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대한 책
요즘 제가 영화에 대해 제법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물론 다른 사람처럼 영화에 대해 글을 쓸수도, 얘기할 수도 있지만 조금은 더 심도 있게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래서 그런데, 영화에 대한 책 좀 추천 받을 수 있을까요? 뭐, 앙드래 바쟁의 영화의 이해나, 헐리우드 장르의 구조 같은 유명한 책이 있긴 하지만, 뭔가 오래된 책이라 (고전이지만) 읽을지 말지도 고민되고
그렇다고 개론서를 읽으려고 하니 너무 길고... 좀 영화에 대해 차근차근 다가갈 수 있는 단계를 밟고 싶은데ㅡ 막상 없네요. 확실히 저는 영화에 대해서 모르나 봅니다.
상세하게 책들을 권해주실수 있는 분을 찾습니다.ㅠ
<사유 속의 영화>, 문학과지성사, 2011
이 책이 생각하시는 부분에 있어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히치콕과의 대화>도 괜찮을 것 같아요
영화의 어떤 점에 관심이 있으신가에 따라 추천이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떤 분야든 그럴 테지만 한 권으로 일목요연하게 영화의 모든 면을 안내하는 책 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영화에 대해 차근차근 다가"가는 것도, 정해진 길이 있다기보다는 관심 영역에서 출발하여 '아, 내가 이걸 아직 모르고 있구나. 이건 어디서 알 수 있지?' 하는 방식으로 넓혀가는 편이 자연스럽고, 흥미를 잃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단서를 달아두고, 그럼에도 몇 가지 책을 나열하자면, 일단 영화를 말할 때 자주 사용하게 되는 기본 어휘 ─ 컷, 쇼트, 앵글, 미장센, 테이크, 화면비 등등 ─ 와 그 개념을 익히기에는 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가 나쁘지 않습니다. 사실 저는 왜 그런 형식적인 측면에 주목해야 하는가, 또 영화를 볼 때 내용/형식이라는 이분법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에 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데이빗 보드웰/크리스틴 톰슨의 [영화 예술]이 [영화의 이해]와 성격은 비슷하지만 조금 더 나은 책이라고 생각하긴 합니다. 하지만 [영화 예술]은 더 길고 어렵고 추상적이고 비싸서 접근성은 더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 외에도 토마스 소벅의 [영화란 무엇인가](앙드레 바쟁의 책과는 상관없습니다) 등 이런 유형의 '교과서'는 많습니다. 요즘에는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의 카이에 뒤 시네마 영화이론 시리즈나 커뮤니케이션북스에서 출간한 커뮤니케이션 이해총서처럼 아예 얇은 책 한 권으로 특정 분야 ─ 쇼트, 시나리오, 대사, 영화음악, 시점 등등 ─ 만 따로 떼어 주목한 책들도 있더군요.
하지만 사실 제가 정말로 추천하고 싶은 책은 스콧 맥클라우드의 [만화의 이해]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책이 차라리 [영화의 이해] 유의 책보다 영화에 관해 더 중요한 것들을 더 쉽게 설명해주고 있어요. 연속되는 이미지를 이용하여 정보를 전달하는 유형의 예술 작품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영화와 무척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영화를 글로 가르치는' 영화 교과서들과는 달리 이 책은 '만화를 만화로 가르치는' 책인지라 설명이 훨씬 더 직관적이고 시각적입니다. 물론 영화계에서 사용하는 고유의 개념들을 배울 수는 없고, 만화와 영화가 차별화되는 지점에 대해서도 다루지 않지만, 그럼에도 시간 속에서 움직임을 담아내는 시각 예술을 보는 방법을 익히는 과정에서 믿음직한 기틀이 될 만한 책입니다.
