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대로.
1_ 개인적으로 감정을 서술하는걸 꺼려하는 편입니다. 제 속의 이성은 나잇살을 너무 많이 먹어서 할아버지 같지만, 감성(혹은 감정?)은 너무나 어려서 자기 멋대로이고 통제 불능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런 아이를 바깥에서 마음대로 뛰어다니도록 놔둔다면 책임자 입장에서는 부끄러운 일일테니까요. 그래도 잠시 바깥문을 빼꼼이 열고 바람을 쐬는 정도는 좋지 않을까 해서 조금 써봅니다. 무의미함이라는 화두를 굉장히 중요시 여겨서, 속앳말로 '이게 의미가 있을까?'라고 묻는 것이 버릇인 일상 속에서 이런 큰 문제를 만났을 때에도, '이러한 감정을 갖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라고 되묻는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떠한 부분에서 감정이 동하는지까지는 알 수가 없지만, 언뜻언뜻 무언가가 저를 건드리더군요. 그래서 아주 잠깐 잠깐 이동하는 동안 눈물이 나더군요. 라디오가 틀어진 버스 정류장에서 어쩔 수 없이 라디오를 들을 때에도, 버스를 타고 이동 중에 가끔씩 듣는 DMB라디오를 들을 때에도 소식은 피할 수 없더군요. 다만 왜, 어째서 슬픈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2_ 아침에 버스를 타고 가는데 라디오에서 아이들에게 심리적인 치료를 어떻게 할 것인지 정신과 의사와 방송인이 대담을 하더군요. 의사는 아이들을 최대한 매체에서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사고 내용만으로도 아이들에게 정신적인 상흔이 남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지요. 그 의사의 말을 빌리자면 TV 내용의 어떤 문제의 서사 이전에 "울부짖는 어른들"이라는 영상 자체가 아이들에게는 공포로 인식이 된다고 하면서요. 그리고 아이들끼리, 그리고 부모와 함께 최대한 아이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러고보니 그 체육관에서도 멀리 떨어뜨려 놓으라는 이야기도 있었던 듯 싶습니다.) 또한 여기서 아이들이란 사고 당사자들만이 아닌 평범한 아이들까지 포함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왠지 모르게 눈물이 조금씩 나면서도, 이런 조치들이란게 굳이 아이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고로 정신적인 상흔을 버티기 힘들거나,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버티고 서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힘드신 분들은 모든 사람과 함께 감정을 공유해야겠다는 책임에서 물러서서 쉬시기 바랍니다. 어른들이나 아이들이나 육체적인 상처만큼이나 정신적인 상처를 입으면 어느 쪽이든 고통스러운건 마찬가지고, 그것이 고통스럽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어떤 것을 의미하거나 증명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3_ 어떤 글이라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다만, 제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글을 읽어야만 합니다. 아주 오래 전에는 마치 굶었을 때 밥을 먹듯 책을 뚝딱 해치웠었는데 요새는 그게 거의 안되요. 그래서 정말이지 책을 잔뜩 빌려서 쌓아다 놓고는 푹 숙성시킨 다음에 다시 반납하고, 다시 빌리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제 친족은 이것을 가르켜 "헬스"라고 명명했는데 이번에도 다시 반납하러 가면서 딱히 변명할 거리를 찾지를 못하겠더군요. 이 중에서도 저를 계속 괴롭히고 있는 것은 <지식인의 세기>라는 프랑스 지식인 이야기입니다. 무지 무지 두껍습니다. 평범한 책의 3배 정도 크기에 하드 커버, 거의 중사전 정도의 크기입니다. 다만 이것을 읽으면 굉장히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왜 이렇게 읽히지 않는 건지, 게다가 또 읽어보면 그렇게 막 지루하거나 재미없지도 않는데 날 잡고 읽지를 못 하는지 씁쓸하기 그지 없습니다.
