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인질 3인에게 바치는 글 '인생상담'

  • cliche
  •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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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경로...까지는 아니라도, 어디에선가 찾아서 저장해두었던 텍스트입니다. 맛보기용이라고나 할까요. 절판된 책이니 만큼 조금 나눠도 괜찮겠죠?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


한국어판 서문

필자의 작품 중에서는 단편 몇 편과 장편의 일부가 영어와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한 권의 장편이 외국어로 번역되는 것은 처음이다. 그것이, 복잡한 인연으로 이어져 있는 이웃나라의 언어, 한국어라는 것에 필자는 크나큰 기쁨을 느끼고 있다.
이 작품은 미시마 유키오의 이름을 딴 상을 받았다. 미시마 유키오는 가장 ‘일본적’으로 간주되었던 작가 중의 한 명이며, 그가 했던 정치적 퍼포먼스 때문에 ‘천황제’, ‘군국주의’ 등과 연결되어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미시마 유키오가 상징하고 있었던 것, 또는 대표하고 있었던 것이나 지키려고 했던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미시마 유키오의 이름을 머리에 단 상을 받은 것은, 언어에 대한 애착이라는 점에 있어 진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이 작품에서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의 한 시대의 정신풍경을 그려 보려고 했다. 그 때문에 ‘야구’라고 하는 도구를 필요로 한 것이다. 그 때문인지, 많은 책방에서 이 작품이 스포츠 코너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불평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한번 쓰인 작품은, 자신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니까.


1. 가짜 르나르의 야구 박물지

나는 여기에 이렇게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여기는 내 방이고,대략 2만 권의 책과 갈색 수고양이가 한 마리 있다. 고양이 이름은 ‘365일의 반찬 백과’이다.
고양이의 이름이 ‘365일의 반찬 백과’인 것에 대해 나는 이러니저러니 말을 듣고 싶지 않다.
수고양이라면 ‘365일의 반찬 백과’, 암고양이라면 ‘다자이 오사무(역자주: 근대 일본 작가) 주간’. 그것이 여기 규칙인 것이다. “그것만 지켜 준다면 이후엔 마음대로 써도 좋아요.” - 집주인은 그렇게 말하고 이 방을 빌려 주었다. 나로서도 겨우 찾은 방을 쫓겨 나기는 싫다. 게다가 나는 그 규칙이 마음에 든다. 수고양이라면 ‘365일의 반찬 백과’, 암고양이라면 ‘다자이 오사무 주간’.
나는 꽤나 많은 고양이를 키워 왔다. 내 기억의 맨 처음에 등장하는 고양이는 나이 든 꿩고양이의 수컷으로 ‘탬버린’인지 ‘만돌린’인지 ‘만다린’인지 하는 이름이었다. 할머니가 키우던 ‘탬버린’인지 ‘만돌린’인지 ‘만다린’인지 하는 이름의 그 고양이는, 쭉 자리에 누워 계시던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내내 자리에 누워 있던 고양이였다. 할머니가 병상에 누우셨을 때부터 그 고양이도, 자신의 등나무 바구니로 된 침대에 틀어박히게 된 것이었다. 쭉 누워 계시던 할머니가 작아짐에 따라, 그 고양이도 작아져 갔다. 할머니와 고양이의 크기 비율은 마지막까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날 안으로 ‘탬버린’인지 ‘만돌린’인지 ‘만다린’인지 하는 이름의 그 고양이도 숨을 거뒀다.
1학년이 되자 아버지가 샴고양이 한 쌍을 얻어 왔다.
“어떤 이름이 좋으냐?” 아버지가 나에게 물으셨다.
나는 언젠가 기르게 될 때를 위해서 생각해 놓은 소중한 이름을 아버지에게 알려 주었다.
“소켓과 플러그.”
아버지는 관대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의 소망을 들어 주었다.
‘소켓과 ‘플러그’로부터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는 고양이에게 수없이 많은 이름을 붙여 왔다. 고양이를 키울 수 없을 때에는 대신에 전기 기구에 이름을 붙였다. 토스터가 ‘프랭크’, 냉장고가 ‘샘’, 전기 스탠드가 ‘비키’, 헤어 드라이어가 ‘빈스’, 벨레비전이 ‘루크’. 그러고 보니 그 시절의 전기 제품에는 어딘가 모르게 동물처럼 보이는 구석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고양이를 키울 수 있게 되고서는 전기 제품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만두었다. 전기 제품에 이름이 붙어 있으면 고양이가 쉬 피로해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고양이에게만 이름을 붙였다. 참, 눈에 보이는 모든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였던 시기도 있었지. 들고양이, 잡지에 나오는 고양이, 텔레비전의 화면을 잠시 스쳐 가는 먼지만큼 작은 빨간 고양이. 그러나 고양이들은 모두 죽어 갔다. 내가 이름을 붙이건 안 붙이건 상관도 없이. 이젠 고양이의 이름만을 생각하는 인생은 싫다. 이제부터는 전혀 다른 일을 하면서 생활해 갈 것이다.
집주인의 얘기에 의하면 내 방에 기거하고 있는 것은 8대째 ‘365일의 반찬 백과’이다. 어제 체중을 재 보았더니 7킬로였다. 체중 7킬로의 갈색 ‘365일의 반찬 백과’. 한쪽은 빨갛고 또 한쪽은 파랑. 뭐 콘택트 렌즈를 끼고 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1개월 전에는 ‘다자이 오사무 주간’도 있었다. 6대째 ‘다자이 오사무 주간’. 체중 3킬로의 얼룩무늬 암고양이는 창문으로 통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365일의 반찬 백과’보다 멋진 수고양이가 눈에 띈 것이었다.
이것을 글로 써 보면,
“‘다자이 오사무 주간’은 ‘365일의 반찬 백과’를 남기고 나갔다.”가 된다. 왠지 우습다. 뭐, 왠지 모르게 말이다.
실의에 빠진 ‘365일의 반찬 백과’는 그로부터 쭉 책꽂이 꼭대기에 엎드려 바깥만 바라보고 있다. 어쩌면 ‘다자이 오사무 주간’이 다른 수고양이와 그걸 하고 있는 것도 보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365일의 반찬 백과’는 ‘야옹’ 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침묵의 수고양이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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