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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雲峴宮)의 봄.
01410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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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모처에다가 '종로의 가을, 운현궁의 봄'이라는 포토에세이를 게재했었는데, 갑자기 봄 날씨에 서울 시내에 산책 얘기가 나와서 문득 갖고 와봅니다.
그러다보니 글 속의 화자가 존재하는 시점이, 2005년 당시였다가 지금이었다가 하는 식으로 엉망진창으로 꼬이는데... 이 점에 대하여 읽는 분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
집 앞 영화관에서 <찰리와 초콜릿공장>을 조조상영으로 보고 돌아오니 어느덧 일요일도 느지막한 점심 때가 되었다. 전공책은 모두 학교 사물함에 집어넣어뒀고, 도서관에서 읽으려고 빌려온 책도 모두 반납해버렸다. 별로 할 일이 없이 노닥거리는 일요일 오정이다. 시간이 남아돌아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철푸덕 엎어졌다. 침대에 모로 누워 잠이나 자려 하니, 비몽사몽간에 공자가 꿈에 나타나서 갈(喝)한다.
"우(宇)야! 나는 일찌기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밤 새워 자지 않으며 진정으로 생각해 봤지만 별다른 성과를 못 얻었느니라! 그러하니 생각만 하는 것은 실제로 글을 읽고 배우느니만 못할진저, 어찌 이렇게 행동을 하지 않고 머릿속에서 삼라만상을 계획으로만 굴리려 한단 말이냐!"
갑자기 머리 꼭대기부터 얼음물 한 바께스를 뒤집어쓴 것 같은 뜨악함에, 벼락맞은 듯 일어나 주섬주섬 주위를 챙겨본다. 머리맡에 채지충 중국만화고전 논어편이 뒹굴거린다. 아, 이놈이었구나. 뒤적거리다 보니 논어 위령공편 15-30에 나와 있는 내용 그대로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꿈에 공자님이 나타나서 야단을 치다니.... 그야말로 이 무슨 문자 그대로 신의 계시같은 일인지.
어쨌든 꿈결에 공자님 말씀따라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집에서 노는 복학생 한 마리는 할 짓도 없다.
'학교에 가서 공부나 할까.'
- 하다가, 그야말로 복학생스러운 짓이라고 생각되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 잔 할까, 아니면 여럿이 뭉쳐 노래방이나 갈까.'
- 그러나 왠지 오늘따라 사람과 같이 부대끼는 것도 별로다 싶다. 아가씨는 사랑스럽지만 변덕스러움은 지친다. 친구 지인과 한잔하며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것도 유쾌한 일이다. 그러나 이 휴일의 흐느적함을 되도록이면 혼자서 조용히, '만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옛 사람의 탁탑마혜같은 끈 다 떨어진 운동화를 비끄러매고 질질 끌다 보니 버스 정류장이다. 을지로 가는 버스를 아무거나 잡아타고 종로 2가에서 내릴 때까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무 생각없이 대충 근처에서 요기를 했다. (아무 생각없이 들어간 데 치고는 그 가게가 '하동관'이었다는 게 지금 생각해보면 나름 골때리는 것이었지만...-_-;)
아아, 왜 종로로 갔는지 그 이유가 떠올랐다. 지방에서 올라온 나는 서울에 처음 올라온 지 벌써 햇수로 몇 해가 지나가고 있었지만, 이 도시가 지닌 얼굴이 어떤 것인지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전부터 한번 해 보고 싶었다. 서울이라는 '공간'은 어떠한 '시간'을 번화한 거리 뒤에 감추고 있는지... 그런 옛 흔적을 찾아서 도심으로 나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종로에 와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종로 2가를 거닐다 - 새로 개장한 청계천에는 어느덧 물이 흘러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게 서울의 새로운 명소가 되어 있었다.
예로부터, 종로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흩어진다고 하여 그 별명이 운종가(雲從街)였다고 전한다. - 그러니까, 청계천 따라 구름이 일어나서 그렇다는 도올 김용옥의 해석은 틀린 것이다. 운현궁이 있는 '운현'의 경우 그 해석이 맞지만.... 어쨌거나 청계천이 그 '운종가'라는 이름을 가져가기에는 여전히 종로통에 사람들이 많다. 사람, 사람, 사람들이 밤낮도 없이 미어터진다. 조선시대의 메인스트리트답다. 그리고 언제나 교통신호의 맨 앞에는 도시의 헤모글로빈처럼 오토바이 부대가 쏜살같이 지른다.
어쨌든 발걸음은 어느덧 청계천 다리를 건너 종로로, 또 탑골공원으로, 인사동으로 지나쳐간다.
문득 지나가면서 본 종로구의 심볼마크가 좀 귀엽다고 생각했다.
