포로 중 하나를 밀실에 가둔다. 그리고 여러 날에 걸쳐 강압적인 취조와 고문 등을 통해 실험 대상의 심신을 쇠약하게 만들며 동시에 죽음에 대한 공포를 심는다. 너는 곧 죽게 될 거란 이야기를 흘리거나 오늘은 몇이나 처형되었는지에 대해 알려준다. 가짜 죄목을 그에게 씌우고 그 벌로 대상 역시 사형에 처하게 될 거라며 협박하기도 한다. 그 외엔 외부의 어떤 자극도 차단된다. 포로는 점차 옥죄어오는 위협에 극도의 공포를 느낀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로 그에게 구체적인 죽음의 이미지를 심어준다. 다른 이들이 처형당하는 사진이나 영상, 또는 실재 처형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때 보여 주는 이미지 대부분은 사형, 그 중에서도 참형에 관한 것들이다. 한마디로 사람의 목을 자르는 모습을 계속 보여줌으로서 그 자신도 언젠가 그렇게 되리란 공포에 시달리게 하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좀 의심스러운 것이 당시 나치의 처형 방식에 참형은 그리 인기가 좋진 않았다. 참형이라면 역시 일본군이다. 손발이 묶인 채 무릎을 꿇은 조센징, 기다란 대검이나 일본도를 사무라이처럼 치켜든 제복차림의 군인. 이미지가 나치보다 선명하다. 그래서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우슈비츠가 아니라 731부대에서 시행된 실험은 아닐까 의심도 했었다. 아무튼 이렇게 참형의 이미지가 각인된 실험대상은 어느 날 갑자기 처형이 결정됐다며 어디론가 끌려간다. 누군가의 목이 수없이 잘렸을 처형대는 기다란 널빤지에 몸을 고정시키는 장치가 달렸을 뿐이다. 포로는 눈이 가려진다. 그리고 처형대에 몸이 묶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만큼 나머지 감각들은 보다 예민해진다. 차가운 처형실의 공기, 사람들의 숨소리, 칼날을 가는 소리와 바닥에서 올라오는 비릿한 피냄새. 그 상태에서 그에게 다시금 참형에 대해 알려준다. 너는 이러이러한 이유로 오늘 사형을 당한다. 이제 곧 준비가 끝나면 날카로운 칼날이 너의 목을 자른다. 머리는 떨어져 나갈 것이고 속설에 의하면 잘린 머리는 얼마간 생존한다고 하니 어쩌면 목이 잘려나간 자신의 몸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며 겁을 준다. 그리고 실재와 똑같이 처형이 진행된다. 다만 한 가지만 다르다. 포로의 목을 치는 것은 진짜 칼이 아니라 스포이트에 담긴 차가운 물이다. 하지만 포로는 그 사실을 모른다. 목에 한 방울의 물이 떨어지는 순간 포로는 진짜로 자신의 목이 잘려나갔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믿음이 실재로 몸에 끼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한 이 실험에서 대상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고 한다. 몇몇은 움찔 놀라며 비명을 질렀지만 곧 자신의 목이 아직 붙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도한다. 다른 몇몇은 똑같이 비명을 지르다 실신하거나 아니면 죽음의 공포로 미쳐버린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소수의 실험체에게 벌어진 현상이었다. 목에 물이 떨어지는 순간 마음만이 아니라 몸마저도 목이 잘렸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인 사람들 말이다. 그 결과 이들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사인은 불분명하다 심장마비로 밝혀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죽어버렸다고 한다. 우리의 몸 어딘가에 있는 스위치가 내려지며 기능이 정지해 버리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알 길은 없다. 정말로 그런 실험이 전쟁의 광기 속에서 진행되었을 지도 모르고 그런 사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도중 와전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애초에 있지도 않은 사실을 어느 재담가가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야기의 실재 여부는 나에게 중요치 않았다. 오래전 들었던 사회 선생의 이야기를 떠올렸을 때 나는 그것이 충분히 그럴듯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나에겐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는 대상이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실이었다.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건 대학 졸업반이었을 때였다. 그 역시 졸업을 앞두고 있었지만 군대를 다녀왔기 때문에 나보다 2년 선배였다. 훨친한 키에 슬림한 몸매, 과하지 않으면서도 개성을 살릴 줄 아는 패션 센스와 끊이지 않고 대화를 이어가는 언변 그리고 유머. 거기에 키아누 리브스를 닮은 얼굴까지 더해진 그를 처음 본 순간 나는 완전히 반해버렸다. 어릴 적부터 꿈에 그리던 이상형이 그대로 현실화한 것 같았다. ‘김치헌’ 누구냐는 내 질문에 과 동기가 알려준 이름이었다. 그런 그가 먼저 나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을 때는 하루하루가 구름 위를 밟고 다니는 것만 같았다. 그 뒤에 시궁창이 숨어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나는 급격히 그의 매력에 빠져 들었다.
