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본 후

그리 대단한 감동을 주지도 않은 이 영화를 참 아름다운 영화로 기억하는 이유가 뭘까?

환상적인 화면에 얼이 빠져서? 애니메이션 같은 추격씬의 속도감에 취해서?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제법 쿨한 관객이 되어 감정의 동요 없이 주인공의 모험을 지켜볼 수 있었는데,  

그저그런 영화의 뻔한 장면에도 쉽게 놀라고 쉽게 눈물 흘리는, 쉬운 관객인 나에게는 꽤 드문 경험이었다.

(어떤 이의 손가락이 잘리고 어떤 이의 머리가 잘려진 장면에서도 잠깐 "어.." 하다 마는 쿨함이 드디어 내게!!)


드미트리의 팔자 눈썹과 날렵한 콧수염, 조플링의 주걱턱과 반지, 가죽 코트까지

악당들조차 각자의 세련되고 개성적인 스타일로 만화같이 등장하여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당연하다는 듯 충실히 수행하는 모습에

나는 어쩐지 그들을 제대로 미워할 수가 없었다.


악당조차 우아하고 멋진, 유쾌하고 아름다운 세계

고통과 슬픔의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깨끗하고 정돈된 세계

그러나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 동화 속의 세계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영화


나에게 감정적인 개입을 허락하지 않았던, 나를 그 세계의 건너편에 못박아 놓았던 이 영화가 끝난 후

나는 그 아름답고 우아한 세계로부터 분리되고 싶지 않다는, 이상하게 그리운 느낌에 잠시 젖었다.

누군가의 죽음조차 슬쩍 흘려보내는 이 영화의 가벼움이 나는 어쩐지 싫지 않았다.

멀찍이 떨어져 바라볼 때에만, 한없이 가볍고 유쾌해질 때에만, 그림처럼 아름다워질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 감동적이라거나 엄청나게 재미있어서라기 보다는 영화가 담고 있는 노스탤지어의 정서 자체가 정말 좋았던 작품이었죠. 생각해보면 이런 감흥을 주는 영화가 참 드물어요.
    • 유러피안 백그라운드 서양인들의 추억을 자극하는 소재가 많다고 하더군요.

게시판 2012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462,407 01-31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147,940 12-31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122,151 04-01
130354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0 187 12-31
130353 아바타 3를 보고 유스포 2 192 12-31
130352 [핵바낭] 올해 잉여질 결산 잡담 14 334 12-31
130351 아바타: 불 과 재 보고 왔어요 짤막 소감 6 228 12-31
130350 [영화강추] '척의 일생' 8 249 12-31
130349 흑백요리사 2 8~10회, 싱어게인 4 탑 4 결정 6 285 12-31
130348 Lacombe Lucien(1974) 7 131 12-31
130347 [관리] 25년도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5 324 12-31
130346 Isiah Whitlock Jr. 1954 - 2025 R.I.P. 2 138 12-31
130345 [왓챠바낭] 우편배달부 말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잡담입니다 12 267 12-31
130344 [넷플] 말 많고 탈 많은 '대홍수' 드디어 봤습니다 14 453 12-30
130343 [반말주의] 다들 올해 고생 많았어!! 새해 모두 건강하고 복 터지길 바래!! 12 186 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