인사동길에 접어들자 관광 온 일본 아줌마들이 잠깐 사진을 부탁한다. "익스큐주 미... 테이크 픽챠! 프리즈!" 내가 메고 있는 은색 바디의 필름카메라를 보고서는 뭔가 전문적인 사진쟁이로 착각했나 보다. 좋게 봐주셔서 고맙지만 사실 전 그냥 일반인인데요. 난 몰라.(...) "아, 샤신오?" 하고 되물으니 "어라 일본어 할 줄 아세요?(라고 물어본 거 같다)" 하며 활짝 웃는다. 헉, 프리토킹 수준은 안되는데(....) 아 몰라. 빨리 찍어주고 도망가야지.
휴일을 맞은 인사동 놀이마당에서는 웬 아낙네가 창을 하고 사물이 그 뒤를 받쳐주며 농악패가 같이 놀고 있었다. 이밥에 된장국 말아먹는 한국 토종도, 피부 시뻘건 양인도, 중동에서 온 곱슬머리 코쟁이도, 일본말 쓰는 주근깨에 뻐드렁니 돋은 아지매들도, 가슴을 울리는 장단 앞에서는 국경 인종을 안 가리고 전부 같이 어깨를 들썩들썩한다.
나도 같이 에불려 놀다가, 발걸음을 인사동길 쪽 말고 샛길로 통해 낙원상가쪽으로 돌렸다.
낙원상가. 이전에는 이 쪽 방향으로는 가 본 적이 없었다.
돼지머리 삶는 냄새가 온데 등천을 한다.
이 골목에는 참 좋은 가격으로 돼지국밥을 파는 곳이 많았다. 이 날 이후로, 돈은 궁한데 뭔가 든든하게 먹고 싶은 날은 나도 모르게 이 곳을 찾게 된다. 냉면도 의외로 이북 지방 맛에 충실하고.... 일명 '38따라지'라는 실향민분이 하는 건지도 모른다. - 이것이 내가 지금의 단골집인 '유진식당'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이다.
터널같은 낙원상가를 빠져나오니 뭔가 분위기에 가을 냄새가 완연하게 묻어 있다.
안내도를 쳐다보니 교동초등학교, 운현궁, 천도교 본당 등이 자리를 하고 있다.
교동초등학교는 뭔가 해서 봤더니, 조선시대 말에 세워진 최초의 초등학교라는 비석이 있다.
그 옆에 고대광실 기와집 담이 있어 쳐다보았더니 그것이 바로 운현궁이다.
들어가려니 반가운 팻말이 있다. "지금 이후로 입장하시는 분은 무료로 관람 가능합니다."
주말에 무료개방인가 하여 갸웃하니 자원봉사 아주머니도 덧붙인다. "들어가요. 오늘은 프리(free)야." (왜 영어인가 했더니, 나중에 나오면서 보니까 외국인이 들어올 때 그녀는 "I'm volunteer guide for foreigners in this palace."라고 말하였다.)
솟을대문을 지나 안뜰에 이르면, '노안당(老安堂)'이 우선 찾아온 객(客)을 반긴다.
'노안당'은 이른바 대갓집 사랑채 구실을 하던 건물이다. 특이한 집모양새가 눈길을 끈다. 덕수궁을 제외하고, 운현궁이나 아니면 기타 중부쪽의 큰 종택들을 보면서 느낀 점이 한 가지 있다면 - 아랫동네 쪽과는 달리 집이 ㄱ자로 꺾여 있거나 ㅁ자로 붙어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지나가던 할아버지들이 한 마디 거든다. '이게 생긴 게 네모퉁이라 입구자 집이라 하는 거 아니여...'
소일하는 동네 할아버지들은 행랑채 툇마루가 숫제 자기 집 안방인 것 같다. 뭐 어떠랴, 안에만 안 들어간다면.
사람이 떠난 집은 쓸쓸하다고 늘 생각하기에 이런 광경은 정겨워 보이기까지 한다.
(*옛날에 이 글을 처음 쓸 때는 '가을이 되어 하늘이 높고 깊으니 단청도 없는 밋밋한 추녀가 그렇게 하늘에 녹아들 수가 없다.' 라고 했었다. 하지만 사진을 찍던 날은 장마. 끊어질 듯 아닐 듯 줄기차게 비가 내려서 조금은 속상했다. 정말 맑은 날에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살짝 고개를 든 추녀는 하늘에 날아갈 듯 서 있었는데..... 커다란 골프 우산 아래 카메라를 비로부터 가리고 촬영을 했다.)
날아갈 듯한 자태에 넋을 잃고 있는데 뒤에서 '나 학자요' 하고 온몸으로 외치는 듯한 모양새의 할아버지 한 분이 개량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사람을 부른다. 목에 걸고 있는 신분증에는 Hi Seoul 가이드라고 적혀 있었다. 어르신 함자를 보니 하정효라는 분이다.
