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동시성 내부의 비동시성'으로 파악합니다. 겉으로만 보면 한국 사회는 첨단을 걷지요. IT는 세계 최고를 달리고 대표적인 캐시카우인 제조업 5개 분야의 강국입니다. 동대문의 유행은 일본을 따라잡은지 오래이고 문화 파급 효과는 이란의 90%가 대장금을 보게 만듭니다. 겉으로만 보면 한국 사회는 세계의 발전 속도를 추동하거나 선도하는 몇 안되는 국가 중에 하나이죠.
하지만 내부를 보면 다릅니다. 1945년 건국이후 한국 사회는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3~400년동안 진행해온 중세 해체 과정- 근대 성립과정- 현대 수립 과정을 단 60년만에 해치웠습니다. 따라서 진통이 없을리가 없습니다. 우리 내부의 전근대적 요소. 이를테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유교적 문화나. - 유교 문화를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라 중세의 대표적인 이념이 유교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노동 강도에 대한 전근대적인 인식. 물질 만능 주의등을 들 수 있겠지요. 한국 사회는 가장 첨단을 걷는 현대적 외형에 중세, 근대, 현대가 모두 짬뽕된 잡탕을 섞어놓은 것과 진배없습니다. 내부를 바라보면 한국 사회는 아직 선진국의 의식수준을 따라잡지 못했지요. 비동시성입니다. 유시민은 이를 가장 정확하고 간결한 단어로 표현해 냈지요. '후불제 민주주의'
2. 한국 사회의 이러한 '비동시적 요소'를 가장 잘 알아볼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정치입니다. 왜냐고요. 정치는 개개인의 욕망. 이상. 이념, 현실을 가장 잘 농축시켜서 표현해주기 때문입니다. 유시민이 말한 '후불제 민주주의'를 제가 주장하는 '동시성 내부의 비동시성'의 가장 적확한 표현으로 여기는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 지탄하는 정치의 후진성에 대해 저는 별다른 이견이 없습니다. 그 사회를 가장 잘 나타내는 표현이 바로 정치다. 라는 주장에도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 정치의 후진성. 이를테면 지역주의나 인물론, 풀뿌리 민주주의의 허약함 등은 모두 다 한국 사회의 비동시적 요소에 의한 결과입니다. 노무현과 그의 지지자들이 실험했던 '열린우리당'에 대해 제가 비판적 노선을 걷는 것도 이 때문이고요. 그들은 한국사회를 너무 긍정적으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3. 따라서 저는 현대 한국 정치를 동시적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비동시적으로 바라보지요. 역사를 바라보는 제 눈은 현대 한국 정치를 비동시시기의 어떤 지점으로 데려다 놓게 합니다. 인간의 역사란 반복되는 행위이기에 비슷한 부분이 존재하기때문에 비교는 적당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면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 내부의 비동시적 요소를 관찰하는 저는 우리 정치 역시 현대의 다른 국가가 가지고 있는 정치와 똑같이 여기면 안된다고 봅니다.
제가 바라보는 현대 한국 정치의 비교점은 19세기 후반 20세기 초에 걸친 영국입니다. 물론 같지는 않습니다. 당시의 보수당과 현재의 여당은 동일하지 않고, 당시의 자유당과 현재의 제1야당이 이념적으로 같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지적하고 싶은 건 이런겁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당'이 탄생하고 있었습니다. 독일의 사민당이나 러시아의 공산당과 다른 '정당'이 말이죠.
4. 영국의 노동당은 탄생시점 부터 의회민주주의를 내세웠습니다. 비스마르크의 박해에 의해 오랜시간동안 낮은 보복을 걸어야 했고. 이후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등 수정론자들의 등장으로 내분을 겪어야 했던 독일 사민당이나 애시당초 부터 혁명의 길로 내달렸던 러시아 공산당과는 영국 노동당의 출발지점은 애시당초 달랐지요. 그들은 당시 '진보'로 여겨지고 있던 자유당에서 뛰쳐나왔습니다. 자유당만으로는 영국 노동자들의 현실을 바로 잡을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지요.
5. 그리고 기나긴 세월동안 영국 노동당은 그야말로 박박기어 원내 제 1당의 지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 기간동안 가장 큰 영국 노동당의 적은 어디었을까요. 체질적으로 노동당과 불가분의 관계인 영국 보수당이었을까요. 정답은 자유당입니다. 이 당시 자유당원이었던 케인즈가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가슴은 노동당이지만 머리는 자유당을 지지하고 있다.' 케인즈의 예언 아닌 예언 처럼 자유당은 노동당의 진전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산업화 과정에서 급속도로 늘어나는 블루컬러들은 노동당에게 계속해서 표를 던져주었고. 노동당은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자유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이들이 처음 권력을 잡았던 때는 1929년인데 바로 자유당과의 연립에 의한 결과였지요.