처음 얼마간은 너무나 행복했다. 우린 한시도 떨어질 줄 몰랐고 그는 나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라도 할 것처럼 굴었다. 하늘의 별을 따달라고 한다면 적어도 운석 정도는 구해다 줄 기세였다. 하지만 그건 잠시 뿐이었다. 얼마 못가 조금씩 그가 멀어진다는 것을 느꼈다. 연락이 되지 않고, 약속 장소에 늦거나 나타나지 않기 시작했다. 물론 언제나 거기엔 그럴듯한 핑계들이 따라 붙었다. 어머니가 아팠다. 면접이 있었다. 교수님을 만나고 있었다.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하지만 바보처럼 난 그 말들을 모두 믿었다. 그가 나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연애에 있어서 누구보다 능숙한 프로였고 나는 풋사랑에 몸이 달아있던 루키였으니까. 나중에야 그가 나 외에도 두 명의 여자와 동시에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 중 한명은 나의 절친 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애당초 그가 나에게 접근했던 것이 부유한 집안에 괜찮은 외모를 가진 여자애를 정복하고 주위에 과시하고 싶어서였다는 것도 후에야 다른 이들의 입을 통해 들었다. 그리고 그 무렵 나는 그에게 마음과 몸은 물론 학생으로선 상상도 못할 액수의 돈을 쏟아 부은 후였고 한 번의 임신중절 수술을 받은 후였다.
‘미안하다. 다 내 잘못이야. 너를 향한 내 마음의 유통기한이 이미 지나버렸거든.’
내가 좋아하던 영화의 명대사를 저질스럽게 인용한 말로 이별을 고하며 그는 나를 떠났다. 두 번째 임신 사실을 알리고 두 주 후의 일이었다.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그가 훌쩍 나가버린 카페에서 홀로 남은 나는 몇 시간이 멍하니 앉아 눈물만 흘렸다.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그의 친구들을 찾아 다녔지만 다들 그냥 포기하라며 나를 위로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얼굴에서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지겨움 같은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얼마 후 나는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우적우적 무식하게 씹어 삼킨 63알의 수면제는 나를 죽이진 못했지만 대신 뱃속의 태아를 죽였다. 보너스로 자궁도 가져갔다. 의사는 한심하다는 듯 나를 보며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거라고 그랬다. 씨발, 난생 처음으로 내뱉어본 욕설에 의사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고통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를 보는 가족들의 시선이 변해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빠는 나에게 유학을 알아보라고 했다. 엄마는 병신이 됐으니 이제 결혼은 다했다며 나를 붙잡고 엉엉 울기만 했다. 한 학기, 8학점만 이수하면 졸업이었지만 더 이상 학교에 나갈 수도 없었다. 휴학계를 냈지만 다시 캠퍼스로 돌아가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그 사이 그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엔 다른 년과 바다로 놀러가 찍은 사진들이 업데이트 되어 있었다. 개새끼, X만이, 씹할 놈. 다양한 욕을 제법 운율을 섞어 내뱉을 수 있게 됨과 동시에 그를 향한 나의 증오심은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그리고......
고교시절 사회선생이 들려준 나치의 생체실험을 떠올렸다.
처음엔 단순한 공상에 불과했다. 혼자 방구석에 틀어박힌 채 전남친의 싸이 홈피나 드나들며 히키코모리가 되어가던 나의 증오를 분출하기 위한 상상놀이. 내 머릿속에서 그의 모가지는 수 십 번이나 잘려 나갔다. 그의 아랫도리는 그보다 열배 정도는 더 많이 잘렸다. 그러는 사이 조금씩 계획이 구체화되어갔다. 어떻게 그를 불러낼 것인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계획을 진행해야 좋을지, 그리고 거기에 필요한 물건들은 어떻게 구할 것인지.