집에 와서 뭐하는 양반인가 싶어 인터넷을 뒤졌다. 아! 이 분은 엄상익 변호사의 자서전에 나오던 바로 그 사람 아닌가. 그로부터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데도, 공직을 은퇴하고서도 아직도 주말마다 소일거리로 나와서 설명을 하신다니.... 대단한 분이다. 그 할아버지는 운현궁 공식 사이트에도 안 나올 정도로 방대한 분량의 지식을 줄줄 외고 있어 관람에 도움이 많이 됐다.
(* 사진찍으러 다시 찾아간 날에는 하 선생님은 그날따라 나오지 않으셨기에 사진이 없습니다.)
이제는 사람이 살지 않는 운현궁은 이처럼 각 칸마다 인형을 놓아두고 그 당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도록 했다. 사진은 관복을 차려입은 모습.
흥선 대원군의 둘째 아들이 도포를 갖춰 입은 모습. 그러니까 훗날 고종 되시겠다.
그런데 어째 관이 비뚤어졌소....;
흥선대원군이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 인데, 솔직히 보면서 어째 재현해놓은 인형 생김새가
당시 모 당 대선주자로 뛰던 누구씨랑 옆모습이 닮아 보여서 참 므엉했다.(.....) 단지 눈의 착각이려나.
어쨌든, 책상 너머 미닫이문 뒤로 보이는 바로 저 방에서 흥선대원군은 파란만장하고도 기나긴 생애를 마쳤다 한다. 근현대사의 질곡과 풍파를 온 몸으로 겪은 세월을 간직한 채....
그는 과연 노안당(老安堂)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편안히 영면하였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모양새로 보아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인 것 같다.
침상이 있는 방과 그 앞 툇마루에서 앉아 반대편을 본 것.
흥선대원군은 더운 여름철에 이 침상에 누워 있거나, 저 뒤로 보이는 마루방에 앉아 여닫이문을 모조리 접어서 올려 매달고는 시원하게 앉아서 글을 읽거나 오수를 즐겼으리라.
노안당 뒤로 돌아가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하는 문을 지나가면 노락당(老樂堂)이 기다리고 있다.
노락당은 흥선대원군이 '아들네미 잘 둔 덕에 왕의 애비에미로 두 영감할멈이 잘 먹고 잘 산다'며 붙여놓은 휘호라고 한다.
현판이 추사 김정희의 글씨라고 하는데.... 추사가 언제 시대 사람이었는지 갑자기 헷갈린다. 분명 다산 정약용의 말년 제자였으니 18세기말~19세기 초반 사람인데.... 설마 추사가 남긴 글씨를 탁본해서 짜깁기해다 붙인 걸까? (나중에 찾아보니까, 역시나 추사 선생이 작고하신 것은 1856년의 일이고, 고종이 즉위한 것은 1863년의 일이었다.)
사진에서 처마의 중첩구조를 보아 알 수 있듯 노락당은 운현궁 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고, 또한 운현궁의 모든 가람배치에서 가장 중심에 있다. 원래 고종의 잠저(潛邸)이던 시절의 운현궁은 노안당과 지금의 덕성여대 쪽이었다고는 하긴 하는데.... 여튼, 운현궁 낙성식에 참여했던 고종은 대제학 김병학(金炳學)에게 기념할 글을 지으라고 명을 내렸고, 이에 김병학이 지어 올린 것이 '노락당기(老樂堂記)'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아무리 대제학이라도 어느 안전이라고... '님굼께셔 니르시는데' 안 할 겐가 싶은 게 그 당시로서의 상식이겠지만, 그러한 어명과는 또 다르게 김병학 자신도 진실로 이 으리으리한 집채에 입이 떡 벌어졌던 모양이다. 과장을 좀 섞어서 '그 집(노락당)이 굉장히 높아 하늘이 한 자 다섯 치밖에 떨어져있지 않다(之景堂皇 翼翼去 天五我)' 라고 표기한 것을 보면 말이다. '백발 3천 장'이라는 표현이 있듯 원래 한문학이 좀 과장이 심힌 게 사실이다. (3천 장이면 9천 미터니 높이로 치면 에베레스트보다 더 높다.) 그런데 하늘 꼭대기에 집 지붕을 빗대다니, 김병학이 어지간히 감탄한 모양이지 싶다.
그가 현대 종로의 고층빌딩이나 63빌딩, 도곡동 타워팰리스(현재 우리나라 최고층 빌딩은 63빌딩이 아니라 이 곳이다.)같은 마천루들을 보면 무슨 표현을 어떻게 할까 싶은 대목이다. (웃음)
그러고보니 MBC 드라마 '궁'에서, 주인공들 가례식을 촬영한 것도 운현궁이었다.
(한 눈에 아, 운현궁이구나 하고 알아볼 수 있었다. 어쨌든 윤은혜는 귀여웠어... ㅎㅎ)
관람객들은 신기한 듯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본다.
부대부인을 모시는 상궁
부대부인, 즉 흥선대원군의 마누라이자 운현궁의 안주인.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마누라'라는 호칭은 조선시대에는 극존칭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저게 무려 하녀 복장이란다. 상궁도 아니고, 하녀랩니다. 휴, 되게 화려하네...;
들여다보면 ㅡ
이런 조선백자 도자기도 있고....
