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스젠더에 대한 강간죄 판례 이야기
아래 있는 성소수자 관련 글을 읽다가 생각나서 (책에 실은 글이긴 합니다만) 소개합니다.
벌써 10년도 넘은 예전이네요. 2001년의 일입니다. 당시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트렌스젠더에 관하여 무지했습니다.
태국 여행에서 트렌스젠더 쇼를 보고 신기해할 뿐, 그들이 이웃의 한 명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이 사회의 타자(他者)였던 것이죠.
하리수 씨의 활발한 활동과 잇따른 기사들을 보며 비로소 저도 그들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 대법원 판결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트렌스젠더가 윤간을 당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녀가 법적으로는 여성이 아니므로 강간죄의 객체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강간죄에는 무죄를 선고하고
남녀 모두를 대상으로 성립 가능한 강제추행죄만을 인정한 판결입니다.
목숨을 걸고 수술을 받을 정도로 여성이 되고 싶었던 사람인데
여성이 아니라서 강간죄의 대상조차 아니라니 너무한 것 아닌가 하는 참말로 소박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의문에서 출발하여 선행 연구들을 검토한 끝에, 법원 내부 판례연구회에서 이 문제를 검토한 논문을 발표하고,
변협 발간 학술지 「인권과 정의」에도 기고했습니다. 논문 중 결론 부분 일부만 발췌하여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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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죄의 보호법익은 성적 자기결정권인데, 피해자가 당한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를 일반 여성에 대한 강간죄와 달리 취급해야 할 이유가 없다.
본건 피해자가 일반 여성과 다른 점은 성염색체, 난소의 부재 그리고 성전환 수술 전인 과거의 육체인데,
거칠게 표현하자면, 본 건 피해자가 피고인들에게 강간당한 것은
XX염색체도 아니고, 난소도 아니고, 과거의 육체도 아닌
현재의 육신이며, 그로 인하여 황폐화되는 것은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하고 있는 피해자의 정신과 마음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미 의학의 영역에서 성전환 수술을 성전환자에 대한 적절한 조치로 긍정하고 있는 이상,
법의 영역에서도 사회 일반이 성전환자의 성을 전환된 성으로 인식할 만큼 성공적으로 성전환이 이루어진 경우에는
법률상 성의 변경을 인정하여 주는 것이 헌법상의 요청인 소수자 보호의 원리와 인도주의에 부합할 뿐 아니라
공공복리에도 오히려 부합하는 것이라고 본다.
논문을 마무리하며 우리 선조들의 성적 소수자에 대한 당혹감을 보여 주는 사건이 있어 소개한다.
[세조실록] 풍속을 문란하게 한 종 사방지의 죄를 핵실하고 외방의 노비로 소속시키다
안맹담의 종 사방지(舍方知)라는 자는 턱수염이 없어 모양이 여자와 같은데다가 재봉을 잘하여
여자 옷을 입고 벼슬한 선비의 집안에 드나들었는데, 선비 김구석의 아내 이 씨와 사통하여 사헌부에서 듣고 국문을 하였다.
임금이 서거정에게 이르기를 경도 또한 아는가? 하니 서거정이 대답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하늘에 달려 있는 도리는 음과 양이라 하고 사람에게 달려 있는 도리는 남자와 여자라고 한다.’합니다.
이 사람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니, 죽여서 용서할 게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좌승지(左承旨) 윤필상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인류(人類)가 아니다. 마땅히 모든 원예(遠裔)와 떨어지고 나라 안에서 함께 할 수가 없으니 외방(外方) 고을의 노비로 영구히 소속시키는 것이 옳다 하였다.
오늘, 우리 사회는 성적 소수자들을 더불어 살 인간으로 대우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익명의 성(性)에 종신토록 유배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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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에는 ‘성별의 변경에 관한 특례법안’ 입법공청회가 의료계, 법조계, 종교계 등 각계 인사를 초청하여
국회에서 개최되었는데 저도 발표자로 초청되었습니다.
판사이기는 하지만 30대 초반의 젊은이에 불과했고 법원을 대표하는 입장도 아닌 저로서는
대한변협,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등을 대표하여 참석한 원로들과 첨예한 이슈에 대하여 토론하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습니다.
의학계와 민변에서는 성전환자의 성별 변경을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대한변협은 법적 안정성을 고려하여야 한다면서 유보적인 입장이었지요. 강경하게 반대하는 입장은 기독교계였습니다.
특히 한 원로 목사님의 “소수의 의견이 다수의 의견에 힘을 못쓰는 것은 세계적 현상 아닌가?”,
“최종적 결정은 절대 다수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 등의 주옥같은 말씀을 듣다가 그만 젊은 혈기에 언쟁에 가까운 논쟁을 벌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목사님: 사회 대다수 구성원의 관념을 존중해야 합니다. 윤리 의식, 법적 안정성이 중요한 것 아닙니까?
필자: 다수자에게는 그저 추상적인 관념의 차원에서 느끼는 불편함의 문제지만 소수자에게는 구체적이고 절실한 생존 자체의 문제인 겁니다.
목사님: 남녀 구별은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을 어떻게 판사가 바꾼단 말입니까?
필자: 성전환자도 자기가 좋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태어난 것입니다. 남성의 육체에 여성의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 것도 하나님이 정하신 것 아닌가요?
공청회는 큰 입장 차이만 확인하며 끝났고 이후 국회에서는 별다른 진척이 없는 듯 했습니다.
우리의 법원은 평소 보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한 번 움직이면 성큼 큰 걸음을 내딛기도 합니다.
선구자는 호적정정허가 사건을 담당하는 부산지방법원 가정지원장 고종주 부장판사였습니다.
그는 이 문제에 관하여 방대하고 심도 깊은 연구를 마친 후 훌륭한 논문도 발표하고,
2002년 7월, 우리나라 최초로 성전환자의 성별을 변경하는 호적정정을 허가했습니다.
이후 전국 곳곳의 법원에서 같은 취지의 결정이 잇따랐고 결국 2006년에 대법원 2006. 6. 22.자 2004스42 전원합의체 결정으로
성전환자에 대한 호적정정을 허용하는 역사적인 대법원 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2009년에 이르러 또다시 고종주 부장판사에 의해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을 전환한 성전환자에 대한 강간죄를 유죄로 인정하는 판결이 최초로 선고되었고,
이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됨으로써 이 문제에 관한 매듭이 맺어졌습니다.
2001년 당시에는 먼 훗날에나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했던 변화가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변화의 물결 한 구석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기억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해지곤 합니다.
뿌듯합니다.
아. 잘 읽었습니다. 뿌듯할 만하십니다.
...대단한 분이시네요, 이런 분이 이 게시판에 계시다니.
정말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멋지십니다.
에고 어째 자랑글이 되어버린 듯하여 죄송하고 민망합니다.ㅠ 성소수자 문제에 관한 사회적 논쟁의 전형적인 구조를 보여주는 사안이었던 것 같아서 소개한 것입니다. 그리고 힘든 여건에서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해 오신 많은 분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저와 같은 법을 다루는 자들의 무지함을 뒤늦게나마 일깨워주신 일일 뿐입니다. 그 분들이 진정 훌륭한 일을 해 오신 것입니다. 법이란 항상 사회의 진보를 한발 늦게 가까스로 따라오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그저 너무 늦지나 않도록 노력해야지요. 듀게에서 종종 성소수자에 관한 글을 읽으며 여전히 많이 배우고 무지를 자각하곤 합니다.
짝짝짝
훌륭하십니다. 머리가 절로 숙여지네요.
의미있는 일을 하십니다^^ 멋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