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잉록에서의 소풍] 코드A 블루레이가 드디어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DJUNA 님께 드리는 소식입니다. 이미 아실 수도 있겠지만, 예전부터 크라이테리언은 새 판본 안 내고 뭐 하느냐고 투덜거리셨던 게 기억나서요.

 피터 위어 감독의 초기 대표작 [행잉록에서의 소풍]이 마침내 미국 크라이테리언에서 블루레이로 출시됩니다. 6월 17일 예정. 영국에서는 몇 년 전에 이미 블루레이를 냈지만, 지역 코드 문제 때문에 망설이셨던 분들께는 희소식이겠지요.

 요즘 크라이테리언에서 내는 다른 타이틀과 마찬가지로 DVD와 블루레이 합본이고, 1998년에 출시한 DVD와 마찬가지로 107분짜리 감독판만 수록하는 모양입니다. 크라이테리언이라면 115분짜리 처음 공개된 판본도 넣어줄 법도 한데, 혹시 위어 감독이 블루레이 제작에 참여하면서 넣지 말아 달라고 한 것은 아닌지. 아마 그보다는 소스 수급 문제라든지 복원 비용 문제라든지 더 실리적인 이유가 있었을 테지만, 감독판이 새로운 장면을 추가한 게 아니라 기존에 있던 장면을 잘라낸 판본이라는 걸 고려하면 위어가 꺼렸을 것도 같습니다. 극장판이 짧고 감독판이 길면 '야, 내가 원래 이러려고 했는데 그땐 못 넣었어. 이제 나의 원래 비전을 보아라!' 하는 기분이지만, 극장판이 긴데 감독판이 더 짧으면 '어유, 개봉할 때는 몰랐는데 극장에서 보니까 그건 필요 없었더라. 그땐 내가 실수했어.' 하는 것 같잖아요.

 사실 이 영화에 감독판이 따로 있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오래전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제가 필름으로 본 판본은 뭐였나 하고 찾아보니 극장판이었네요. 워낙 예전 일이라 지금보면 무슨 차이가 있는지, 뭐가 없어졌는지 알아보지도 못하겠죠. 당시 DJUNA 님의 팬심 가득한 리뷰를 먼저 읽고 '이 영화는 언제 볼 수 있을까' 막연히 기다리다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해줘서 반가워하며 본 영화였는데, 재미는 있었고 [천상의 피조물]과 비슷한 기분으로다가 컬트 팬을 끌 만한 이유도 있다고 여겼지만, 당시의 제가 열광할 만한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한 번밖에 안 본 영화지만 몇몇 이미지는 지금까지 선명히 남아서, 언젠가는 다시 보고 싶었지요. 특히 한 아름다운 학생을 바라보던 선생님이 "저 아이는 보티첼리의 천사예요."라고 말하는 장면. 그것만은 아직도 학생의 금발 머리가 눈에 선한 것은 물론이고 선생님의 목소리까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그런 꿈결 같은 이미지는 기억에만 담아놓는 편이 더 아름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래도 결국 블루레이 사겠지만.

 크라이테리언의 DVD는 크라이테리언에서 막 DVD 사업에 뛰어들고 얼마 안 돼서 나온 거라 비 아나몰픽에다 부록도 없는 거나 다름없었는데, 이번 판본에는 이런저런 인터뷰 영상과 제작 다큐멘터리, 그리고 위어 감독의 초기작인 50분짜리 중편 영화 [Homesdale]도 수록될 모양입니다. 표지도 마음에 드네요. 아주 그냥 소녀소녀 합니다.

29_DF_box_348x490_original.jpg
    • 이 영화는 거의 새로운 장을 개척하지 않았나요? 영화는 내내 아무것도 안 하고 아름다운 소녀들만 보여주는데, 그것만으로, 아름다운 것만으로 너무나 불안한 거. 아름다움이 영화의 미스테리고 스릴러고 서스펜스고 호러인 거. 아이디어만 두고 생각하면 굉장히 추상적인데, 이게 정말로 가능하다니. 영화가 초반에 하얀 레이스들을 화면 밖으로 퍼부어댈 때부터 거의 무슨 슈가 하이 상태로 취한 채 보게 돼요. 

      •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던 당시의 저는 아직 영화에서 서사 밖의 것을 보고 듣는 데에 둔감한 관객이었거든요. 그래서 말씀하신 것만큼 민감하게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 사이에 영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많이 변했다고 생각하는데(≒ 아무것도 안 하는데 긴장이 있는 안토니오니 영화 같은 것도 즐길 줄 알게 됐으니까), 다시 보면 어떠려나 기대도 되고 그러네요.

        • 오. 연관지어서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저는 안토니오니의 열렬한 팬이기도 해요. 모니카 비티가 아들 손을 잡고 붉은 사막을 끝도 없이 걸어가기만 할 때 왜인지 늘 복받쳐 올라 나중엔 거의 울고 싶어지죠.

게시판 2012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462,405 01-31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147,940 12-31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122,149 04-01
130354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0 186 12-31
130353 아바타 3를 보고 유스포 2 191 12-31
130352 [핵바낭] 올해 잉여질 결산 잡담 14 332 12-31
130351 아바타: 불 과 재 보고 왔어요 짤막 소감 6 228 12-31
130350 [영화강추] '척의 일생' 8 249 12-31
130349 흑백요리사 2 8~10회, 싱어게인 4 탑 4 결정 6 285 12-31
130348 Lacombe Lucien(1974) 7 131 12-31
130347 [관리] 25년도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5 324 12-31
130346 Isiah Whitlock Jr. 1954 - 2025 R.I.P. 2 138 12-31
130345 [왓챠바낭] 우편배달부 말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잡담입니다 12 267 12-31
130344 [넷플] 말 많고 탈 많은 '대홍수' 드디어 봤습니다 14 453 12-30
130343 [반말주의] 다들 올해 고생 많았어!! 새해 모두 건강하고 복 터지길 바래!! 12 186 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