절구통에 떡메... 참 오랫만에 본다. ㅎㅎ
옛날에 살던 집에서는 나무절구가 아니라 돌절구를 썼었지만.
이렇게 가지런히 개어 올린 이불은 또 어떤가. 옛날 촌에서 살 때, 우리집이 딱 저랬다.
장롱 위에 착착 개어올린 두꺼운 요와 솜이불, 그리고 너무나 둥그런 메밀베게까지.
난 아직도 메밀베게를 쓴다. (*저 때보다 나이를 더 먹고 보니 이젠 목침도 편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말로 슬그머니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댓돌이었다. 경남 쪽에서는 이걸 '출담'이라고 그러는데... (아마 툭 튀어나온 담이란 뜻이지 싶다) 다른 지방에도 이런 말 쓰는지 모르겠다. ('달걀'은 서울 가면 '닭알'이고, 천안 가면 '겨란'이고, 이게 마산에 오면 '게랄'이 되었다가, 물 건너 제주로 가면 '독새기'가 된다. 신기한 사투리의 세계)
어쨌든, 노락당을 나와서 돌아가면 이로당(二老堂)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그런데 ㅡ
대문을 열고 문지방을 건너가기 전, 시선을 올려다보면 잠시 어떤 위화감에 멈칫하게 된다.
이제부터는 흥선대원군이 세도를 떨치던 시기가 아니라 - 다소 비운의 역사가 이 공간 속에 묻어나오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보이는 언덕 위의 양관(洋館)은, 경술국치로 국권이 박탈당하고 일본에 병합당한 이후인 1912년 세워진 건물이다.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의 자택으로 건립되었다 하나, 실제로는 일본 궁내청 산하의 왕실 관리조직인 '이왕직'쪽의 관리가 들락거렸다고 한다. 즉 일제 당국이 운현궁을 내려다보며 감시하기 딱 좋은 위치에 올라앉아 있으면서, 운현의 지맥 또한 틀어막고 있는 형상인 것이다.
일제의 벚꽃 문양이 지붕 위에 선연하다. 당시에 열심히 설명해주시던 하정효 선생더러 나는 '혹시 조선왕실의 오얏꽃[李花] 문양은 아닙니까'라고 조심스레 여쭈어 보았으나, 그것은 아니고 일본왕실의 벚꽃 문양이 맞다고 확인해주셨다. 벚꽃이 오얏꽃을 내려다보는 형태인 것이다.
(*주: 이 글이 처음 게재된 이후 이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댓글 제보가 많았다. 제대로 찾아보니 과연, '사쿠라몬'이 아니라 전주 이씨 가문의 오얏꽃 문양이 맞았습니다, 라는 것. 생각해보니 일본 왕실은 국장인 벚꽃이 아니라 왕가의 국화 문장을 사용한다. 일본왕실의 문장이 아닌 조선의 문장이 올려져 있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1917년 이준이 타계하자 이 건물을 포함한 운현궁 전체는 의친왕의 둘째아들 '이우'공(公)에게 그 권리가 승계되었다. 이우 공(公)은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해 그 일화가 이래저래 비운의 왕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흥선대원군 이하응 외에 운현궁의 또 다른 주인이었던 적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우 공에 대하여는 크게 두 가지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하나는 일제 군부에 근무하면서도 중국에서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을 지원하며 '태항산 유격대'라는 것을 조직하였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전남지역의 군용도로공사와 관련하여 도민들의 청원을 관철시켰던 사건이다.
토지를 강제수용당한 자작농들은 일제 당국에 보상문제로 항의를 하였으나 무시당하자 이공에게 청원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공이 용산에 있던 조선군(*조선에 주둔한 일본 육군의 부대명칭. 당시 만주에는 원래 일본 간토지방에 있던 관동군이 만주에 주재하고 있었고, 조선에는 용산 등지에 조선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30만 명 정도의 정예병력이었다. 일본 입장에서는 유사시에 대륙쪽으로 뻗칠 수 있는 정예병력이었던 셈이다.)의 중앙사령부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런데 담당자인 일본 군관은 상당히 고압적인 태도로 거들먹거리며 '조선인들에게 뭐하러...' 라는 식으로 문제를 무시하려 했었다고 한다. 이 때 화가 머리끝까지 난 이 공은 '그럼 너희 일본인들 법도대로 따지면 나는 덴노의 친척뻘이 되었고, 작위도 공작이니 당장 네놈의 머리통을 날려도 상관없겠군' 이라고 권총을 꺼내 들었고, 할 말이 없어진 군관은 도로공사에 청원을 낸 백성들에게 보상을 처리해 줬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런 단편적인 일화들은 사실인지 아닌지 역사가들에게 확인을 해 봐야 알겠지만, 이우 공의 부친인 의친왕이 생전에 그러하였듯, 그리고 남아있는 사료들을 보아도 이공 또한 항일의 의기로 가득한 사람임은 확실해 보인다.
