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이는 옷’ 단속 속좁은 정부
[한겨레 2004-06-14 18:47]
[한겨레] 최근 미국에서는 허리춤이 골반 아래까지 내려와 팬티가 보이는 바지를 입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법안이 제출돼 한바탕 논란이 벌어졌다.
데릭 셰퍼드 하원의원(민주당)은 지난달 루이지애나주 의회에 “의도적으로 속옷을 노출하거나 체모나 엉덩이, 성기 등이 보이는” 옷을 입는 것을 범죄로 규정해 3일 동안 공공봉사와 175달러(약 2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자는 법안을 제출했다. 이는 최근 미국의 젊은이들이 허리 사이즈가 실제 자신의 허리보다 큰 바지를 흘러내리듯이 입음으로써 팬티와 엉덩이 등이 드러나게 하는 풍조에 대한 대응법안이다. 한국에서도 연예인과 패션모델 등을 중심으로 유행하고 있는 패션이기도 하다.
미국 일부주 처벌법 시도
자유침해·품위유지 논란
국가의 개입수위 논란
미국 안팎에 보도된 이 법안은 지난달 말 의회 표결에서 반대표가 우세해 통과되지 못했으나, 득표차가 15표(찬성 39, 반대 54)밖에 나지 않는 등 찬반이 팽팽하게 맞섰다. 법안을 추진했던 셰퍼드 의원은 이런 옷차림이 죄수들의 옷차림을 흉내낸 것이라며 “어느 사회에서나 품위를 지켜야 할 선을 그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반면,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은 이 법안이 ‘패션 경찰’(개인의 패션을 단속하는 경찰)을 만들어내며, “표현의 자유라는 시민의 기본적 권리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고 반발했다.
겉으로는 ‘표현의 자유’와 ‘품위 유지’ 논리가 다투고 있으나, 속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국가가 개인의 복장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가’라는 사회철학적 논제가 사실상의 쟁점이다. 이런 가운데, 법안이 통과하지 못한 이유는 이 복장이 문제가 있긴 하지만 정부가 법적으로 강제할 수 없다는 중도 보수적인 입장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이 논란은 한바탕 가십거리로 끝나고 말았지만, 미국에서는 여성의 가슴 노출 또는 가슴이 비치는 의상을 금지하는 법안에 대해서는 20년째 지역별로 소송이 제기되는 등 오랫동안 성차별과 개인의 신체에 대한 국가의 과도한 개입 등의 화두를 둘러싸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여성 가슴노출 금지 싸고도 20년째 지역별 소송 잇따라
지난해 말 미국 플로리다주 브레버드 카운티 여성 주민 10명은 여성의 가슴 노출을 금지하는 브레바드 카운티 조례와 플로리다 주법이 헌법에 위배된다며 연방법원에 제소했다. 이들 10명의 원고들은 14살짜리 소녀부터 주부·공무원·시민단체활동가, 74살의 할머니까지 다양한 출신 배경으로 구성됐으며, 숲에서 윗옷을 벗고 일광욕을 즐기거나 자신의 정원에서 잔디를 깎거나 또는 32도의 무더운 날씨 때문에 상의를 벗었다가 구속된 경험이 있는 사람들도 포함돼 있다.
플로리다 주법은 남성과 달리 여성의 가슴 노출에 대해서는 수유를 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구속과 벌금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플로리다주 67개 카운티 중 55개는 이 주법을 그대로 조례로 활용하고 있다. 물론 남성은 윗옷을 벗고 거리를 활보해도 문제되지 않는다.
원고들은 소장에서 이런 규정이 △남녀 평등권에 위배되며 △남성의 눈요깃거리로서의 여성 스트립쇼는 허용하면서 활동성과 무더위 대처 등 여성 자신의 편의를 위한 노출을 금지시키는 것은 모순이며 △여성 가슴을 은밀한 부위이자 성적 대상으로 만들어 성폭력 범죄를 불러일으키며 △평소 여성 가슴을 범죄시함으로써 합법적인 수유 여성의 가슴 노출도 수치스럽게 만들고 △특정한 활동 때 불편함과 무더운 날씨를 감수하게 만들어 장기적인 여성 건강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지적했다.
이런 법규정이 애초 제정된 이유는 남성과 달리 여성의 가슴은 ‘성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해 여성의 가슴 노출을 일종의 ‘성기노출’이자 ‘음란행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소송과 움직임은 약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6년 워싱턴 항소법원에 한 여성이 소송을 제기해, ‘누드 법안’이 남녀를 불문하고 성기(음부)를 제외한 신체의 어떤 부분에도 적용돼서는 안 된다는 판결을 얻어냈다. 92년 뉴욕 대법원은 “편견과 검증되지 않은 전형성에 근거한 ‘공공감정’은 정부 정책의 중요한 잣대가 아니다”라며 여성의 가슴 노출을 합법이라고 판결했다. 이때 승소를 이끌어낸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의 증손녀는 현재 플로리다주 소송 원고로 참여하고 있다.
여성 가슴 노출이 합법적이었던 메인주에서는 98년 이를 금지하려는 법안이 제출됐으나 표결에서 졌다. 캐나다에서는 96년 온타리오 지역에서 가슴 노출 금지법안에 딴죽을 걸어 승소하자 다른 지역에서도 같은 소송이 봇물 터지듯 이어졌다.
강김아리 기자 ari@hani.co.kr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