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릴 적 부터 제 동경의 대상이었던 이종사촌언니가 결혼합니다.
경복궁 앞에서 예쁜 카드를 사서 쓰다가,
어린 시절 일들이 하나 둘 생각나 어쩐지 마음이 쓸쓸해졌어요.
이런 축하할 일에, 당사자도 아니고 친자매도 아닌 제가 왜 심경이 미묘한지 모르겠네요.
2.
아주 어릴 적, 이모가 살아계실때 우리는 작은 아파트 옆 동에 살았습니다.
사촌언니와 사촌동생 자매, 저와 제 동생, 저와 같은 나이의 친구 한명이 늘 함께였죠.
제 동생은 혼자만 남자였는데, 저희에게 물들어서 머리에 핀 꽂고 같이 놀았었지요.
사촌언니는 참 예쁩니다.
한 때 언니가 방황하던 시절엔 집안에서 연예인 준비를 시키려고도 했었죠.
큰 이모가 그렇게 미인이어서, 상사병으로 죽은 고향 청년도 있다는데
이모를 빼다 박았다고 하더군요.
초등학교때부터 얼굴이 변하질 않아서 나이가 들수록 동안이 되는 타입이예요.
긴 파마머리에 원피스를 입고 웃고 있던 언니의 사진을
언제 보았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열두살, 열세살 쯤이었을 언니는
새까만 눈매에 굵게 컬이 진 긴 머리를 어깨 뒤로 넘기고 있어요.
어린 아이 답지 않은 갸름한 뺨에 장난스럽게 웃는 입매가
촌스러운 원피스와 작은 몸집 아니었으면 열여덟 열아홉이래도 믿었을거예요.
여동생만 득시글한 꼬마그룹에서 제 남동생이 탐났던 언니는
어른들에게 속아 종종 바구니를 들고 시장에 나가
'동생 삽니다'라고 돌아다니곤 해서 어른들을 웃겼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도, '말괄량이 길들이기'도, '우동 한그릇'도
모두 언니 책꽂이에서 몰래 뽑아 읽었어요.
발에 맞지도 않는 언니 신발을 슬리퍼처럼 끌고 나가 더럽게 만들어놓아도
한 번도 화내지 않던 착한 언니예요.
언니가 다니던 중학교가 우리집 바로 앞에 있었는데
엄마와 저, 동생은 늘 중학생들 등하교 시간이면
하던 일을 멈추고 베란다에 서서 학생들 사이에서 언니를 찾았어요.
아무리 많은 사람들 틈에 있어도, 모두가 똑같은 옷을 입고 있어도
언니는 항상 반짝 하고 빛이 났기 때문에 찾기 쉬웠어요.
부르거나 인사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언니 모습을 보기만 해도
우리는 뭔가 '오늘도 언니를 봤어'라고 만족하며 하던 일을 마저 했고요.
가끔은 우리집에 들러서 컴퓨터도 가르쳐 주고 했는데
아, 중학생은 키보드도 소리나지 않게 치는구나, 멋있다-고 생각했죠.
박꽃같이 예쁜 언니도 그 시기엔 호르몬이 왕성한지라 이마에 작은 여드름이 났는데
사촌 동생이 '우리 언니 이마에는 여드름이 밤하늘에 별같이 많아요'라고 해서
한참 웃던 기억이 나요.
예쁜데다 애교도 많고 착하다 보니 내노라하는 남자사람들이 많이 구애를 했는데
눈길 한번 안 주던 언니가 결혼을 하네요.
상대방은 학벌도 집안도 돈도 구애하던 남자들보다 출중하지 않지만, 언니는 행복하다고 합니다.
엄마는 '그 좋다는 자리 다 싫다하더니, 지 편한데 가려고 그랬는가보다'하시죠.
아마도 좋은 남자분일거예요. 상처 많은 언니를 잘 보듬어주는 것 같아요.
3.
언니와 함께 주인공이 초등학생, 중학생이던 순정만화를 보다가 제가 했던 말.
'언니는 안됐다, 여기 주인공이 이렇게 멋있는데 다 동생들이라니!'
(그 때 저는 남자가 여자보다 나이가 많아야 사귈수 있다고 믿었던 순진한 초딩)
어린 시절 외갓집에서 나란히 잘 때 언니가 제 귀에 속삭였던 말.
'어른들은 전부 거짓말쟁이야. 하나도 믿으면 안돼'라고.
그 쌕쌕거리는 귀여운 숨소리와 어두운 가운데 미세하게 희어 보이던 솜털같은 것
이제 우리에겐 없는 걸까요.
아마도 큰 이모가 돌아가셨을때 썼을 엄마의 일기에는
'알토란같은 딸 둘이나 놔두고 맘 편히 갈 수나 있었겠나'하는 글이 있었습니다.
한참 지난 언젠가의 일기엔
'00이가 나에게 말했다. 이모는 좋겠다, 엄마가 있어서-하고'적혀 있었어요.
그 뒤 또 어느날의 일기에는
'00이가 나에게, 엄마가 있어서 좋겠다고 했는데, 이제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이 말한다'
고 써 있었습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였을 거예요.
아마도 딸들과 딸들과 딸들은
이렇게 계속 살아가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듭니다.
4.
언니 결혼선물로 뭘할까 하다가, 그림 액자를 하려고 해요.
아무래도 결혼선물, 하고 인터넷 아트샵에서 고른 그림인데 둘 중 하나를 못고르겠어요.
무난한가요? 르누아르 La Promenade
이건 앵그르의 샘.
혹시 다른 좋은 그림이 떠오르시는 분들은 추천해주시면 감사할게요.
이상하게 예민해져서, 엄마와 아기가 있는 행복한 그림, 이라고 해도
알 수 없는 미래의 일이 마음쓰일 정도로 어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