최근에는 일제 당시의 사회 상류층이 전부 친일파라고 생각하는 도시전설이 횡행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사람들 또한 많았다. 독립운동 자금을 대다 망해간 수많은 양반 종가들(예컨대 백산상회나 경주 최씨 문중, 김성일 종택 등)이 그 증거이다. 이공 또한 그러한 역사적, 사회적 소명으로 참 일본에게 까칠하게 저항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근세사를 전공한 박사과정 선배는 이 이야기를 내게 해 주며 이 점을 강조했다. 이공은 일본왕실에 편입된 조선왕가의 왕자로서 일본군부에 들어갔으나 파견된 중국 현지에서도 독립운동을 돕거나, 위의 일화처럼 조선주재 일본군인 '조선군'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독립운동과 조선 백성을 힘 닿는 데까지 도왔다는 것이다. 이 때 그의 논리가 참 명쾌했다. '내 백성은 내가 지킬테니 일본인은 내 백성에게 손대지 마라.' 아마 위의 이야기는 그런 역사적 사실에서 바탕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이공을 모시던 어느 일본인 시종의 매일같이 계속된 메모와 일기에서 사료로서 드러나고 있다.
이에 일본은 이공이 육군대학을 졸업하자 중국 타이위안으로 발령시키지만 거기서도 태항산 유격대를 조직하는 등 사사건건 일본에 반기를 드는 모습을 보인다. (단, 태항산 유격대의 실증에 대해서는 더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당시 공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몇 가지 증거는 있다고 한다.) 결국 일본 군부는 전쟁 말기에 이공을 직위해제시키고 교직참모로 대체발령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공은 일본 본토로의 소환에 즉시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항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 조선에 남아있던 이 공의 발령지는 하필이면 쿠레 군항, 곧 지금의 히로시마였다.
그리고 히로시마로 첫 출근하던 날은 1945년 8월 6일 - 이공은 원자폭탄에 피폭되어 그만 다음날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일본인들은 이 때 방사능 피폭의 무서움을 모르고 12시간만에 산요센[山陽線] 간선 기찻길을 복구하였다고 하며, 이공의 사인은 폭열로 인한 중상이었다. 공의 시중을 들던 일본인 집사는 간발의 차로 목숨을 건졌다. 운현궁에서의 세간을 정리하고 이 공의 가족과 함께 며칠 늦게 도착한 탓이다. 그러나 그는 '내가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탓에 훌륭한 분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본토에 들어오기 싫어하셨는데, 내가 하루만 더 늑장을 부렸더라도...' 라며 자결의 길을 택했다. 일본인다운 짓이라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의 기록을 보면 그는 운현궁의 주인에게 인간적으로 매우 감화되어 있었던 것 같다' 라고 선배는 얘기했다. 사실 이 사람의 기록이 아니었다면 이공에 대한 이야기는 잊혀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광복이 오고.... 이후, 운현궁은 이우 공의 아들(즉, 의친왕의 손자)인 이청 씨가 물려받아 개인 사저로서 그 명맥을 이어오다 1993년 관리상의 이유로 서울시에 양도, 보수공사를 거쳐 지금은 시민에게 개방하고 있다.
노락당 뒤켠은 그런 역사의 질곡이 느껴지는 것 같아, 조금은 쓸쓸한 정취가 느껴지기도 한다.
이제는 그러한 때로부터도 세월이 많이 흘러 한 세기가 또 지나고, 운현궁은
여기 사진에 나온 것처럼 신혼부부가 단란하게 잠깐 데이트를 즐기다 가거나,
보험설계사 아주머니들의 야외 비즈니스 상담장이 되거나,
혹은 어르신들의 쉼터로 훌륭히 기능하며 ㅡ 사람들의 삶 사이에서, 운현궁은 오늘도 살아숨쉬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시민의 하나로서 옛날 대갓집을 내 집처럼 들락날락하며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고.....
한편, 운현궁에서 가장 사진 포인트로 각광받는 곳은 바로 이 이로당(二老堂)이다.
사진 동호회 등에 올라오는 운현궁 사진을 보면 잘 나온 것은 거의 다 이쪽에서 찍은 듯하다.
이로당이라는 이름이 유래는 다음과 같다. 노락당이라는 휘호처럼, 둘째아들이 임금이 된 덕택에 졸지에 흥선대원군 부처는 노년에 팔자 풀리긴 했지만서도.... 고종이 운현궁에 문안을 드리러 오면 정작 집주인인 흥선대원군 부처는 예법에 따라 옆방으로 쫓겨나야 했다. 제 자식이 임금이긴 해도, 어쨌든 자신은 문무백관 중 제일일지언정, 임금 앞에서는 어디까지나 '신하'였으니까.