가장 큰 걸림돌은 내가 여자라는 점이었다. 그것도 해본 운동이라곤 요가나 필라테스가 전부인 말라깽이 여자. 그런 내가 70kg의 남자를 들어 옮길 수는 없었다. 누군가 계획에 동참해 나를 대신해서 힘을 쓸 사람이 필요했다. 그때 생각난 것이 경두였다. 이경두는 대학 새내기 시절부터 나를 쫓아다니던 동기였다. 그가 나를 짝사랑하는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작은 키에 빚다만 호떡을 연상시키는 그의 외모에 전혀 매력을 느낄 수 없었기에 친구로서의 관계만 유지해왔다. 내가 치헌에게 모질게 버림받고 자살까지 시도했다는 소문이 학교에 퍼지자 가장 먼저 연락이 온 것이 그였다. 전화를 받지 않자 이번엔 메일을 보냈다. 내가 걱정된다, 잘 지내느냐, 힘든 일 있으면 연락해라. 그 짧은 메일마저 생긴 것처럼 심심하고 매력 없는 남자였지만 그래도 나의 계획엔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밥이라도 먹자며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외출을 위한 준비를 했다.
“복수?”
처음 그 얘기를 꺼내자 경두는 멍한 얼굴로 나를 보며 되물었다.
“그래 복수, 내가 다 말해줬잖아. 그 자식한테 무슨 꼴을 당했는지. 나도 그대로 되갚아주고 싶단 말이야.”
내 말이 당황스러운지 시선을 둘 곳을 찾아 안절부절 못해 하며 그는 말했다.
“그냥 모두 잊고 새롭게 시작하면 안 될까. 사실 말이냐 나 너한테 하고 싶었던 얘기가......”
“복수라고 했지만 대단한 건 아니야. 그냥 짓궂은 장난이라고 생각하면 돼.”
“하지만......”
경두는 난처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우유부단한 성격에 남에게 잘 휘둘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4년 가까이 내 주위를 돌면서 제대로 된 고백 한번 못해본 위인이었다. 망설이며 선뜻 예스라고 하지 못했지만 내가 계속 부탁한다면 결국은 도와줄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결국 내가 편한 데로 그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치헌이 나에게 했던 것이나 다를 게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죄책감이나 망설임은 없었다. 옷을 더럽히지 않고서 쓰레기를 치울 수는 없는 법이다.
어렵사리 구한 새로운 전화번호로 치헌에게 연락을 했을 때 그는 놀라는 눈치였다. 당연하겠지, 완전히 떨쳐 냈다고 생각했던 애가 다시 엉기는 거려니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뻔뻔스럽게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자긴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듯, 거기엔 일부러 미안한 척 소심하게 행동한 나의 연기도 한몫 했을 것이다. 우리는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고 안부를 물었다. 그는 나에게 미안하다고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일방적 이별에 대한 사과였다. 그 외의 일들에 대해서 그는 아예 모르는 일처럼 행동했다. 심지어 나의 자살소동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도 없는 것처럼 깜짝 놀라는 척까지 해보였다.
“정말, 바보같이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나쁜 새끼, 바로 너 때문이야. 소리치고 싶은 걸 억지로 참으며 나는 미리 생각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다 내가 못난 탓이야, 오빠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다른 힘든 일이 있었어. 나중엔 그조차 나의 자살시도가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진심으로 믿는 눈치였다.
“그런데 왜 보자고 한 거야?”
“오빠 차에 귀걸이를 떨어뜨렸던 것 같아서. 그거 엄마가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건데 찾아보니까 없더라고. 그래서 생각해보니까 오빠 만날 때 한번 하고 나갔던 게 기억나서.”
뭐야 그런 거였어? 그는 완전히 긴장이 풀린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나에 대한 경계는 완전히 풀어졌고 내가 따라주는 대로 넙죽넙죽 술잔을 받아 넘겼다. 거기엔 미리 수면제를 섞어 놓았다. 자살할 때 집어 먹고 남은 것들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엄마는 약통을 베란다 구석에 처박아 두었었다. 차마 건들기가 무서워서 안 보이는 곳에 치웠다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쓸모를 찾았으니 이런 걸 아이러니라고 하는 모양이다.
