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추천 ‘BRAND’

 

#1
브랜드란 과연 무엇일까요. 실재하는 듯 보이지만 그 본질적 속성은 손에 잡히지 않는, 시뮬라시옹과 같은 그 무엇이지만 우리는 브랜드에 둘러싸여 살고 있습니다.

 

제주에 올 때 이용한 항공사와 비행기를 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던 것은 제가 해당 회사의 브랜딩 프로젝트를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귀 비행기는 다른 회사를 이용하게 될 거 같은데, 이 곳 역시나 잠시 몸 담았던 회사가 브랜딩을 담당한 곳 입니다. 이런 것에서 묘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 직업 탓이겠죠.

 

오전에 점심을 먹기 위해 읍내로 나갔습니다. 2키로 정도 되는 거리이기에 걸어가기엔 조금 애매한 거리라 주인분의 자전거를 빌렸습니다. 원래는 투숙객에게 임대하는 자전거가 아니라는데 오늘 기분이 좋으셨나 봅니다. 읍내에 도착해 식사를 하고 장을 보러 갑니다. 숙소 인근엔 식당이나 슈퍼가 없기에 몇몇 제품들을 사둬야 했거든요. 읍내엔 2개의 마트가 있습니다. 하나로 마트와 금성마트. 금성마트는 우리고 알고 있는 그 금성과는 무관하게 보입니다. 규모도 비슷. 저는 이 둘 중 어디서 장을 볼까 고민하다가 결국 하나로 마트로 갔습니다.

 

그 이유는 뭘까요. 바로 브랜드 때문이죠. 기존 이용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신뢰감 있는 모기업의 존재. 현지 특산품을 싸고 믿을만하게 팔 거 같은 느낌과 경험. 판단이 애매한 상황에서 브랜드는 'TRUST'를 줍니다. 그리고 이런 브랜드는 Trust Mark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죠. 여기에 개인적 경험이나 감성적 부분이 더해지게 되면 그 유명한 Love Mark가 됩니다.

 

낯선 상황에서 Trust Mark의 브랜드를 접하게 되면 선택이 쉬워집니다. 해외로 간 여행자들이 현지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을 때 맥도날드를 찾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전 세계 어디서나 비슷한 가격, 비슷한 품질. 제가 이틀 전 파파이스를 선택한 것도 같은 이유겠죠.

 

어제 늦은 새벽, 저에게 걸려온 전전여친의 전화. 그녀에게 저는 트러스트 마크였겠죠. 위안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헤어졌으니 러브마크는 아닐 테고. 제주도에 수맥이 흐르는 건가요. 지나간 사람들의 연락이 잦군요.

 

상허 이태준 선생께서 무서록에서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오랫동안 우정을 쌓아온 남녀라 할지라도 둘 만 있는 상황이 되면 남자는 돌진하고도 남을 것이라 하셨죠. 그러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도 하셨던 거 같기도 하고. 남자란 동물은 여자에게 있어서 트러스트 마크가 되긴 글러먹은 걸까요.

 

#2
브랜드는 우리 주변에 만연해 있지만 그것을 명확히 설명하거나 이해하긴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여기에 대한 많은 의문과 이야기들. 이것을 명쾌하고 유쾌하게 정리한 책이 있습니다.

 

일본의 슈퍼 크리에이터인 오카 야스미치와 브랜드 컨설턴드 요시다 노조무 선생이 공저한 'BRAND'. 일본에서는 2권으로 나뉘어 발간이 되었고 국내 번역본은 그 2권을 합친 합본입니다. 두 거장이 나누는 대담을 정리한 형식이며 다양한 주제를 자유롭게 다루고 있습니다.

 

오카 야스미치는 일본 굴지의 광고 대행사 덴츠 출신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제일기획 같은 회사죠. 제일기획이 언제나 업계 1위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덴츠의 1위 수성도 무너진 적이 없습니다. 덴츠의 경우 좀 더 탄탄한 위치에 있습니다. 2위인 하쿠호도와의 차이가 2배 가까이 나니까요. 그리고 덴츠는 삼성과 같은 모기업이 없습니다. 인하우스 에이전시가 아니죠.

