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한 전쟁이라....

  • 궁상마녀
  •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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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해오는 한니발의 허를 찌르기 위해 본국 카르타고를 습격한 스키피오의 전쟁은 정당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당하다'라는 답이 나오네요. 최소한 더럽고 치사하고 부당한 전쟁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아요.

프랑스 혁명 당시, 몰려드는 유럽연합군에 맞서 싸운 나폴레옹의 전쟁은 정당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이 사람의 정복전쟁에 대해선 모르겠어요. 역사책에는 그의 정복활동이 프랑스 혁명의 자유, 평등 사상을 전파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식으로 써져있었지만 그건 현대를 사는 우리의 말이지 그때 당시 그 전쟁을 몸으로 겪어본 사람의 말이 아니죠. 정말 한 200년쯤 뒤에는 십자군 침략이 십자군 원정으로 둔갑한 것처럼 지금 이 전쟁도 해방전쟁으로 둔갑해있을 지 몰라요. 그 누가 알겠어요?

진중권씨는 빈 라덴의 테러에 대한 응징을 명분으로 한 아프카니스탄 침략을 정당하다고 했었죠. 하지만 전 빈 라덴이 테러를 하기 전에 미국이 그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 지 아무것도 몰라요. 미디어의 맹점이죠.  클린턴이 자기 회고록에서 분명 정확한 지점을 노려서 4개의 미사일을 발사했는 데 그 중 3개가 오작동으로 민간인 거주 구역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미사일 공격이든 뭐든 전쟁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쓴 것을 보고 소름이 끼쳤어요. 그걸 생각해내는 데 미사일 3대와 이유도 모른 채 살해당한 민간인들의 목숨값이나 필요했을 까요?

만약 그 거주 구역에 가족을 두고 있었던 사람이 테러를 일으키면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 건가요? 빈 라덴의 테러를 응징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 정당하다면 지금 또 다시 누군가가 이라크의 해방을 내세워서 록펠러 센터에다 비행기를 들이박아도 정당한 거겠군요.

크림슨 타이드에서 부함장이 했던 말이 생각나요. 현대전에서 우리의 가장 무서운 적은 핵 그 자체라고. 문득 반지의 제왕의 한 장면도 생각나네요. 프로도가 갈라드리엘에게 당신이 원하신다면 반지를 드리겠다고 말하자, 갈라드리엘이 웃으면서 말했어요. '이 갈라드리엘이 드디어 그 적수를 만났군요!' 설마 갈라드리엘이 그 점잖지만 힘하나 없는 작은 호빗을 '적수'라고 부르진 않았을 거예요.

한때나마 있었을 지도 모를 그 '정당한 전쟁'이라는 것이 더이상 우리곁에 머물러주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는 결국 우리가 '절대반지'를 선택해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전 과학기술이나 문명을 거부하는 골수 자연주의자는 아니예요. 하지만 우리의 의식은 선사시대 이후로 딱히 나아진 것이 없는 데 몸만 비대해져서는 '살해'한다는 의식도 없이 수천만명의 사람을 '몰살'시킬 수 있는 힘을 가져버리게 됐어요. 자신의 힘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 지 알지 못하는 거인처럼 조금만 발을 잘못 딛여도 마을이 사라지고 손을 살짝 휘두르기만 해도 도시가 무너져요.

인간이란 아무리 틀렸다는 것을 깨달아도 되돌아가지 못하는 동물이죠. 판도라의 상자는 한번 열고 나면 다시 닫아봤자 소용없어요. 희망이 남아있었든 말든 빠져나간 것들이 다시 돌아와주진 않죠, 결코.

이제 우리 인류에게 가장 위협적인 적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이군요.

어느 분이셨던 가요, 이 게시판에서 본 글 같은 데. 공룡이 멸망하기 전과 같은 쇠락의 징조를 느낀다고.
우리의 가장 큰 적이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 우리에게 주어진 힘에 어울리는 미덕을 갖추지 못한 채 계속 정체해있다간 그 징조는 현실이 될 거예요.

별로 충실한 인생은 아니었지만 (그런 걸 운운하기엔 지나치게 짧기도 짧았지만 ^^;;) 살아있는 나날들은 행복하고 좋았어요. 아직 하고 싶은 일도 너무 많아요. 이십년 남짓한 세월동안 누린 고통보다는 즐거움이 훨씬 컸으니 앞으로 얼마나 많은 즐거움이 남아있을 지 가끔은 두려움만큼이나 설레임으로 가슴이 두근거릴 때도 있죠.  


.......그렇다고 해도 어차피 현실로 화할 수 밖에 없는 징조라면 조금이라도 빨리 다가와줬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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