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 스마트폰 해드리고 끄적이는 글(조금 길어요)

열흘쯤 전 아빠한테 스마트폰을 해드렸어요.

일단 구글 계정을 만들어 드리고 기본적인 사용법을 가르쳐 드리니까 

유튜브로 동영상도 보시고, 구글 지도도 찾고, 즐겨찾기도 만들고 이것저것 혼자서도 잘 하시는 모습을 보니 

한달 정도 쓰시면 완전히 익숙해지실 것 같아서 뿌듯하기도 하고 좀 짠하기도 합니다.

제 평생 아빠를 지켜본 바에 따르면 아빠는 지적 자극에 대한 욕구가 강하고, 학습능력도 좋은 편인데다 

성실하고 끈기가 있는 타입이라 여유 있는 집에서 자라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더라면 

화이트칼라나 전문직 종사자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현실은 엄청나게 가난한 집에서 자란 양보+희생 잘하는 아들이라 중졸로 노동 시장에 뛰어든 블루칼라 노동자지만요.

물론 저는 정직하게 벌어서 먹고 사는 블루 칼라 노동자인 아빠가 자랑스럽지만, 

그래도 아빠의 삶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특히나 아빠 개인의 노력과 별개로 재래시장의 몰락 탓에 수입은 십수년 이상 꾸준히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니까요. 

나이 환갑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육체 노동을 하시는 게 쉬울 리 없는데 그렇다고 은퇴를 하면 

은퇴 후의 자기 개발은 개뿔이고 당장 입에 풀칠할 걱정부터 해야 할 형편이니까요. 

사실 경제적 어려움의 제1 원인은 아빠 본인의 호구짓(이 이상 적합한 단어를 찾을 수가 없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얘기 하자고 쓰는 글이 아니니 좋게좋게 넘어갑니다.

아무튼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학교 숙제를 봐주셨던 건 대부분 아빠였어요. 

엄마는 공부를 무척이나 싫어하시고 지금도 '공부 열심히 해서 사무실에서 일 할래, 아님 그냥 공부 안하고 식당에서 일할래?' 하면

망설이지 않고 식당일을 택하겠다 하시는 분이셔서 뭐 만들기 과제나 준비물 챙기기 같은 것들은 잘 해주셨지만 

문제를 풀어간다든가 글쓰기를 한다든가 하는 숙제는 전부 아빠 몫이었는데, 

기억의 왜곡인지는 몰라도 같이 문제를 풀고 숙제를 하는 과정 자체를 아빠는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배움에 대한 갈증이 있었달까요.


13평짜리 쬐깐한 집에서 네식구가 살 때도 아빠의 책상과 책꽂이가 있었고, 책꽂이 가득 책이 꽂혀 있었고,

한 십년 전까지만 해도 매일 일기를 쓰셨고, 지금도 집에는 아빠가 젊었을 적 영어, 한자, 시사/경제용어 등을 공부한다고 봤던 책들이 남아있습니다.

하이눈을, 사운드 오브 뮤직을, E.T.를 보여주신 것도 아빠였고, 비틀즈 베스트 앨범을 사준 것도 아빠였고, 

해리 포터 시리즈가 한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끌기 전에 신문기사를 보고(이때도 영어권에서 이미 유명해진 상태긴 했음) 사주신 것도 아빠였고, 

전반적으로 영화와 책을 즐기고 비틀즈 박스 세트를 지르는 지금의 제 취향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아빠예요.

십수년 전에 잠시 통기타를 배우려 했던 아빠의 모습을 떠올리면 빌리 엘리어트 뮤지컬 프로그램에 인용된, 

1984년 당시 광부들의 파업을 이끌었던 아서 스카길의 말이 생각나요.

대략 사람들이 단순히 약간의 여가 생활을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각자가 가진 모든 재능과 능력을 어떤 형태로든 발휘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꾸는 얘기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인건비가 똥값인 우리나라 현실을 생각하면 어렵겠지요.

