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pg 얘기가 나온 김에...
껍질인간의 글 몇 개를 읽어봤는데 제 개인적인 느낌은 절반 정도 동조입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RPG 장르의 폭을 지나치게 좁게 잡고, 나머지 게임들은 모두 쓰레기라 몰아붙이는 건 좀 너무 나갔다 싶긴 한데 선호하는 게임에선 제 취향과 비슷한 부분이 꽤 많군요.
특히 폴아웃 3에 대한 비판은 매우 동감. 죽어가던 폴아웃 시리즈를 성공적으로 되살린 공로가 있기에 까방권을 얻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아웃 3는 까야겠어요.
폴아웃은 오픈월드의 흥미로운 세계관과 다양한 사이드 퀘스트를 가진 매력적인 게임이었습니다.
하지만 메인퀘스트의 일방향적 요소와 특히 엔딩만큼은 까여도 할 말이 없어요.
폴아웃 3에서 주인공이 그동안 어떻게 살았던, 어떤 선택을 해왔던 결말에서의 선택은 단 두가지입니다. 치명적인 방사능으로 가득찬 실험실에 홀로 들어가 폭탄 해제코드를 입력한 뒤 희생하거나, 아니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난이도로)팔라딘 사라를 설득해 그녀가 대신 희생하도록 만드는거죠. 게임 내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범죄만 저지르던 천하의 개쌍놈이었다해도, 마지막에 엔딩을 보기 위해선 결국 인류를 구원하는 영웅으로 죽어야 하는 겁니다. 게이머가 그동안 구축해온 캐릭터의 성격과 선택을 모조리 헛되게 만드는 엔딩이죠. 게다가 이게 더 웃기는 건, 사실 주인공 대신 폭탄을 해체할 수 있는 인간(아니 정확히 따지면 인간이 아닌)들이 버젓이 있다는 겁니다. 방사능에 100% 면역인 구울과 슈퍼 뮤턴트 동료가 그들이죠. 폭탄 해체가 어려운 것도 아닌 숫자 코드 몇 개 누르면 끝나는 거고, 구울이나 슈퍼 뮤턴트는 아무런 피해도 없이 방사능 속으로 걸어들어가 버튼을 누르고 나올 수 있는데도 굳이 인간인 주인공이 들어가 폭탄을 해체하고 죽어야 합니다. 그동안 게임이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릴만큼 형편없는 일방향 진행과 엔딩이었죠.
그리고 자유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진 서양식 rpg 중에서도 적어도 메인퀘스트와 엔딩만큼은 매우 일방향적인 경우가 꽤 있습니다. 발더스 게이트에서도 주인공이 선한 팔라딘이든 아니면 극악무도한 개자식이든 결국 마지막엔 바알을 쓰러뜨리고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는 건 바뀌지 않죠. 엘더스크롤 : 스카이림 역시 메인퀘스트는 매우 선형적이고요. 또, 서브퀘스트와의 연계도 부족해, 팩션 서브퀘스트로 얼마나 큰 명성을 쌓고 얼마나 많은 세력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든 -심지어 마법길드의 길드마스터이자, 도둑길드의 마스터이자, 스카이림 최강의 용병단 컴패니언의 인도자이자, 암살단 다크 브라더후드를 이끄는 리스너라 해도 - 마지막 세상의 운명을 건 드래곤과의 전투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롯이 혼자 해결해야 하고요. 이 중에서도 폴아웃 3와 함께 최악이라 회자될만한 건 매스 이펙트인데, 우주적 규모의 트릴로지를 거치며 게이머가 얼마나 고생하고 그 결과 얼마나 많은 종족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거나 적으로 돌렸든, 마지막 순간 게이머가 고를 수 있는 것은 삼색똥 뿐입니다. 그 동안 게이머의 모든 노력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헛짓거리로 만들어버린 엔딩이죠.
그리고 이런 면에서 주목해볼만한 게임이 있는데, 껍질인간도 호평하고 저도 최고로 꼽는 게임 '폴아웃 : 뉴 베가스'입니다.
폴아웃 : 뉴 베가스(이하 뉴 베가스)에서는 '팩션(세력)'이란 요소가 두드러집니다. 크게는 인류재건이란 거창한 이상을 위해 모하비 황무지까지 진격해 자유도시 뉴 베가스를 자신의 세력하에 넣으려는 NCR, 약육강식과 노예제를 옹호하며 모하비 황무지를 지배하려는 시저의 군단, 로봇 군단의 힘으로 뉴 베가스를 끝까지 자신의 지배를 따르는 자유중립도시로 남기려는 미스터 하우스 등 3개의 세력이 위태로운 균형을 유지하며 서로를 견제하고 있고, NCR과 오래된 원한이 있으며 군단과의 동맹을 모색하는 그레이트 칸, NCR과의 헬리오스 원 전투에서 패배 뒤 고립되어 존폐 기로에 놓인 브라더후드, 특정세력에 휘말리지 않고 그저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돕기 위해 노력하는 아포칼립스의 추종자들, 엄청난 무기들이 쌓여있는 넬리스 공군기지를 차지한 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부머 등 마이너 세력들도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그리고 게이머가 수행하는 많은 서브 퀘스트와 세력 퀘스트, 플레이어의 성향 등에 따라 각각의 세력간의 균형, 각 세력에서의 플레이어에 대한 평판은 수시로 바뀌게 돼며 이는 메인 퀘스트와 엔딩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예를 들어 부머를 플레이어 편으로 포섭하면 마지막 전투에서 부머의 폭격지원을 받을 수 있고, NCR도 군단도 아닌 제3세력을 택한 경우 최종전투에서 로봇군단의 도움을 받아 NCR 및 군단 세력과 모두 싸워야 하죠. 달성해야 할 궁극의 목표나 물리쳐야 할 거대한 위협이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세력을 돕거나 방해함으로써 전쟁의 흐름을 바꾸고 그로 인한 세계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거죠.