그래서 맨날 옮겨다니느니 '에라 한채 더 짓자' 해서 지은 게 이로당(二老堂)이라 했다. 늙은이 둘(대원군과 부대부인)이 기거한다는 뜻에서다.
이로당 앞의 돌우물.
이 문을 통하면 후원으로 갈 수 있다.
사진 속에 나온 아가씨들은 '애걔, 아무 것도 없네.' 하고 그냥 돌아갔지만, 사실 이 후원도 알고 보면 풍수에 관련된 이야깃거리가 많다.
사실 하정효 선생님의 그날 강의 중, 가장 인상깊은 것이 이 운현궁과 서울을 둘러싼 풍수에 관한 이야기였다.
첫째로는 운현이라는 것이 말 그대로 구름이 가끔 얹히는 구릉지대라고 해서 나온 말이라는 이야기. 지명에서 보듯 북악의 지세가 경복궁을 타고 내려 이 곳까지 뻗는데, 이것이 옛날에 휘문 등 고등학교들이 들어서면서 지맥이 끊기고 또 그 자리에 현대그룹 사옥이 들어오면서 지하 5층까지 파내려가는 바람에 수맥까지 끊겨 버렸다 했다. 그래서 이로당 뒷뜰의 질 좋은 우물이 말라 버렸다는 것이다.
원래 운현궁은 1만 평이 넘는 방대한 부지였다고 했고, 그 범위는 옆의 교동초등학교와 삼환기업, 창덕궁 앞 일본문화원까지 전부 아우르는 규모였다. 그 중에서도 제일가는 명당은 지금의 운현궁이 아닌, 담 옆의 개인 소유 저택이라고 한다. (바이올리니스트 누구누구나 박찬주 여사 - 이우 공의 마누라 - 등을 배출한 집안이라는데, 그럼 박영효의 집안인가? 어쨌든 명당이라고 해서 죽어도 안 팔겠다고 한단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와 그렇게 암투를 벌였던 이유가, 운현궁의 동쪽 축선이 정남인데 비해 지맥은 약간 동남으로 삐딱하게 가고, 이게 말인즉슨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기어오르는 격이라 한다. 대원군의 경우는 남연군 묘도 그렇고 전부 자기가 직접 지관이 되어 터를 보았다. 따라서 (대원군의 경우는 자기가 자기 것을 보는 것이므로) 지관이 의뢰자에게 터를 보아주기 전에, '이 땅은 이 사람에게 어울리는 곳인가의 여부'가 자동적으로 생략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겠느냐, 라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사진에서 보면 백운대에서 북악으로 구불구불 내려오는 용맥이 확연하게 보인다. 이 북악의 지맥에 관하여는 (운현궁에 얽힌 얘기와는) 약간 궤를 벗어나지만 또 다른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무속인 차길진씨 - 그는 故 차일석 총경의 아들이다 - 의 말에 따르면 현재 경복궁과 청와대는 북악산의 살기 밑으로 그대로 파고들어 있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당시의 기사를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북한산의 세력권인 북악산 앞마당의 경복궁과 청와대는 터가 몹시 불길하다. 피비린내가 끊이지 않는다. 1398년 태조 7년 방원의 난이 서곡이다. 방원은 경복궁에서 정도전을 참살했다. “정도전이 태조(太祖)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속여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뒤 살해하려 했다”는 핑계였다. 이어 세자 방석(芳碩)을 귀양 중 죽이고 방번(芳蕃)마저 없앤 뒤에야 태종 이방원은 비로소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연산군(燕山君) 때 경복궁은 유흥과 탐욕의 놀이터로 전락했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뒤 방치돼 있다가 고종(高宗) 즉위 후 대원군(大院君)의 주도로 대대적인 중건 공사가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국고가 바닥나고 숱한 인명이 희생되니 원성이 높아졌고 결국 대원군 퇴진의 주요 사유가 됐다.
청와대는 경복궁 내전이 있던 자리에 지어졌다. 일제강점기의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1926년 현재의 청와대 자리에 조선총독 관저를 세웠다. 6년 뒤 일본 총리대신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할 때까지는 청와대 터의 저주(詛呪)를 알지 못했다. 일본의 젊은 장교들이 사이토의 목을 잘라 살해한 ‘2·26 사건’이 터진 것은 사이토가 청와대 터에 관저를 올린 지 꼭 10년째 되는 해였다. 이후 일제시대 조선총독들의 최후는 예외없이 비참했다. 미나미 지로는 2차대전 전범재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가 1954년 병보석됐으나 다음해 사망했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1급 전범 구이소 구니아키는 복역 중 옥사했다.