얼마 안가 그는 완전히 곯아떨어졌다. 술과 수면제가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효과를 상승시킨 것 같았다. 나는 경두에게 연락을 했고 우리는 인사불성이 된 그를 밖으로 옮겼다. 주점들이 즐비한 대학가의 주말 밤이었다. 술에 떡이 되어 늘어진 남자는 널리고 널렸기에 아무도 우릴 주목하는 이는 없었다. 치헌을 차에 태우고 나와 경두는 미리 점찍어둔 장소로 향했다. 외진 곳에 위치한 창고 건물은 어느 식품회사 소유였는데 불경기에 회사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차압되어 현재는 폐쇄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
치헌이 약기운에서 깨어난 것은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지나서였다. 솔직히 나는 계획을 실행하기도 전에 약물부작용으로 그가 죽어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도 잠에서 깨어난 그는 말라붙은 입을 쩝쩝거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갈증으로 괴로워하는 그의 입에 500ml 생수병을 들이밀 때 까지도 그는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뭐야, 여긴 어디야?”
갈라진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오빠가 죽을 곳.”
바닥에 고정된 철제의자에 사지가 묶인 채 나를 보던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온몸이 찌릿 하는 쾌감을 느꼈고 계획을 실행에 옮기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나의 계획은 사회선생에게 들었던 나치의 실험을 치헌에게 그대로 실시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그를 납치, 감금해야 했다. 그리고 나치에게 잡힌 포로들처럼 그에게 죽음의 공포를 심어줘야 했다. 처음엔 그저 실연으로 미친 여자인척 했다. 나는 연애 시절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늘어놓고 하나하나 그의 눈앞에 보여주었다.
‘이건 우리가 처음 놀이공원에 갔을 때 찼던 자유이용권 팔찌야, 이건 오빠가 처음 나에게 선물한 책이고 그때 오빠는 갈색 티셔츠에 조끼를 입었던 거 기억나.’
나는 연애시절 기억들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내가 얼마나 그를 사랑했는지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를 보여줬다. 그는 내 얘기에 귀 기울일 생각은 없는지 자신을 당장 풀어 달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욕설과 저주를 퍼부으며 나에게 분노를 쏟아냈고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며 겁을 줬지만 나는 꿋꿋이 내 할 말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 연애를 모두 풀어 놓는 데 하루가 꼬박 걸렸다.
이틀째 그의 태도는 한결 누그러들었다. 그는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미안하다고 했다. 이래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며 나를 타이르려 했다. 그런 그의 앞에서 난 이번엔 태중의 아이를 두 번이나 버려야 했던, 그리고 결국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된 여자의 광기를 풀어 놓았다. 병원을 찾아가 낙태를 하는 과정들을 설명하며 얼마나 무서웠는지, 고통스러웠는지, 그리고 죄책감을 느꼈는지를 말해 주었다. 얘기는 자연스럽게 그와의 이별과 자살시도로 이어졌고 그로 인해 두 번째 아이를 잃고 병신이 된 과정으로 이어졌다. 그는 떨고 있었다. 내가 이러는 것이 단순한 장난이나 협박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분노에 차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다가 다음 순간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엉엉 울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엔 미친년마냥 헤헤 거리며 그에게 괴상한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건 더 이상 연기가 아니었다. 그동안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있던 감정의 앙금들을 모두 토해내고 있었다. 다시 하루가 지났을 때 그도 나도 모두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그를 남겨두고 내가 다시 건물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그는 바지를 입은 채 오줌을 싸지르며 엉엉 울고 있었다.
“살려줘, 제발 살려줘.”
그가 정말로 자신이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진심으로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3일째 주문제작한 처형 틀을 건물 안으로 들여 놓기 위해 다시 경두의 힘을 빌어야 했다. 사극에서 곤장을 맞을 때 죄인을 묶어두던 틀과 닮은 물건을 치헌은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이게 뭔지 궁금하지?”