마지막전투에서도 편을 선택할 수 있고, 또 이 선택은 막판에 대화문 몇 개 골라 결정된 것이 아니라 일련의 퀘스트를 거치며 그 세력과의 관계가 누적된 결과라는 점에서, 뉴 베가스의 비선형성은 두드러집니다. 게이머에게 최대한 선택의 자유를 주며, 그 선택은 다른 요소와 상호작용한다는 rpg의 기본 원칙이 매우 잘 지켜지고 있죠. 게이머는 거의 모든 선택을 할 수 있고 , 어떤 방향으로든 엔딩에 도달할 수 있지만 분명 그에 따른 대가가 뒤따르며 세계에는 게이머가 남긴 흔적이 고스란히 남게 됩니다. 말 그대로 '자유에는 책임이 뒤따르는' 게임이죠.
정말로 매력적인 게임입니다. 자유도와 흥미 면에서 2000년대 이후의 RPG 중 단연 최고로 꼽을만 하죠. 오늘 RPG 관련 글들에 흥미가 동하신 분 중 아직 안 해보신 분이 있다면 꼭 추천하는 게입입니다.
폴아웃 3의 메인퀘스트는 정말 병맛 중의 병맛이라고 까도 모자랄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그야말로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는 거다!!!' 스카이림도 여기저기서 황당함이 폭발하는지라 엇비슷한 수준이고...이러니저러니해도 재밌게 즐기긴 했습니다만.
그런데 자유도 하니까 생각나는 게, 다지선다형이 아닌 주관식 플롯전개란 게 게임이란 매체 내에서 성립 가능합니까? 어느 글을 보니 '이건 자유도가 아니라 남의 카드 보고 찍는 다지선다에 불과하다. 옛날 서양rpg는 주관식이었는데..'라는 말이 있던데 아무리 자유도가 높아도 프로그래머가 미리 코딩해둔 것 이외의 행위를 할 수는 없잖습니까. 제가 오독을 한 건지...
제가 프로그래밍이나 게임에 깊이 아는 건 아니니 확신할 순 없지만 주관식 플롯 전개라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해요. 껍질인간이 매우 기대하는 '웨이스트랜드 2'조차 당장을 위해 농업지역을 구할 것인지 아니면 미래를 위해 연구센터를 구할 것인지 중 선택하는 거지 나는 둘 다 생까겠다거나 팀을 반으로 쪼개 두 곳 모두 구한다고 할 순 없는걸요. 그래픽이라는 요소조차 없이 게이머가 행동을 입력하면 그 반응이 도트프린터로 프린트되어 나오던(...), pc가 보급되기도 전의 게임부터 최신 rpg까지 플레이어의 모든 선택은 다지선다일 뿐 주관식은 아닙니다. 던전마스터 류의 rpg는 주관식 플롯이 아니라 애초에 플롯 자체가 없이 세계만 딸랑 던져준 채 플레이어에게 알아서 놀으라는 경우고요.
다만, 발더스 게이트 등 바이오웨어 rpg들이 '남의 카드 보고 찍는 다지선다'라는 것에 대해서는 약간 공감. 아무리 자유도가 높은 rpg라도 결국 다지선다라는 건 똑같지만, 바이오웨어는 굉장히 좋은 스토리 라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선택은 너무 쉽습니다. 예를 들어 폴아웃 : 뉴 베가스에서는 플레이어의 의도와 그 결과가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당황스러울 때도 있고, 또 더욱 신중한 판단을 요할 때도 있습니다. 게임 내내 궁극의 선으로 플레이하고, 최종전투에서도 그나마 가장 선 성향인 NCR을 도와 엔딩까지 봤건만, 그 결과 모하비 지역 대부분의 상인들은 NCR의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고, 마을 중 하나였던 노박(Novac)은 패퇴중이던 군단의 습격으로 폐허가 되고, 뉴 베가스 세계관에서 가장 선한 집단인 아포칼립스의 추종자들은 NCR의 등쌀에 밀려 뉴 베가스를 벗어나 그레이트 칸과 합류하는 뜻밖의 결과를 마주했을 때는 망연자실하기까지 하더군요. 물론 군단을 도운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결과지만, 선의로 행해진 제 선택이 누군가에겐 재앙이 돼버린 거죠. 하지만 거의 모든 바이오웨어 rpg에서는, 선한 의도를 가진 선택은 언제나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반대는 나쁜 결과를 가져옵니다. 결과가 너무 쉽게 예측되고 이는 상대의 패를 빤히 보고 있는 것과 다름없죠. 뭐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깨고 나서도 일말의 찝찝함이 남아있던 뉴 베가스와 달리, 바이오웨어 rpg에서는 멋진 스토리와 함께 제 선한 의도와 노력이 보답받았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그냥 취향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