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도는 날씨만 더운게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학교 운동장에서 이상한 대피 훈련이라는 것도 받고 했지만 저는 친구들에게 절대 전쟁 안 일어날거라고 큰소리치고 다녔습니다. 뭘 알았겠습니까... 실제로 그때가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었음은 나중에야 알았습니다(저랑 과가 다른 한 선배는 우리나라가 월드컵에서 독일과 붙던 날 전지협 파업 건으로 집회에 나갔다가 연행되었다고 하더군요. 독일한테 2-3으로 지자 전경들이 너 땜에 졌다면서 마구 때렸답니다. ㅡ.ㅡ;;;; 1994년의 다른 풍경 한토막입니다). 하지만 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자세한 내막은 몰랐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건 사실 우리나라가 배제된 북한과 미국의 게임이었으니까요(그때의 상황을 묘사한 단행본이 있습니다. 자세한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군요. 한번 찾아 보겠습니다).
밑에서 진중권씨 글을 퍼오고 달린 리플을 한참이 지나서야 읽게 됩니다. 드디어 현실론이 등장하게 되는군요. 북핵 문제와 관련된 미국의 압력...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만날 때마다 같이 수다를 떠는 후배는 1차 파병은 북핵 문제와 관련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더군요. 흔쾌히 동의할 수 없는 저는 고개를 젓습니다.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에도, 이라크에도 부대를 보냈지만 과연 북핵 문제에 얼마만큼의 진전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파병 때문인지 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한민족의 장래는 우리나라가 미국의 비위를 얼마나 잘 맞추느냐에 달려 있겠군요. 그렇다면 한민족의 장래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들은 한나라당에 버티고 있는 친미주의자들이겠고, 민족주의를 표방하다 현실론으로 발을 빼버린 노무현 정권은 기껏해야 친미주의자들의 아류에 지나지 않겠죠.
그러나 친미주의자들이 한반도 문제를 좌우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북한-우리나라-미국에 있어서 우리는 항상 소외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한국-남한은 한반도 문제에 있어 제 3자라는 거죠. 우리나라가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는 미국의 대북정책에서 그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나라가 미국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미국이 주한미군을 철수시킬 거라고 보수언론은 우려했지만 정작 우리나라가 미국을 거스르지 않아도 자기네들의 사정이 있으니 빼고 맙니다.
한반도 문제 뿐만 아니라 한미관계에 있어서도 한국의 입장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말이 좋아서 동맹국이지. 우리나라에 미군이 존재하는 것이 한미관계와 안보에 있어 필연적이라고 사람들은 강변합니다만 미국이 정작 자국 군대를 철수시키는데 한국 정부는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합니다. 미국측 인사가 SOFA는 원래 그러라고(우리나라의 법으로부터 미군을 보호하기 위해) 있는 것이라 말해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파병하지 않으면 미국이 영변을 폭격할까요? 누구라도 지금에 와서 미국이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이라크 문제는 미국 정부에 심대한 부담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파병을 철회한다고 생각했을 때.. 압력이 있기는 있겠죠. 그러나 그것 때문에 북한 문제와 관련해서 미국의 심대한 입장 변화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게 그런 식으로 압력을 넣는 것은 그쪽에서 써먹을 수 있는 카드 가운데 하나일 뿐, 속내는 이미 다 계산된 대로 나가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가 파병하지 않으면, 미국이 우리나라에 무역보복이라도 할까요? 하지만 그러면 미국은 아주 멀쩡할까요? 스페인은 미국 앞에서 당당히 파병하지 않겠다고 해버리지만, 그것 때문에 나라가 뒤집히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물론 실제적인 이익을 고려해서 이라크에 파병하는 나라들도 있죠. 하지만 제가 보기에 우리나라가 미국에 파병하는 것은 그런 이익보다는 다분히 50년간 학습해온 두려움에 지나지 않습니다. 국제관계가 이익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말대로, 미국이 우리나라가 파병하지 않았을 때 압력을 가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우리나라와 미국이 서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일이라면 그와 관계없이 서로 협력을 하겠죠. 당연한 거 아닌가요?
이라크 파병 문제를 가지고 수업시간에 토론을 한 것이 벌써 1년 전입니다. 그때도 대체로 국익론-명분론이었죠. 저는 파병이 국익에 도움이 안된다는 논리로 구도를 깨려고 노력하는 쪽이었죠. 그때 저는 희생자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이 들어맞은 것은 정말 유감스럽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이라크에 파병해서 얻을 수 있다고 하던 경제적 이익은 어디 있나요? 벌써부터 '중동 특수에 찬물을 끼얹는' 이런 기사가 나오고 이라크에 그나마 있던 얼마 안되는 사람들마저 모두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아주 먼 훗날을 기약해야 얻을 수 있는 이익이었던가요?
미국이 우리나라에 지난 50년간 심어준 두려움은 큽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을까요? 우리가 미국과 맞서 다른 목소리를 냈을 때 얼마만큼의 보복이 돌아올지, 정확히 우리는 알고 있을까요? 그저 막연히 안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미국에게 협력했을 때는? 지금까지 이번 이라크 파병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한 무고한 대한민국 인민의 주검 뿐입니다. 이 결과를 가지고 우리는 미국을 거스르지 않았다고 안도하며 좋아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가 파병하지 않았을 때 미국이 당장 보복이라도 가할 거라는 주장은 미신입니다. 지난 50년간 학습되어온 강력한 미신. 그리고 이런 미신과 결부된 여러 가지 모순된 현실들, 이걸 깨자고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 정부를 찍은 거 아닙니까? 이걸 못하면 노무현과 이회창은 사실 큰 차이가 없습니다. 지금의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반대를 하든 안하든, 결과가 똑같다면 여기서 무슨 본질적인 차이점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이번 김선일 씨 사건과 관련해서 진중권씨가 쓴 다른 글이 씨네 21에 실릴 예정입니다. 거기서 그가 지목한, 만두를 먹으면서 한 사람 납치되었다고 파병 철회할 수 있느냐, 는 말을 한 여당 의원은 다름아닌 유시민 의원입니다. 그가 그런 말을 한게 사실인지 아닌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사표 발언때부터 마음에 안들었던 사람인데, 그가 더 미워지지 않도록 빌고 싶은 심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