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은 어디다가 토로할 길 없는 사회

발화의 형태가 제한된다는 생각 해본 적 없으세요?

전 서울에 들어와서 몇 년 간 한탄, 토로, 뒷담이라는 대화형식에는 매우 익숙해졌지만 어디서도 자기 자랑을 편안하게 해본 적이 없어요. "자기 자랑"이라고 광범위하게 말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나에게 일어난 좋은 일을 욕 먹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없이 발설해 본 적이 없어요.

첫번째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획일화되다 보니까 친구인 동시에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경쟁하는 경쟁자들에 되고, 나에게 일어난 좋은 일은 그들의 기회가 하나 닫힌 결과가 되더라구요. 빤한 바닥에서 나는 교환학생이 되고 쟤는 안됐다면? 입을 다무는 것이 미덕입니다.
그렇게 멀리까지 갈 것도 없이, 같은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상태의 매일매일의 대화에서 "나 오늘 공부 완전 잘 돼"-> 재수 없음.
"나 왜 이렇게 진도에 뒤쳐졌지ㅠㅠ" ->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발언임.
그래서 결국 여러명이 안전하게 하는 대화들을 모두 모아놓으면 일이 잘 안 풀린다, 힘들다, 어렵다, 나는 망했다 이런 류의 네거티브 발화만 남더라고요. 기운이 나는 밝은 대화는 어디로......


두 번째로, 잣대가 획일화가 되다 보니까 만인이 동일한 평면도 아니고 선 위에 한 줄로 선 모양새가 되어 버려서 나에게 일어난 좋은 일을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나 이번주에 고백 두 번 받았어" -> 자랑, 지난 육개월간 별 건수 없었던 나와 비교하니 재수없음. "나 모태솔로로 죽을거 같아 ㅜㅜ" -> 불쌍한 친구, 토닥토닥. 결국에는 다들 연애 못한다고 울부짖는 대화들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두 다 힘들다고 아우성치는 대화들은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꽤 진이 빠지지 않습니까. 심지어 이런 대화들은 진짜로 힘들어서 하는 말들도 아닙니다. 그냥사회적으로 할 말이 없으니까 그 빈공간을 공감으로 채워넣기 위해 만드는 말이죠. (제가 우울증으로 힘들어 했을 적에는 혹시나 나올 네거티브 피드백이 무서워서 남한테는 입 한번 옴쭉달싹을 못 했습니다. 혹여나 친구가 "뭐 그런거 가지고 징징대?" 라고 대답했을 때 석달 열흘을 자리보전하고 누워있을 걸 제가 알았거든요.) 정말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가야 할 자원을 빨아갑니다.

게다가 사람인지라 허영심도 있고 나에게 일어난 좋은 일도 자랑하고 싶고요. 전 자랑할 데가 없다 보니까 원래 소원했던 부모님이랑 친해지는 부작용(side-effect)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제 자랑을 고까워하지 않고 들어줄만한 사람이 가족밖에 없더라고요.


그러니까 빈 공간을 (정말 힘들어서 하는 한탄이 아닌 불필요한, '지호자야'같은) 불평불만으로 채우는 대신에 평소에 못 했던 자기 자랑으로 채우는 거 어때요?

저는 대학원 두 번째 학기인데 성적이 무지 많이 (4.3 만점에 1.02) 올랐습니다. 성적에 민감한 곳인데다가 친한 친구들이 이번 학기에 많이들 떨어져서 엄마아빠 빼고는 처음 얘기해 봅니다.
에이쁠 찍힌 성적표 보니 삼일 밤낮을 밥을 안먹어도 배가 부르더라구요.

이인님 재취업을 축하드리며 우리 모두 자기 자랑 하나씩 해 봅시다.
    • 자랑이라, 오늘은 별로 없는데요.전 오늘 고객센터 직원에게 상담을 요청했는데 문의사항 해명 잘 듣고 "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했더니 그 분이 업무에 찌든 분인지 혹은 신입이라 순수하신 분인지 되게 당황하며 "아니에요. 뭘요" 하면서 부끄러워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자랑보다는 좀 짠한 내용이군요. 아무튼 전 오늘 만나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했고 사람들도 제게 친절하게 해줘서 어제보다 기분이 좋습니다.
      • 좋은데요ㅋㅋ 공적인 질서가 (좋은 쪽으로) 무너질 때 오는 쾌감이 약간 있는거 같아요. 

    • 자랑을 들어줄만큼 친한 사이는 원래 소수인게 정상 아닌가요.


      하물며 학우들한테 성적자랑은 당연히(?) 못하는거 아닌가싶습니다.


      사실 이건 자랑 뿐만 아니라 한탄도 마찬가지에요. 자랑이 데미지가 상대한테 간다면, 힘든거를 어설프게 친한사람에게 얘기했다가는 내가 다치게 되죠.