청와대를 버린 이들은 모두 자기 명대로 살았다. 이승만(李承晩), 윤보선(尹潽善), 그리고 와병 중인 최규하 전 대통령들이 그 보기다. 단,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만큼은 영기(靈氣)를 통해야 진실을 알 수 있다. 양아들 이강석(李康石)과 그의 생부모인 이기붕(李起鵬) 부통령, 박마리아 여사의 죽음은 청와대 터의 살기(殺氣) 때문이다. 이기붕의 할아버지는 조선 말 명성황후와 대원군 간의 권력투쟁에 개입했다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입었다. 그 조부가 대를 건너뛰어 이기붕으로 환생, 또 다시 옛 궁전 터에서 만인지상일인지하(萬人之上一人之下)의 권력을 누리다 역시 전생에서처럼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타의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나긴 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이 망명지인 하와이에서나마 천수를 다한 것의 배후에는 북한산의 보살핌이 있다. 모친이 북한산 문수암(현 문수사)에서 100일 기도 끝에 잉태한 귀한 자손이 그였던 만큼 북한산이 끝까지 ‘뒤’를 봐준 것이다. 대통령 시절 그가 문수암을 수차례 찾아 예를 갖춘 점도 북한산의 배려를 끌어내는 데 일조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암살 당했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수감됐으며,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은 아들을 감옥에 보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들도 같은 꼴을 당했다. 청와대에서 살아남으려면 매사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투명하고 당당한 처신이 필요하다.
조선의 왕은 노란 곤룡포(袞龍袍)를 입지 못했다. 오행상 동쪽은 파랑, 남쪽은 빨강, 서쪽은 하양, 북쪽은 검정, 가운데는 노랑이다. 천지의 가운데인 중국(中國)에만 허용된 컬러가 노랑이었다. 중국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동방이다. 따라서 파랑이 제색이다. 또 기와색이 파랗다고 청와대다. 무지의 소치인 동시에 사대(事大)와 모화(慕華)의 잔영이라 할 만하다.
청와대의 현 주인인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노랑을 좋아해 그나마 다행이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마지막 날인 11월 19일, 부산 동백섬 누리마루에서 참가국 우두머리들이 두루마기 차림으로 포즈를 취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두루마기 색깔로 노랑을 택했다. 넥타이까지 노란 걸로 맸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파랑,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는 잿빛을 골랐다. 2년 전에도 노 대통령은 노랑이었다. 당시 태국 APEC에서 누런 빛이 도는 태국 전통 옷을 입었다.
노 대통령의 상징 컬러와도 같은 게 노랑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일었던 ‘황색 돌풍’의 주역이 바로 노무현 후보였다. 옷 색깔은 곧 그 사람의 현재 심리와 처한 상황을 대변한다. 황색은 사계절과 권력욕 등을 뜻한다. 아울러 노랑은 흙을 의미하므로 나무, 물, 돌 등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다. 수용할 것은 수용해야 옳다."
ㅡ 당연한 얘기지만 믿을 사람은 믿고, 말 사람은 말고. 어쨌든 믿거나 말거나지만, 재미삼아 인용해 본다.
어느덧 반 시간이 넘어가는 강의는 운현궁의 풍수에서 서울의 풍수와 음양학의 이치로 스케일을 넓힌다. 우주의 음양오행은 각각 음(陰)과 양(陽)으로 나뉘고, 또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라는 5대 요소가 된다. 옛날에 운현궁에서 하정효 선생께 들은 것과 내가 공부한 것들을 토대로, 간단히 필설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음과 양 중에서 센 것은 의외로 '음'이라 한다. 양은 불이고, 남성이며, 하늘에 있는 해이다. 음은 물이고, 여성이며, 물이 흘러들어가는 바다이다. 여기서, '물'은 '불'을 이기므로 (아무리 센 불이라도 물을 넘지 못하는 이치) 당연히 음은 양을 덮어버리는 속성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부부의 연을 맺고 가시버시를 나타내는 '청실홍실'이라는 표현에서, 흔히 알려진 것과는 반대로 홍실이 남자고 청실이 여자가 된다 한다. 태극에서도 빨강이 위에 있는 이치라 했다. 이게 현대에 잘못 알려진 것은 서양에서 화장실 픽토그램을 처음 만들 때 언놈이 색깔을 거꾸로 칠해 놔서라고, 하정효 할아버지는 이야기했다. (.....)
그리고 오행의 이치는, 다음과 같이 서로 대응되는 관계라고 한다.
인(人) - 의(義) - 예(禮) - 지(智) - 신(信)
동(東) - 서(西) - 남(南) - 북(北) - 중(中)
청(靑) - 백(白) - 적(赤) - 흑(黑) - 황(黃)
계절은, 봄 - 가을 - 여름 - 겨울 - 늦여름.
"운동회 때 '홍백전'을 하는 일본과 달리, 우리가 '청백전'을 하는 이유는 바로 동쪽이 청이고 서쪽이 백이니까, 서로 갈려서 시합하는 방위가 서로 저 모양이라서 그렇다"며 운을 뗀 후, 할아버지는 음양오행과 서울의 사대문과 풍수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동대문 - 동쪽은 '인(仁)'에 대응된다. 그런데 청계천이 흘러나가는 방향이 동쪽이므로 당연히 서울은 동쪽이 우묵하게 낮다. 그래서 이 낮음을 보충하기 위한 방편이 '인'을 '높인다(흥하게 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한 것이다. 현판 또한 정방형으로 써서 '토대'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갈짓자(之)는 뫼산자(山)의 형상이기 때문에 이중 삼중으로 토대를 높인 것이라나?