위 책들은 시청각 예술인 영화가 어떤 유형의 표현 수단을 지니고 있고 그런 수단을 이용해서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가를 살핀다는 점에서 '실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만 실용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우리가 막연하게 '영화'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대체 무엇인가,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이미지를 포착하여 보도록 한다는 게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영화의 본성이라는 게 뭐고 무엇을 잘할 수 있으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등 영화의 존재론 쪽에도 관심을 넓히고 싶으시다면 추천 목록은 또 한참 달라집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앙드레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입니다. 4~50년대 프랑스에서 활약하면서 누벨바그 세대를 키우고 프랑스의 영화 비평 문화를 선도했던 평론가 앙드레 바쟁의 글을 엮은 책인데요, 윗 문단에서 말한 것과 같은 고민들이 듬뿍 담겨 있죠. 그런데
① 이 책은 바쟁이 일관된 기획을 갖고 구조를 마련하여 집필한 책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동시대와 호흡하면서 여러 지면에 기고한 글을 엮은 책입니다. 그래서 바쟁이 글을 쓰던 당시 프랑스에서 개봉한 영화라든가 당대에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영화를 주로 다루고 있어요. 즉, 어느 정도는 영화사의 흐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읽을 만한 책입니다. 그리고,
② 현재 유통되는 한국어판의 번역이 아주아주아주아주 나쁩니다. 보통 거론되는 게 시각과언어에서 출간한 박상규 역본인데 정말 안 좋습니다. 일단 역자의 한국어 솜씨가 몹시 의심스럽습니다. 일본판을 참조하여 옮긴 듯한 기색이 역력하고, 문장과 문장 간의 흐름을 번역으로 거의 짚어내질 못해요. 내용상 역접과 같은 전환이 있는 대목을 무심코 넘기는 바람에 글의 흐름을 추리하여 원래 문장의 형태를 추리하고 저자의 의도를 다시 추적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저는 프랑스어를 못 해서 원문 대조는 못 하지만, 이런 수준의 번역서라면 당연히 오역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 잘못된 역주가 있기도 합니다. 최근에 사문난적이라는 출판사에서 새 판본이 나왔는데 그것도 시각과언어 판본을 거의 수정 없이 다시 낸 책이더라고요. 굳이 읽으셔야겠다면 그보다는 영화진흥공사에서 1987년에 [存在論과 映畵言語: 앙드레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안병섭 역본이 더 낫습니다.
현재로써는 앙드레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보다는 만약에 님께서 추천하신 [사유 속의 영화]가 훨씬 나은 선택입니다. 이것은 영화 이론의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주요한 에세이나 소논문 열다섯 편을 묶은 책입니다. 영화 이론의 역사라고 하니까 거창하지만, 결국 '영화라는 게 뭐냐, 뭘 할 수 있는 거냐, 이전까지 인류가 접해왔던 것들과는 뭐가 다르냐'라는 의문에 대답하기 위한 시도들이었다고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다만 이론에는 또 이론만의 경향이라는 게 있어서, 처음에는 순수(?)하게 영화라는 게 뭐냐, 라는 물음으로 출발했다면 60년대 들어서 다른 학문 분야를 끌어와서 영화를 검토하는 작업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가령 기호학을 끌어와서 '영화라는 걸 기호라고 볼 수도 있을까?'와 같은 질문을 하는 거죠. 이 책은 그런 이론사의 변천도 함께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반 이후의 글들은 그런 역사적 맥락이나 다른 분야에 관한 이해 없이 소화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어요. 그렇습니다만 역자의 서문과 초기 영화 연구자들의 논의를 담은 앞부분 정도만으로도 이미 풍요로운 사유를 이끌어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또 절판된 책 중에 은행나무에서 2003년에 출간한 김성태의 ['영화'-존재의 이해를 위하여]라는 책도 좋습니다. 이 책도 기본 문제의식은 앞서 말한 책들과 유사합니다. 다만 출발점이 약간 다른데, 바쟁의 책이나 [사유 속의 영화]가 영화의 초창기부터 함께 했던 연구자들의 사유가 성장하는 과정을 순서대로 다룬다면 ['영화'-존재의 이해를 위하여]는 이미 영화가 어떠어떠한 것이라고 막연하게 자리를 잡아버린 시대에 대해 '그런데 왜 우리는 영화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지? 왜 영화 교과서들은 영화사를 지금과 같은 순서로 나열하고 있지? 왜 관객들은 영화가 이야기를 전하는 매체라고 생각하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오늘날 영화를 받아들이는 주된 방식의 정당성을 검토하고 영화가 탄생 당시 지니고 있었던 가능성을 돌이켜보는 책에 가깝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히 영화사의 흐름에 관한 설명도 곁들여지고요. 영화의 탄생부터 함께 성장한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며 과거를 돌아봐야 하는 지금의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더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긴 댓글을 보니 이거 쉽게 글을 올린 제가 부끄럽네요. 사실 리뷰를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해서. 아마 이런 목적을 논하고 글을 올렸어야 되는데.oldies님 그리고 나머지 분들 잘 읽었습니다. 다른 분들도 권해주실수있는 의견이나 책 있다면 댓글 달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