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챈들러와 무라카미 하루키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카버, 트루먼 카포티, 레이먼드 챈들러.


이 작가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세계적인 작가들이니 만큼 찾으려 들면 이런저런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지만,

저는 이들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무라카미 하루키로 인해 한국에서도 비로소 진가를 인정받은 작가’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중에서도 레이먼드 챈들러는 하루키에게 각별해요.

그는 고교 시절부터 챈들러를 탐독했는데

이후로도 쭉 그의 책을 몇 번이나, 시간이 날 때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

그것도 원서로 읽는 것이 습관이 돼버렸다는 얘기를 여러 차례 한 바 있습니다.


얼마나 여러 번 했냐면 하루키가 직접 쓰거나 하루키에 관해 쓰인 글을,

대충 아무 페이지나 척 펼쳐도

절반가량의 확률로 챈들러에 관한 얘기가 나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최근 한국에도 출간된 ‘파리 리뷰 인터뷰’를 보니 역시 눈에 띄더군요.



“질문)

미국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 당신 소설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지요.

이 장르를 언제부터 읽었고 누가 당신을 이 세계로 인도했나요?


무라카미)

고등학교 때 범죄 소설과 사랑에 빠졌지요.

저에게는 레이먼드 챈들러나 도스토예프스키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제 글쓰기의 이상은 챈들러와 도스토예프스키를 한 권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게 제 목표입니다.”


_파리 리뷰, 작가란 무엇인가, 119p 



위 인터뷰어의 질문에도 나타나 있듯,

하루키가 구사하는 문체의 밑바탕에 깔린 것은

(대실 해밋과) 레이먼드 챈들러가 확립한 하드보일드 소설의 감각입니다.


다만 챈들러가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방식의 하드보일드였다면

하루키는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이끌어 간다는 점이 다르다고 할까.


글쓰기의 궁극적인 지향을 챈들러로 설정한 이유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챈들러가 보여준 문장의 힘이나 글을 풀어가는 방식이 그만큼 뛰어났기 때문일 겁니다.

이에 대해서는 스티븐 킹, 폴 오스터, 마이클 코넬리, 하라 료 같은 작가들도 인정한 바 있지요.

가령 이런 식으로.
 
“묘사를 잘하는 비결은 명료한 관찰력과 명료한 글쓰기인데,

여기서 명료한 글쓰기란 신선한 이미지와 쉬운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나는 레이먼드 챈들러와 대실 해밋, 로스 맥도널드를 읽으면서 이 문제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_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 220p



“챈들러의 문장은 모든 의미에서 지극히 개인적이고 독창적이며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챈들러 생전에도 사후에도 그의 문체를 흉내 내려는 시도는 수없이 있었지만,

대체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_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272p
 


하루키는 챈들러의 소설을 좋아했고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으며

오랜 시간을 들여 챈들러가 구사한 문체의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의도적으로 공부를 했다기보다 챈들러가 쓴 문장과 자주 마주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겠지요.


아마 소설뿐 아니라 챈들러가 쓴 에세이나 편지 등도 빠짐없이 훑어보았으리라 짐작합니다.

왜 이런 짐작을 했냐면 하루키의 에세이에는

본인이 챈들러의 논픽션을 읽고 난 후 떠오른 영감에 대해 적은 구절이

심심찮게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그렇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어떤 책에서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쓰는 비결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당시에는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상당히 오래전 일이라 대부분 잊어버렸다.

꽤 흥미로운 내용이었던 것 같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은데 출처가 어디였는지 도통 생각나지 않는다.

이런 일은 흔하다. 좋았다는 기억은 있는데, 어떻게 좋았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아무튼 나는 그것을 챈들러 방식이라고 부른다.

우선은 책상 하나를 딱 정하라고 챈들러는 말한다.

글을 쓰기 적합한 책상 하나를 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원고지며 만년필, 자료 등을 갖춰놓는다.

반듯하게 정리할 필요까진 없지만 언제든 일할 수 있는 태세를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매일 일정 시간 그 책상 앞에 앉아서 보내는 것이다(하략).”