      자기 얘기를 나눌수 있는사람이 많다는게 이상한거에요.




      저는 오늘 1분차이로 지각을 면하고 월급도둑질중입니다.



      • 1분! 아니 이제는 새벽인데 아직도 근무하세요? 지금 시차가 나는 땅에 있다고 말해주세요....




        저는 그 자랑/한탄의 교집합?이 점점 줄어들게 되더라구요.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의 원도, 한탄할 수 있는 사람의 원도 점점 줄어드는건 맞는데,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의 원이 더욱 급속하게 줄어듭니다. 정말 가족 + 베프 정도밖에 안 남았어요. 저 인간관계 꽤 좋은 편인데(큰맘먹고 하는 자랑ㅋㅋ 평소 같으면 같은 말을 쓰더라도 '나쁘지 않은 편인데'라고 에둘러서 썼겠지요) 학부 때랑 많이 다르더라구요. 


        한탄은 뭐라고 해야 하지? 정말로 힘들지 않으면서 친하지 않은 사이에서도 인사치레로 하는 한탄을 이르는 말이에요. "아 상사 정말 짜증나"라던가. "에어컨 안나와 더워" 라던가. 사실은 괜찮으면서. 

    • 오프에선 욕먹을까봐 말못하는데 사실 제 외모에 상당히 만족합니다.
      • 그죠. 욕먹을까봐 차마 말 못하지만.. 


        근데 잘생기고 예쁜 사람이 자기 외모에 만족하는 건 당연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만족하는 건 사회적으로 장려해줘야 하는 일 아닙니까! 전자면 재수없다고 욕먹고 후자면 미쳤다고 욕먹죠. 왜 사회의 미세단위? 최저단위에서 일어나는 대화와 감정의 교류는 사회전체적으로 장려되어야 하는 방향과 다르게 일어나는 걸까요.




        저도 제가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객관적으로 많이 예쁜 건 아니니까 남한테 차마 얘기는 못해요...

    • 저도 자랑해도 내 일처럼 기뻐해주고, 푸념해도 내 일처럼 조언해줄 사람들에게만 이야기 합니다... 친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자랑이 고까울일없고, 푸념이 성가실일 없죠.  제 얘길 잘 안하는 편이라 더 그런가 봅니다.

    • 아이고... 뜬금없이 막줄에 저격맞아서 감사감사 합니다


      성적 쾌락을 느끼시는군요 (응?)


      사실 저는 자랑 목적 보다는 게시판 분위기 변화가 더 컸지만..

    • 부모님 돌아가시고 제일 슬픈 일이 그거라고 하더라고요 내 자랑 진심으로 기쁘게 들어줄 사람이 더 이상 없다는거..
      • 이거 너무 슬픈데요. 늙으신 부모님 살아계신데 자랑할 게 없는 것도 슬프답니다.
    • 제가 여길 떠날게 아니라면 자랑은 도저히..

      무서운 학습효과

      이러고 은근하게 다 합니다.남들이 눈치채는줄도 모르고.
    • 친구들 사이에서 평판이 좀 많이 좋습니다.




      참을성이 좋고, 눈치가 지금까지 만난 제 나이대 사람들 누구보다도 좋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 유독 동북아시아인의 기질이 타문화권보다 질투가 강하다는 인상을 종종 받았었는데..원인이 유교문화때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고..일본의 가학적 조직문화때문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고..유전자의 문제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고..토착민들의 생존방식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고..


      제 자랑은..어제 밤 잘 잤다는거..

    • 다욧으로 10정도 빼고 쉬는중인데 야식에 술 먹어도 유지됩니다. 일주일 쉬었다가 2차로 또 해야죠
    • 누가 뭐래도 전 예쁘고 몸매 좋아요. ...주관적이며 제 개인적인 의견인데다 증명할 방법도 없으니 이렇게 써도 되겠죠? 헤헤.

    • 자랑은 진짜 식구들한테나 그것도 형제 자매 말고 부모한테나 하는 거더군요.


      특히 애들 자랑은.


      인터넷에서는 자기 자신의 찌질한 얘기를 꼭 넣어야 공감지수 상승하죠. 


      오히려 행복도가 높아질거예요. 남 찌질한 일 한 얘기들으면..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하면서.

    • 이런 의견 굉장히 반갑고 좋네요. 정말 저도 객관적 지표가 어떻든 제 모습을 사랑하고, 사랑받느라 행복하거든요.


      성장기를 끔찍하게 겪어서 보상을 해주는지, 어려운 와중에도 일일 술술 잘 풀리네요.  


      그러면서도 행복함을 숨기려고 자기검열 할 때가 더 많아요. 연인, 가족, 정말 가까운 친구 한 두명을 제외하면 언제나.


      한편으로는 검열할 필요 없지 않나, 당당히 행복하면 어디 뭐 죄가 되나 싶어서 용기내보곤 하는데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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