진도가 잘 나가는 책은 <세계의 과거사 청산>과 <여론>입니다. 저 위의 책에 비교해서 그나마 잘 읽힌다는거지 몇 시간이고 끈덕지게 읽고 있는건 아닙니다. <여론>의 경우 판본이 두 개가 있는데 빌려왔던 것이 뭔가 번역이 이상한 부분이 있어 빌려오지 못한 책을 살펴보니 잘 번역이 되어 있더군요. 근데 또 빌리지 않은 책에서도 번역이 어색한 부분이 있어서 보면, 빌려온 책에서는 그 부분의 번역은 잘 해 놓았고.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더군요. 전자 같은 경우에는 '이미지'라는 단어를 '상(像)'으로 하나하나 바꿔놓았더군요. 괄호도 하나하나 꼼꼼하게! 여튼 '집단지성'이라는 집단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에 반한 나머지 이런 책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군중심리'도 이맘 때 누군가의 책으로 나왔던 것 같은데 최근의 온라인이 유행하면서 집단에 대해 긍정세로 왜 돌아섰는지 약간은 궁금한 상황. (집단지성에 집단감성도 들어가나 싶기도 하고, 사실 집단지성을 정의한 책부터 찾아보는게 옳겠지만)
<세계의 과거사 청산>은 예전부터 궁금해했던, '뒷처리' 문제의 사례별 연구라고 할까요. 상당히 세심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서 감탄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떤 큰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리고 어떤 큰 실수가 일어났을 때, 그것이 어떤 식으로 마무리되어야 할 지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더군요. 특히 연예계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실수'는 집단적인 감정재판을 통해서 처벌(및 린치)을 받고 피고가 선택하는 개인적인 판단을 통해 말소가 됩니다. 그런 일을 볼 때마다 이 사람은 언제까지 맞아야하고, 그 이후로는 맞지 않아도 될까, 그 도라는 것은 어떤 차원으로 생각을 해야하는걸까 궁금했습니다. 국가적인 문제 연구긴 하지만 [청산]이라는 것은 제게 매우 중요한 의미장입니다. 다만 웹에서 가시적으로 발생하는 처벌이 오프에서 물리적으로 나타나는 일은 흔하진 않을겁니다.
<세계의 과거사 청산>과 <포스트워 1945 ~ 2005> 2권을 보며 (참고로 <포스트워 1945 ~ 2005> 1권은 제 '헬스'도구 중 하나입니다. 적어도 4번은 재대출을 했을겁니다.) 느낀 어떤 지점은, 걸출한 철학자는 거대한 문제 상황이 국가 단위로 압박할 때 나타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중대한 스트레스가 있을 때 그에 맞서서 이름을 들어봄직한 철학자들이 해답 또는 해석을 내놓더라구요. 그리고 생각해봤습니다. 과연 한국은 거대한 문제상황에 놓여 국가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철학적 대답은 누가 하게 될 것인가, 라구요. 그런 거대한 담론에 의미가 있고 대중적인 답변이 나올까요? 외국에서는 운 좋게 제 때에 (또는 늦은 때에) 무게 있는 명저가 나오더군요. 그리고 그 명저들은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왔다는게, 그리고 그 시대 당시에는 큰 논란들 틈바구니의 한 자락으로 빛났다는 것 말이죠.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왠지 그런걸 기대해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철학이 아니어도, 책이 아니어도 되고 예술적인 작품으로써도 시대를 관통하고 모두를 공감시키는 그 무엇이 나오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이미 나와 있는지도 모르지만요.
원래, 개인적인 원칙으로나마 책을 완독하지 않는 이상은 그 책에 대한 부연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결국 다 못 읽을 수도 있으니) 그것도 어기게 되었습니다. 다 읽지 못한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건 부끄러운 일이죠. 발췌도 하기 힘들고 전체를 조망하기도 힘드니까요. 그래도 이렇게 써 보면서 읽을 동기가 조금이나마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네요. (그 반대일 수도 있지만.) 비소설류만 많이 봐서 소설도 몇 권 빌려봤습니다만 1_에서 말했듯 머리 속의 소곤거림 '과연 의미가 있을까?'가 저를 괴롭히는군요. 사실 비소설이라고 해도 그 괴롭힘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만.
4_ 누구나 한번씩 가져봄직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원이 있습니다. 여러 번 생각도 했고 아주 아주 짧은 단편으로 두 개를 완결 짓기도 했죠. 그런데 이번 것은 쉽게 쓰이지 않거나, 아예 쓰여지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근미래의 한국이 배경으로, 행복한 결말이 목적입니다. 알다시피 행복한 결말은 한국에서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죠. 한국의 가장 불행한 결말에 대해 써보라고 하면 저도 신난다고 써볼 자신은 있습니다. 하지만 행복한 결말은 자기를 속이면서 써야할 정도로 쓰기 힘들죠. 그런데 그걸 어떠한 전망으로, 예상으로, 전범으로 써보고 싶다는 그런 아주 가늘고 얇은 망상이 아주 조금 있습니다.