서대문 - 서쪽은 '의(義)'에 해당되므로 이를 돈독히 한다는 뜻에서 [돈의문(敦義門)]인데, 원래 서대문은 독립문 넘어가는 쪽의 언덕배기에 있었다 한다. 이게 음양의 이치에 안 맞다고 해서 태종 때 옮겼다가 (나중에 찾아보니 '서전문'이라고 했다) 세종 때에야 비로소 강북삼성병원 앞의 서대문 자리로 옮겼다는데, 여기에서 '새문안'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확실히 버스 타고 지나가다 보면 정동 경희궁 앞에 '새문안교회'라고 오래된 교회가 하나 있었다.)
남대문 - 역시 오행설에 따라 '예(禮)'를 숭상한다 하여 [숭례문(崇禮門)]이다. 현판을 좁다랗고 높게 쓴 이유는, 관악산의 불기운을 좀 잠재워보기 위해서라고.... 옆쪽으로 누워 쓰면 불기운이 넘실넘실 도성 안으로 넘어온대나. 현판은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한다. (그런데 저렇게 세로로 쓰고 경복궁 앞에는 물의 동물인 해태까지 끌어다 놔도 조선시대 궁궐은 참 화재가 많았다. 심지어 운현궁의 고종황제 생가 건물도 1960년대에 홀라당 불타 버렸댄다. - 그리고 2010년 지금 시점에서는, 그 숭례문마저도 몽땅 타버렸다.)
북문 - 흔히 북문으로 알려져 있는 [숙정문(肅靖門; 현 동소문)]은 음양오행과는 관련없는 이름이라 한다. 말인즉슨, 개국 초창기에 북악의 기가 워낙에 세어 삼선교(돈암동)쪽의 여인네들이 바람이 그렇게 많이 났다는데, 그래서 문 이름을 숙정(肅靖)이라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가뭄이 들면 양기가 너무 세다 하여, 숙정문을 열어 음기를 세게 하고, 양의 방향인 남대문을 닫아걸었다고 한다.
이후에 북한산성을 개축하면서 서울의 문루가 음양오행에 안 맞다 하여, 북문의 역할을 하는 다른 쪽 문에 겸사겸사 붙인 이름이 바로 지금의 [홍지문(弘智門)]이라고 한다. 당연한 애기지만 '지(智)'를 널리 편다는 뜻이다.
나는 물었다.
"그럼 '신(信)'은 어딥니까."
하 선생이 빙긋이 웃는다.
"보신각(普信閣), 못 들어봤어요?"
듣자하니 그럴듯하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종루이기 때문에, '신(信)'을 보완(普)한다고 하는 이름이라고 한다. 솔직히 나는 그 이전까지 보신각의 의미 - 어떤 연유에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던 것인지, 관심도 없었다. 아니, 어째서 거기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 나머지는 운현궁 공식 홈페이지나 아니면 검색해보면 다 나오는 얘기니까 이쯤에서 줄여 본다.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자니 어느덧 경내를 다 돌아 나왔다.
나는 "가르침 고맙습니다"하고 공손히 인사한 후, 운현궁을 나섰다.
ㅡ ' 깊푸른 색의 가을 하늘이, 계절이 깊어감을 알리는 저녁으로 바뀌어갔다.' 라고 이전 글을 끝맺었다. 그리고 수 년만에 다시 찾은 운현궁은 그 세월 그대로를 간직한 채 그대로 거기 있었다.
이로당 툇마루에서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피하며, 혼자 나는 생각에 잠겼다. 아까 지나가던 할배들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가며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선생 영감' 어디 갔어?"
"몰러, 오늘은 안 나왔나벼."
아직도 하정효 선생님은 소일거리로 공짜 강의를 계속하시나 보다.
세월이 조금 흘렀지만 아직 이 곳의 시간은 그자리, 이 공간 속에 멈추어 서서 그대로 나를 맞이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리고, 나는 그 당시의 나와 지금의 나를 새삼 돌아보며 비교해본다.
나는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느꼈으며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버렸는가. 그러한 날들이 흘러가는 동안 나는 그쯤에서 지금쯤까지 어떤 궤적을 그리며 걸어온 걸까. 그리고 더 세월이 흘러간 이후 나는 또 그 곳에서 지금의 나를 돌아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렌즈 속에 담긴 풍경은 그대로 박제되어 고이 간직되겠지만, 누군가의 광고 카피와는 달리 기록은 기억을 지배하지는 못할 것이다. 단지 기억을 되살려 줄 뿐.
집으로 돌아가는 길, MP3 플레이어에서는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 가 성시경의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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