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어떤 편지에 대하여
저는 윈도우 복구 cd를 찾고 있었습니다.
컴퓨터를 산 지 이제 한 달 넘은 것 같은데 슬슬 부팅에서 오류가 생기기 시작했거든요. 설치기사가 뭔가를 주고 갔던가? 그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아서 서랍을 뒤지고 잡동사니를 넣어 놓은 박스를 꺼냈습니다.
거기에는 컴퓨터 연결 선과 기타 쓸데없는 설치 cd와 사용설명서와 함께 초등학생때부터 받은 편지들이 얌전히 들어있었습니다.
j가 준 편지들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j는 나의 연인입니다.
j의 편지는 굉장히 많았는데 크리스마스 카드부터해서 생일카드, 여행지에서 부친 엽서와 연애 초기에 보내온 사진이며 쪽지 등등 아주 다양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사귀기 전, 대학교 1학년의 겨울방학에 받은 편지를 찾았습니다.
그건 제 열 아홉번째 생일이 조금 지난 어느날 받은 선물상자에 들어있던 편지였습니다.
선물과 편지를 배달받기 전, 그러니까 제 생일 날 j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그 때 j는 일본을 여행하고 돌아왔고, 지금은 부산이며 곧 대구로 이동한다고 말했었죠.
우리는 대학 동기이고 친구였지만 저는 우리가 가까운 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j가 제 생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무척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j는 또래보다 다섯 살은 많이 먹은 사람처럼 굴었고, 실제로 다섯 해 정도 더 산 사람처럼 뭐든지 능숙한 애였어요.
똑같이 갓 대학에 들어온 스무 살짜리인데 다른 애들과 달리 j는 자기를 둘러싼 상황을 재빨리 파악하고, 습득하고, 시시해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의 j는 지금보다 어렸기 때문에(그리고 아마 연인이 아니니까?) 면박주기/말꼬리 잡기/놀리기/곤란한 부탁하기 따위를 저에게 서슴없이 해댔죠.
말하자면 저는 j를 그리 좋아한다고는 할 수 없는 상태였고, j가 저를 다소 우습게 본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제 생일에 걸려온 j의 전화를 받고 많이 놀랐고 고마웠고 생각보다 다정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생일이 며칠 지나서 선물과 편지를 배달받고는 더 그렇게 생각했고요. 선물을 받고 j에게 전화를 걸어서 고맙다고 말했던 기억이 나요. 생일 선물은 다이어리와 j가 만들었다는 가죽 핸드폰 스트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배경설명을 구구절절하게 하는 이유는 제가 윈도우 복구 cd를 찾다가 읽은 편지가 그 때 받은 그 편지인데
거기에는 저를 좋아한다고 적혀있었습니다.
믿을 수가 없는 게 정말 진심을 다한 편지였는데 저는 그 때 그걸 읽고도 알아채지 못했어요.
심지어 '좋아한다'는 부분은 행갈이까지 했는데 (j는 글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유없이 문장을 구성하지 않습니다) 몰랐어요! 심지어 좋아한다고는 두 번이나 썼어요! 그 때 나는 문맹이었나요?
그 후로 2년이나 더 지나서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빡친 j가 내지를 때까지도 저는 아무런 낌새도 채지 못했습니다.
j가 좋아한다고 했을 때 제가 느꼈던 비현실감이 오히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요.
j는 편지는, 지금 읽어도 알 수 있어요. 거기에는 애정이 가득하고,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사람의 어려움과 민망함과 용기가 그대로 들어있습니다.
저는 그 때 분명히 이 편지를 여러 번 읽었어요. 심지어 그 당시 일기에는 j에게서 선물을 받았는데 선물보다 편지가 더 기뻤다, 고 적었어요. 허..허...
이 편지의 고백을 뒤늦게 깨닫고 무척이나 슬펐습니다.
만 열 아홉이 된, 아직도 성년이 못 된 꼬맹이가 자기를 좋아해주는 사람에게 무심결에 입힌 상처가 고스란히 보였고, 제가 지금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입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항상 그게 잘 안 되죠.
저는 아마 그 때와 그리 다르지 않을 거예요. 빨리 어른이 되어야 하는데.
그 '어른' 이라는 게 나이만 먹으면 될 줄 알았죠....
글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