 

덴츠는 전쟁 당시 일본 정보국이 모태이며 그 영향력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재밌는 형태입니다. 광고 회사의 모태가 정보국이라니) 그래서 일본의 유력 인사들의 자녀가 일 년에도 수차례 콜드플레이 1집을 들으며 낙하산을 타고 덴츠에 입성한다고 합니다. 덴츠 본사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1만 여명의 덴츠 직원이 근무하는 본사 근처엔 일본 유수의 기업들이 위치해 있습니다. 덴츠가 사옥을 지을 때 각 기업들에게 주변 타운에 입주를 권유하자 바로 승낙을 했다고 하니까요. (그 잘나간다는 제일기획도 직원이 1,000여명 수준인 걸 감안하면 덴츠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덴츠에서도 발군의 기량을 뽐내던 오카 야스미치는 해외연수를 다녀오고 나서 ‘이대론 안된다’라는 각성을 경험. TUGBOAT라는 크리에이티브 부띠끄를 설립합니다. 터그보트는 예인선이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브랜드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겠다는 포부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그가 쓴 카피를 감상해 보겠습니다.

 

 

<아들의 겨울 편>
‘아빠, 거짓말 해본 적 있어?...’
‘응...’
겨울이라서 얘기하고 싶어지는 것일까....
JR히가시니혼(東日本)


<아키타 가족 여행 편>
아버지가 홀로 부임하여 아키타에도 집이 생겼다.
반년밖에 안 지났는데 아버지는 부쩍 늙어 보였지만,
젊어지셨다고 말씀드렸다. 립 서비스...
따로 따로 살다보니
아버지의 모든 것을 꽤나 좋아한다는 것을 느꼈다.

NA: 기차여행이 가져다 준 것.
TRAiNG JR히가시니혼(東日本).

 

 

JR의 경우 오랜 기간 동안 일관된 톤앤매너를 유지하기로 유명한 클라이언트라 저런 광고를 집행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일하기 좋은 토양이 있었던 건 분명하지만 저런 수준의 카피라면, 글쎄요. 거의 문학 반열에 오른 수준이라 생각합니다.

 

요시다 노조무의 경우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2차 대전 당시 조선 지배를 합리화하는 글을 써서 극우적 성향을 드러내었기에 개인적으로 비호감입니다. 본 책에서 나오는 좋은 이야기의 대부분은 오카 야스미치의 입에서 나옵니다. 우연은 아닐테죠. 

 

자, 다시 책이야기로.
BRAND의 서문은 압도적입니다.

 

“본래의 자신보다 나아보이고 싶다는 욕망. 그것이 병의 시작이다”

 

소비자의 욕망을 꿰뚫고 있는 인사이트. 생활자와 크리에이터 모두 공감할만한 내용. 이 정도면 왠만한 철학자 뺨때리는 수준입니다.

 

압도적인 서문 이후 그들의 이야기는 ‘과연 키높이 구두를 신는 남자를 신뢰할 수 있는가’로 시작하며 브랜드의 본질과 특성에 대한 이야기를 풍요롭게 나눕니다. 제가 깔창이나 키높이 신발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지 더 와닿았구요 ㅋ

 

일반적으로 광고나 브랜드를 다룬 책은 2가지 부류로 나뉩니다. 핵심적인 인사이트를 기반으로 그것을 풀어내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는 책. 즉 본질적 내용은 한 문장인데, 거기에 대한 부연으로 책이 가득 차 있는 경우입니다. 알 리스와 잭 트라우트 형님이 쓴 포지셔닝이 대표적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전공 서적의 형태를 띤 난해한 기술서 부류. 베스트셀러 목록에 종종 등장하는 대부분의 마케팅 서적이 후자에 해당합니다. 수많은 서적들이 전자가 되고 싶어서 새로운 개념 찾기에 시간을 할애하지만 대부분 실패에 그칩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마케팅 관련 서적을 신뢰하지 않으며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 시간에 순수 문학이나 철학 서적을 읽는 게 더 도움 된다 생각하구요. 하지만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존경해마지 않는 업계 선배님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언컨대 대한민국 광고 블로그 중 가장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는 번개와 피뢰침(http://pyrechim.egloos.com). 같은 회사에서 만나 친구가 된 AE와 카피라이터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블로그 입니다. 특히 AE분의 경우 한국에서 일하다 홍콩 오길비로 이직한 매우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입니다. (홍콩은 우리나라 보다 더 높은 수준의 광고 인프라를 가지고 있죠)