_무라카미 하루키,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44p



이 에세이는 대략 원고지 15매 정도의 분량인데

전부 챈들러의 집필 방식이랄까, 일종의 ‘챈들러 스타일’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오래전에 어느 책에서 챈들러가 이러이러한 말을 했는데 하도 예전의 일이라 그 책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식의 서술은

이 외에도 몇 번 더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챈들러 방식’이라는 제목의 이 에세이를 읽으면서

‘레이먼드 챈들러의 원문은 정확히 어떻게 기술되어 있을까’가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러던 중 2011년 무렵 레이먼드 챈들러의 『심플 아트 오브 머더』를 만들면서 챈들러가 쓴 논픽션들을 이리저리 훑다가

그가 쓴 서간문을 모은 책에서 ‘챈들러 방식’에 대해 서술된 편지 한 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중요한 건, 전업 작가라면 적어도 하루에 네 시간 이상 일정한 시간을 두고,

그 시간에는 글쓰기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꼭 글을 써야 할 필요는 없어요. 내키지 않으면 굳이 애쓰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물구나무를 서거나 바닥에서 뒹굴어도 좋아요. (...)


다만 바람직하다 싶은 다른 어떤 일도 하면 안 됩니다.

글을 읽거나, 편지를 쓰거나, 잡지를 훑어보거나, 수표를 쓰는 것도 안 돼요.

글을 쓰거나 아니면 아무 일도 하지 말 것.

학교에서 규칙을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 원칙입니다.

학생들에게 얌전히 있으라고 하면 심심해서라도 무언가를 배우려 하죠.

이게 효과가 있답니다. 아주 간단한 두 가지 규칙이에요.”



전문을 읽어보면 동의해 주시겠지 정말이지 흥미로운 글이었습니다.

더구나 챈들러가 남긴 편지들에는 그의 팬이라면 호기심을 가질 만한 내용이,

한 번 더 하루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설날의 복주머니”처럼 잔뜩 담겨 있었습니다.

때문에 챈들러와 하루키의 오랜 팬으로서 챈들러의 서간문을 만드는 동안 많이 신났습니다. 

아마도 이런 게 편집자로서의 소소한 기쁨이겠지요.


광고가 될 테니 제목을 적진 않겠지만

혹시 하루키나 챈들러의 글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챈들러의 편지를 모아놓은 책을 한번 읽어봐 주시길.

분명 흥미로워하실 거예요^^.



덧)

최근 임경선 선생이 번역한 하루키 에세이에도

챈들러의 서간문이 인용되어 있더군요.

이런 내용인데 역시 재미있습니다.


“가끔 세상 사람들은 왜 이토록 아쿠타가와 상을 신경 쓸까 불가사의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얼마 전 얘기입니다만 서점에 가니까

『아쿠타가와 상은 왜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주어지지 않았을까』라는 신간이 나와 있었습니다.


어떤 내용인지 읽지 않아서 모르지만 그런 제목의 책이 출판된다는 것 자체가

‘뭔가 이상한 일이야’라고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만일 그때 아쿠타가와 상을 탔다고 해도 그걸로 인해 세계의 운명이 바뀐다고 생각도 하지 않고,

제 인생이 크게 바뀔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대략 지금 있는 그 상태 그대로고,

저도 그 이후 삼십년 이상 조금은 오차가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대개 엇비슷한 페이스로 집필을 계속해왔을 것입니다.

제가 아쿠타가와 상을 탔든 말든 제가 쓰는 소설은 아마도

어떤 종류의 사람들에겐 호감이고, 또 다른 어떤 종류의 사람들에겐 비호감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열 받을지 모르지만,

아쿠타가와 상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문예춘추’라고 하는 민간출판사가 영업의 일환으로 만든 상에 불과합니다.

문예춘추는 그걸로 장사하고 있는 거지요-까지는 말 못하지만, 장사에 활용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 됩니다.


어쨌든 간에, 이만큼 오랫동안 소설가를 하고 있는 인간의 실감으로서 말씀드리자면,

신인 레벨의 작가가 쓴 것들 중에서 정말로 괄목할 만한 작품이 나오는 일은 대개 5년에 한 번 꼴 정도입니다.

조금 더 관대하게 말하자면 2,3년에 한 번 꼴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 해에 두 번 뽑는 거니까 결과적으로 퍼주는 격이 됩니다.

물론 그건 그것대로 상관없지만(상이라는 것은 많든 적든 축제 의식 같은 것이고, 문호를 넓히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객관적으로 봐서 그렇게 매번 매스컴 대상으로 행사하면서 소란을 피울 만한 레벨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밸런스가 좀 이상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기 시작하면 아쿠타가와 상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문학상이 ‘얼만큼 실질적 가치가 그 안에 있는가’라는 이야기로 연결되고,

그렇게 되면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상이라는 이름이 붙는 아카데미상부터 노벨문학상에 이르기까지,

가치기준이 수치로 한정된 특수한 것을 제외하면,

그 가치의 객관적 근거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깐죽거리려고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깐죽거릴 수도 있고

고맙게 여기려고 마음먹는다면 얼마든지 높이 평가할 수도 있는 것이죠.