불가능하리라 확신하는 것은 저 스스로도 부끄러운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십년 전쯤, 북유럽 어딘가에서 대학 교수의 월급과 트럭 기사의 월급이 비슷하다는 얘기를 주워듣고 '아니 도대체 왜?'라고 생각했거든요.

정말로 열심히 일하는 트럭 기사에게 사랑 받고 자라는 딸내미였던 제가요.

    • 중학교 중퇴 어머니가 나를 보고 대리만족을 하시지요. 넌 나를 닮아서 책을 좋아하는거야

      • 어머니 말씀이 맞을 거예요 아마.
    • 그래도 침엽수님덕분에 행복한 아버님이실것 같아요
      • 그랬으면 좋겠어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효도해야겠단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 그래도 좋은 아빠 엄마 조금 착한 딸 같아요.

      • 고맙습니다. 조금 착한 딸 되려고 노력 중이에요.
    • 침엽수님 좋은 분이시네요. 아버님도요.

      • 잔다고 누웠는데 과연 난 좋은 사람인가 돌아보게 되는 댓글입니다.;;
    • 훈훈한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잘 읽으셨다니 감사해요.

    • 무례를 범하려는 것도, 강박적인 pc함을 적용하려는 것도 아니지만 한가지 짚고 넘어 가야겠어서 씁니다

      저희 엄마는 공부도 좋아하셨고 잘하셨지만 식당에서 일하셨어요. 어떤 예시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예가 너무 거칠어서 덧붙여요
      • 공부 안하고 식당일 하겠단 건 실제로 저희 어머니께서 가끔 하시는 말씀이라 적은 거지, 식당에서 일하시는 모든 분들이 그렇다는 말을 하는 건 절대 아니니까 마음 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 제가 어머니에게 느끼는거랑 비슷한 감정이신거같아요.


      전 제가 공부를 인생 내내 엄청 잘한 편이었지만 어머니가 그시절이 공부했다면 미국에서 박사 따왔을거라 생각해요.


      당신은 제가 공부 잘한걸 엄청 자랑스러워하시고 대리만족으로 생각하셨지만 가끔씩 삶에서 번득이는 아이디어나 지혜가 나오는 걸 보면 우와... 할때가 한두번이 아니에요. 전 그냥 그 재능을 좀 물려받은것일 뿐이고.


      왠지 제 얘기같아서 찡해요 ㅎ
      • 저희 부모님 세대에는 이런 경우가 흔히 있었겠지요. 사실 지금도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포기하는 재능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을 거고요.ㅠ

    • 찡해지는 글이네요.,
      • 나이가 들어가면서 다들 조금씩은 부모님께 짠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 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어르신들의 삶의 지혜나 문제의 해결방식, 접근방식을 보면 어르신들의 방식을 종종 무시하고 깔보던 어리던 시절의 제생각이 부끄러워 집니다.


      내가 나이가 먹어도 저런식의 지혜가 있을까 싶기도 하구요.
      어떤것들은 나이가 먹기 전까지는 아마 죽었다 깨나도 이해못하는거 같아요.

      • 지금도 제 잘난 맛에 사는 편이긴 한데 부끄럽게도 어렸을 땐 그게 더 했던 것 같아요.

    • 아들만 둘인데 우리 아이들이 자라서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생각하게 만드는 글입니다. 역시 딸이 하나 더 있었으면 싶기도 하구요.
      • 역시 딸이 진리죠! 가 아니고, 칼리토님 아이들 잘 자랄 거예요.

    • 가슴이 따뜻해지는 글 감사합니다. 


      "대략 사람들이 단순히 약간의 여가 생활을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각자가 가진 모든 재능과 능력을 어떤 형태로든 발휘할 수 있는 사회"라니, 생각만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 네 정말 꿈같은 사회죠. 빌리 엘리어트 영화랑 뮤지컬 뒤적이다 보면 정말 짠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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