6. 한국 사회도 저는 19C 후반의 영국과 비슷하다고 봅니다. 어설픈 비교입니다만 현재의 여당을 보수당으로 비유하고, 현재의 야당을 자유당에 비교해 보지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막 탄생한 노동당이겠지요. 그들이 의회민주주의를 통한 사회개혁을 천명하고 있기에 비교는 적당할 듯 싶습니다. 하지만 19C 후반의 영국과 다른 점이 하나 있지요. 당시 영국은 제2차 산업혁명으로 나아가는 시기였고 제조업의 강력한 성장으로 인해 급속한 블루컬러 노동자들의 진입이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자연히 노동권에 대한 강한 메리트가 존재했고. 이는 공장별 노동자들의 단합으로 이어졌죠. 보통선거권이 주어진 이후 이들이 노동당으로 쏠리게 됨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한국은 다르지요. 아직도 강고하게 유지되는 지역주의와 더불어 블루컬러 노동자들은 급속히 쇠락하고 있습니다. 계급별, 계층별 투표는 요원하며 레드 컴플렉스는 이 모두의 한계보다 더 높은 사슬을 둘러 치고 있지요. 영국의 상황보다 우리가 더 힘들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7. 하지만 민주주의의 발전은 근본적으로 다당제입니다. 다양한 정책과 다양한 의견 대립이 일어나고 이것은 제도의 보완속에서 국민이 선택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발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선택지가 좁아질수록 민주주의는 발전하지 못하지요. 그런의미에서 영국에서 노동당의 의회진입은 민주주의 발전이라고 칭해야 합니다. 그런의미에서 자유당의 몰락은. 더 나아가 자유당 지지세력의 분화. 이를테면 보수당과의 연정이라던지, 노동당과의 연정이라든지 같은 상황은 민주주의의 확실한 진전이라고 봐야합니다. 선택지가 2곳에서 3곳으로 늘어나니까요. 이것은 자유당의 몰락이라기 보다는 자유당의 발전적 해체라고 봐야 겠지요.
8. 계속해서 말하지만 한국사회는 강고한 레드콤플렉스의 사슬속에 놓여진 19c 후반~ 20세기 초반의 영국과 비슷합니다. 한국 국민이 현재의 여당을 보수로. 현재의 야당을 진보로 보는 이유는 당연합니다. 그리고 민노당이나 진보신당 지지자들이 현재의 야당에 대해 보수라고 말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현재 국민들의 눈은 19c 후반 영국 국민들의 눈이고, 지금 민노당과 진보신당 지지자들의 눈은 '21c 한국'의 눈이니까요. 국민을 비하하자는 것이 아니라 원래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니까요. 유시민이 말한 '후불제 민주주의'가 눈앞에 펼쳐진것이겠지요.
9. 자연히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진보신당이 이번에 6.2 지방선거에서 완주선언을 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봅니다. 저는 자유주의자이지만 진보신당의 완주에 대해 오히려 지지를 보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심상정 후보의 사퇴는 아쉬운 일입니다. 아무런 수식어와 아무런 논리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지상 최고의 명제에는 무력합니다. 이번 선거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든지 간에 국민은 다양한 선택지가 놓여야 하고, 그 선택을 통해 국민도, 나라도, 민주주의도 발전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심상정 후보의 사퇴는 분명히 말하건데 한국 민주주의가 아직 비동시성에 동시성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동시성 내부의 비동시성. 후불제 민주주의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사민주의의 독자성이 옳은 시대를 살면서도 자유주의와 사민주의를 모두 '진보'라 부르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이 책임은 누가 져야 하고 진보의 분리는 누가 해야 하는 것일까요.
10. 그런 의미에서 유시민 후보의 역할이 중요해집니다. 저는 앞에서 한국 사회에 대해 후불제 민주주의라는 표현이 적당하다고 했습니다. 이를 주창한 사람은 바로 유시민 후보지요. 현재의 상황이. 즉 자유주의가 진보로 통칭되는 현 상황에 대해 유시민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본인이 가장 잘 알것이라고 봅니다. 본인 스스로가 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현 상황에서 유시민은 심상정이 후퇴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싸워야 할 것입니다. 즉 본인이 보수로 불리는 날을 위해 싸워야 겠지요. 저는 그것이 옳다고 봅니다. 역사의 발전단계는 언제나 그렇게 거쳐왔습니다. 그래야 자유주의와 사민주의는 분리될 수 있을 것입니다.
11. 심상정의 후퇴에 대해 유시민이, 더 나아가 민주당을 비롯한 이 땅위의 자유주의자들은 책임져야 합니다. 저 역시 자유주의자이기 때문에 책임질 것입니다. 분명히 말해 이는 민주주의의 작동에서 옳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후불제 민주주의인 이 나라에서 후불을 하기 위한 가장 큰 노력은 자유주의자들의 몫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그들은 사민주의에게 자신들의 역할을 맡기고 서서히 퇴장해 가겠지요. 저는 이것이 옳다고 봅니다. 사민주의가 지금 당장 급하다 하여 도입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하다 하여 대세를 만들어서도 안됩니다. 그렇지만 자유주의자들이 그런 이유로 사민주의자들에게 무조건 적인 복종을 강요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사민주의자들에게 공간을 주어야 하고. 자유주의자들이 진보에서 퇴장할 공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지금 이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비동시성에서 동시성을 회복하는 더 나아가 후불을 청산해 이 땅위의 민주주의를 정상적으로 작동할 최소한의 원리입니다. 자유주의자들은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사민주의자들에게 구걸하는 것은 제발 이번이 마지막여야 합니다. 그래야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발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