나는 배시시 웃으며 치헌에게 물었다. 그때 경두가 미리 개시장에서 사온 커다란 도사견 한 마리를 안고 들어왔다. 사람용 수면제는 개에게도 효과가 있었다. 혀를 내빼물고 잠에 취한 녀석의 몸을 경두가 처형 틀에 고정시키는 사이, 나는 치헌의 시야가 닿는 한쪽에서 준비한 칼을 갈기 시작했다.
1m 길이에 일본도는 아빠의 소장품이었다. 사업 관계로 알고 지내는 지인에게 선물로 받았다는 물건은 일본의 명인이 만든 진품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검도를 해오던 아빠는 그 칼을 소장하기 위해 도검류소지허가증까지 일부러 발급받았을 만큼 맘에 들어 했다. 소중히 다뤄온 진품인 칼은 일부러 갈 필요가 없을 만큼 예리하게 날이 서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단지 극적 효과를 위해 숫돌에 대고 요란하니 헛손질만 해댔다.
“야, 너 그거 뭐야, 그걸로 대체 뭘 하려고 그러는 거야?”
벌벌 떨며 소리를 질러대는 치헌을 무시한 채 나는 경두에게 다가가 칼을 쥐어 주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의 입에서 풍기는 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소심한 그로선 제정신으로 연기를 해낼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도사견의 머리가 나무틀 끄트머리 밖으로 튀어나와 축 쳐져 있었다. 받침대로 개의 머리를 받쳐 목이 수평으로 펴지도록 했다. 경두는 그 옆에 서서 양손으로 칼을 부여잡고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잘 봐둬, 내가 앞으로 뭘 하려는 건지.”
내 말이 신호라도 되듯 칼을 쥔 경두의 팔이 위로 올라간다. 치헌이 창백한 얼굴로 거칠게 숨을 몰아쉰다. 경두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는다. 나는 가쁘게 요동치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숨을 멈춘다.
“이얍!”
우렁찬 기합과 함께 경두의 팔이 수직으로 떨어지자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칼날은 개의 목을 지나갔다. 미리 신문다발이나 무 같은 것으로 연습을 한 성과가 있었다. 곧이어 개의 갈라진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받침대가 휘청하더니 넘어지며 잘린 개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데구르르르, 바닥을 구르던 개의 대가리가 가서 멈춘 곳은 마침 치헌의 발치였다.
“으아, 으아아악! 으아악!”
의자에 묶인 채 발버둥을 치며 그가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건물 주변은 온통 언덕과 수풀 뿐, 그의 목소리를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 왜?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몰라서 묻는 거야?”
“설마 내가 널 차서 그런 거야?”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의 사고방식은 사랑의 방식만큼이나 수준이 낮았다. 이런 저질스런 인간과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던 내 자신이 싫어졌다.
“이건 살인에 대한 벌이야. 너 때문에 죽어야 했던 두 아이에 대한 벌.”
“미쳤구나, 그게 어째서 내 탓이야. 수술은 너도 동의했던 거잖아. 두 번째 유산은 오히려 너 때문에 벌어진 일이고. 죄를 물을 거면 내가 아니라 너여야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대드는 그의 이마와 목에 굵은 핏대가 선 것이 보인다.
“모든 게 당신이, 아이의 아빠가 제 역할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잖아.”
“헛소리 하지 마. 넌 그저 핑계를 찾고 싶은 거야. 스스로 망쳐버린 인생에 대학 책임을 떠넘길 사람이 필요한 거라고.”
빠직!
머릿속 어디에선가 물건이 빠개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이 망할 인간은 끝까지 자신의 죄를 반성하거나 뉘우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나는 다음 단계를 위해 다시 경두에게 고갯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가 기계처럼 빠른 속도로 치헌의 턱을 후려 갈겼다. 치헌의 고개가 힘없이 돌아가며 코와 턱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나는 목뼈가 부러진 건 아닌가 걱정이 됐다. 다행히 그의 목은 단단하게 머리를 고정하고 있었고 반쯤 뜬 눈은 충격으로 완전히 초점이 풀려 허공을 해매이고 있었다. 우리는 잽싸게 그를 묶고 있던 줄을 풀고 처형 틀로 옮겼다. 치헌이 펀치의 충격에서 빠져나올 즈음엔 처형 틀 위의 목이 잘린 도사견은 치워지고 그가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오빤 언제나 그랬어. 언제나 어른인 척, 뭐든지 다 아는 척, 자기만 믿고 따라오면 될 것처럼 굴었지. 주도권이 항상 오빠한테 있는 것처럼 행동했어. 나는 당연히 그런 줄 알고 쫄래쫄래 따라만 다녔고. 바보 같이. 하지만 지금은 달라. 여기서 모든 걸 조종하는 건 바로 나거든.”