레이먼드 챈들러는 한 편지 속에서 노벨문학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_무라카미 하루키 사적 강연록 / MONKEY 2014 봄호 중에서



위에서 하루키가 인용한 레이먼드 챈들러의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위대한 작가가 되고 싶은가? 나는 노벨 문학상을 타고 싶은가? 그렇게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된다면야.

도대체 말이죠, 이류급 작가들한테 노벨상을 남발하니 나까지 관심을 갖게 되는 겁니다.

게다가 스웨덴까지 가야 하고 차려입어야 하고 연설도 해야 하고.

노벨 문학상이 그럴 가치가 있을까요? 흥, 아니죠.

대중적인 취향을 반영하지 않는 예술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회 구조 전반에 걸친 스타일과 특성을 감지하지 않고는 대중적 취향을 알 수가 없지요.”


한국에서 하루키가 쓴 소설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지만,

그가 무명시절에 썼던 미국 현대문학 작가들에 대한 평론은 무척 뛰어납니다.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카버, 트루먼 카포티,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한 평론도 대부분 그때 쓴 게 많고요.  


듀게에는 출판 편집자나 기획자분들이 많이 들어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관심이 있는 분이 계시면 이 평론들을 모아서 출판해 보면 어떨지.

규모가 큰 출판사에서 시도하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제가 내보고 싶은데 저희처럼 작은 출판사에서는 선인세가 엄두가 나지 않아서 말이죠^^.



    • 문예춘추는 그걸로 장사하고 있는 거지요-까지는 말 못하지만, 장사에 활용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 됩니다./ 시원하군요

      • 문단 '따위'에 관심이 없는 작가만이 할 수 있는 말이겠지요.


        하루키는 이런 저런 에세이를 쓰며 문학상 문제 외에도, 관례에 따른 청탁 문제나 소설과 평론의 관계에 대한 거침없는 생각을 개진하는데


        이게 상당히 공감할 만한 구석이 많더군요. 조금 감탄. 

    • "도대체 말이죠, 이류급 작가들한테 노벨상을 남발하니 나까지 관심을 갖게 되는 겁니다"


      보통 감각으론 튀어나올 수 없는 일갈이군요.


      • 이러한 투덜거림적 측면에서의 갑은, 역시 챈들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죠...

    • 1. 하루키와 레이먼드 챈들러의 그런 각별한 인연 때문인지


      하루키의 '1Q84'가 국내 번역 출간될 때 추첨을 통해 북하우스의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6권 증정 이벤트를 했더랬죠.


      그리고 제가 덜컥 당첨...ㅎ


       


      2. 북스피어의 표지는 언제나 마음에 들지만, 박람강기 프로젝트의 표지들은 특히 애정합니다 ♡

      • 1. 와, 부럽. 저는 그거 다 샀는데 말입니다.


        2. 고마워요(정말). 이번 시리즈는 심플함에 초점을...

    • 이 글 너무 좋네요.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 작가에 대한 밀도 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제 취향의 글인데 역시 출판사 관계자분이어서 글의 정보가 남다르네요. 그리고 언급하신 챈들러의 책 사놓고 아직도 안읽고 있었네요-.- 오늘 꺼내서 다 읽어봐야겠어요. 두껍지도 않은데 사놓고 깜빡했네요.

      하루키는 소설보다 수필때문에 더 관심이 가는 작가에요. 유명작가들의 집필방법이라던가 창작의 과정은 참 재미있더군요. 이런 재미있는 꺼리를 한국작가들은 거의 공개를 안해서 참 안타까워요. 어디 보니까 미국작가들은 자신들의 창작노트를 다 작성해서 남긴다는데 한국은 그런게 없다더군요.
    • 좋은 글입니다.^^

    • 근데 호사가로서, 이 글을 참 즐겁게 읽은 사람으로서 애정섞인 야유를 보내보자면 레이먼드 챈들러는 어떤 노벨상 수상작가를 2류작가라고 생각하는걸까요? 그건 살짝 궁금해지는군요. 낄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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