 

두 분이 쓰는 글들의 깊이나 재미, 통찰력은 너무나도 풍성합니다. 광고 지망생에게 대한민국 광고홍보학과 교수님들의 수업과 이 블로그 중 하나를 추천 하라면 전 주저 없이 후자를 선택하겠습니다. 이 블로그는 이미 하나의 텍스트이며 그 안의 유려한 문장과 인사이트는 이미 바다를 이루고 있습니다. 굳이 이 쪽 분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흥미 있게 구경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전 이 블로그의 모든 글을 읽었는데, 주말이 한가한 분이라면 일독을 권합니다.

 

- 브랜드는 결국 기업이 소비자에게 쓰는 러브레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 인간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지만 기업은 그것을 할 수 있어야만 한다
- 기업의 본질은 결국 ‘청춘’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는 그런
- 아이디어는 무한정이니까 노력 같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몇 가지 문장들을 정리해 본 것입니다.

 

인상적이었던 내용 중 하나가 소니에 대한 브랜드 진단이었습니다. 소니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소니가 ‘재밌는 기업’이었기 때문인데 이제는 그러한 ‘재미’가 사라졌기에 몰락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워크맨이나 CD를 개발해낸 뛰어난 창조자들을 내쫓았고, 당장의 수익과 무관한 개발부서에 대한 투자를 중지하면서 몰락이 시작되었다 하더군요. (일전에 어느 블로그에서 본 글인데 지금의 네이버도 이러한 상황이라 하더군요. 지금의 네이버를 있게 한 ‘유쾌한 크리에이터’들은 이미 다 나간 상태이며 지금은 1위 수성만을 목적으로 하는 단순 상업 기업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죠)

 

혼다는 아직 소니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비슷한 길을 걸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80-90년대에 일본 젊은이들은 도요타보다 혼다의 사륜차를 선호했는데 그 이유는 혼다의 브랜드 이미지가 젊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수한 완성도의 이륜차에서부터 로봇까지 만들어내는 혼다는 ‘기계 덕후’의 이미지가 여전히 남아있기에 개인적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많은 부분의 산업이 일본의 그림자를 뒤쫓아서 성장했습니다. 특히 광고 분야가 그러합니다. 이 책이 2000년 초반에 쓰여 졌는데 여기서 논하고 있는 일본 광고계의 문제점은 지금 당장의 대한민국 광고계의 문제점과 거의 일치합니다. 묘한 씁쓸함도 느껴지더군요.

 

단순한 흥미든, 업무 역량 강화를 위한 일독이든, 분명 이 책은 읽는 사람의 사유를 한 단계 성장시켜 주리라 확신합니다. ‘마케터가 쓴 레퍼런스급 산업철학서적’이라는 게 저의 평입니다.

 

읽고 난 느낌이 너무 좋아서 누구에게도 추천하고 싶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이미 절판이기에 이렇게 추천 글을 씁니다. 카피라이터에겐 더더욱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경쟁심이 느껴질 테니까요. 하지만 AE들에겐 추천하고 싶습니다. 같이 일하기 편해질 테니. 간혹 중고 매물이 올라오지만 구하기가 만만찮습니다. 저도 사당의 헌책방에서 상태가 양호한 녀석을 구하곤 엄청 기뻐했던 기억이 나네요.

 

대학 졸업 후 지독히도 책을 읽지 않던 저에게 많은 자극과 반성을 가져다 준 책입니다. 시간이 나지 않으면 만들어서라도 책을 좀 더 읽어야겠습니다. 그래야 제 인생도 더 즐거워질 테니 말이죠.

 

제주도 이야기가 아니니 이렇게 또 등장했다는 변명으로 이만 글을 마칩니다.

    • 잘 읽었습니다.

      기업이든 뭐든 오랫동안 일관된 뭔가를 보여준다는 건 어려운 일 같아요.
      • 사람이든 기업이든 지속성은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덕목인거 같아요.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중간에 카피 - 전형적인 일본 광고스럽지만 잔잔히 가슴을 울리는게 역시 대가 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저런 카피가 먹히고, 팔린다는 점. 부러워요 정말.


        칭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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