정신이 돌아온 치헌은 자기가 어디에 엎드려 있는지 눈치 채곤 고개를 내저으며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의 팔다리는 밧줄로 단단하게 묶여 있었다. 목 역시 가죽 벨트로 처형 틀 끝에 고정되었다. 조금 전 도사견처럼 그의 머리는 틀 바깥으로 빼죽이 튀어나와 아래를 향해 구부정하니 휘어져 있었다. 나는 그의 이마에 받침대를 가져갔다.
“꺼져, 저리 꺼져!”
그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려 도리질을 쳤다. 밸크로 띠로 받침대를 그의 머리에 고정시키는 데에 다시 경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는 이제 어린애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이전에 한 번도 보지 못한 그의 모습에 나는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계획은 생각한 이상으로 착착 진행되어 갔고 이제 그 마지막 단계만을 남기고 있었다. 나는 안대로 그의 눈을 가리며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아까 개 봤죠, 금방 끝날 거야.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요. 그거 알아요, 목이 잘려도 사람 뇌가 얼마간은 활동을 한데요. 그러니까 일이 끝나자마자 내가 안대를 풀어줄게요. 오빠 몸이 보이게. 정말 그게 보이면 뭐든 좋으니 신호를 보내줄래요. 윙크를 하던지, 얼굴을 찡그리던지.”
“미안해, 으어어어.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제발 나 좀 살려줘.”
그의 애원을 무시한 채 안대 상태를 점검하고 나는 일어서서 뒤로 물러섰다. 경두가 다시 칼을 집어 든다. 그는 미리 계획한 대로 일부러 칼날을 바닥에 끌거나 허공에 휘두르며 치헌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했다. 눈이 가려져 한층 민감해진 청각은 모든 소리를 하나도 빠짐없이 받아들이고 있을 것이다. 나는 들키지 않게 조심스런 동작으로 미리 준비한 비커와 스포이트를 꺼냈다. 비커 안에는 얼음을 넣어 차갑게 식힌 냉수가 들어 있다. 스포이트로 물을 빨아올린다. 치헌의 옆에 선 경두가 부러 거칠게 소리 내어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나 역시 반대편으로 다가섰다. 실내에는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 낑낑대는 치헌의 울음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나는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외쳤다.
“잘라!”
경두의 칼날이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허공을 베었다. 동시에 나는 치헌의 목덜미에 한 방울의 물을 떨어뜨렸다.
처음 이 계획을 세우며 나는 그 마지막까지도 미리 생각을 해두었다. 꽤나 그럴듯하긴 했지만 사회선생의 나치 수용소 이야기는 분명 뻥카였다. 전원이 빠진 냉동고 안에서 동사한 선원 이야기나 최면에 걸려 평범한 막대를 불에 달군 쇳덩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그걸 만지고 화상을 입었다거나 하는 등의 일견 그럴듯하지만 사실 여부의 확인은 불가능한 믿거나 말거나 말이다. 때문에 계획의 끝도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놀란 치헌이 그대로 기절하거나 아니면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거나. 신체 건강한 남자가 고작 물 한 방울 때문에 정신이상이 되거나 돌연사 하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백번 양보해서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아우슈비츠에 비한다면야 우리의 간이 감옥은 천국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으아아!”
요란한 비명을 내지른 건 치헌이 아니라 경두였다.
나 역시 믿기지 않는 광경에 숨조차 내쉬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극한의 공포와 죽음의 위협에 대한 강한 믿음이 얼마나 위력적인 것인가.
그리고 한 방울의 물, 그를 죽이는 데에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데구르르르
바닥을 굴러와 내 발치에 멈추어선 것은 바로 물이 닿음과 동시에 몸에서 떨어져 나온 치헌의 머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