아마도 그 때에는 인구가 줄어들고 있을 겁니다. 사람은 적어지고, 세계는 이주와 기후변화의 시대이며, 3차 산업보다 1차 산업이 더 비중이 커질수도 있을 것입니다. 작은 공동체가 큰 공동체보다 선호되고, 경제의 팽창보다 수축이 옳바른 것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경제학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얼마나 엉터리 같은 것을 수긍하면서 써나가야 될지 의문이지만.) 주인공은 아마도 폐쇄된 도시들을 점검하는 점검부일 가능성이 높고, 큰 도시들이 사멸하여 위험지역이 되고 마치 자연보호구역마냥 관리를 해야하는 지역으로 설정될 수도 있겠죠. 작은 마을이라는게 어느 정도 인구 수로 유지가 될 수 있는지 궁금하지만 15명에서 20명 정도 되는 아주 작은 그런 마을들이 국가 전역에 흩어져 있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농촌 귀향이라는 퇴행적인 행태의 이상적인 판타지일수도 있습니다. 작은 공동체의 끔찍한 문제들도 쉽사리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피해나가야 될 지 모르겠군요.
그냥 안 써도 된다고 생각하고 생각이나 잔뜩 해보자는 마음을 가져야겠어요. 사라지면 사라지는대로 나쁘지 않은 잡상이라고 생각하면서. 거짓말을 하면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은 매우 힘들군요, 역시.
글을 쓰실거면 책을 읽는건 당연하고요. 하루에 네시간씩 써야한다고하더군요.아무거라도요.
레이몬드 첸들러의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에서 읽은말이예요.
화이팅입니다.
그르니에_ 3의 글이란, 듀게나 여타 어딘가에 올릴만한 잡상이나 단상 같은 글이에요.소재를 외부에서 잘 찾지 않는 편이기에 책이 안 읽어진다고 하소연하는 이야기였습니다. 4의 글은 알다시피 소설인데, 그런 방법론의 경우에는 자신를 얼마나 신뢰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꾸준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더군요. "아무거"라고 하면 하루에 네 시간 정도는 글을 쓸 수 있긴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소설을 쓰는데 도움이 될 것인가, 란 의구심이 한 없이 드는거죠. 끝없는 잡상을 "옮겨 적는다"는 행위에 몸을 맡기고 단순 노동을 하는 것과 같은데, 그걸 매일 매일 반복하면 소설을 쓸 수 있게 되긴 하는가, 가. 말하자면 시간을 들여 글을 채워내는 것은 뜀박질 같다면, 소설은 잘 조율된 피겨 스케이팅 같거든요. 이런 의심을 접어두는 것도 글 쓰기의 일환이기는 하겠죠.
된다고 하더군요. 나도 잘 모르지만.
글을 쓰려면 소스가 있어야겠죠?
말하자면 소스를 만드는 작업입니다.
그외엔 스토리를 만들고 자료를 찾는거죠.
괜찮은 글쓰기 강좌를 하나 잡고 해보세요.
저도 써보고 싶은데... 막상 쓰려 하면 손이 안 움직여져요. 뭔가 보이지 않는 손이 막기라도 하는듯이 망설이고만 있어요. 하긴 전 뭘 해도 망설이기만 하지만요.
잔인한오후 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왠지 쓰고 계신 글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추신. 괜찮으시다면 쪽지 확인해주시겠어요? 며칠 됐는데 안 읽어보신 것 같아서...
그르니에_ 강좌가 정말 도움이 될까...? 싶기도 하지만, 기회가 있다면 한 번 시도해보겠습니다. 제게 동인이란게 마땅치 않아서 듀게에 글을 올리며 소설을 쓰게 하는 동인을 얻으려 노력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이 소설 쓰기에 도움이 될테니까요..
useless_ 혹시나, 그것이야말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을 못 쓰는 이유가 아닐까 하네요. 내용이나 소재, 완성도보다는 망설임 말이에요. 글은 인물 만들기를 어려워해서 아직 진행도 되지 않았어요. 나중에 진행된다면 보여드리던가 하겠습니다.
요새 듀게에 쪽지를 확인해달라는 글이 많이 올라오던 것이, 받는 측에서 쪽지가 왔다는 문구가 안 뜨나 보군요. 개편 때문에 생긴 일이라면 이야기를 해 보는게 좋겠네요. 쪽지는 확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