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독도서관
조금 맘이 무거워서 매미 소리 들리는 나른한 여름날에 어울릴 예전 글 하나 재탕하고 갑니다.
중2 여름방학, 전 정독도서관의 독서교실에 다니게 되었어요.
인근 학교 중학생들이 모여서 도서관의 책들을 읽고 독서감상을 발표하고, 가끔 레크리에이션도 하고 하는 뭐, 그런 거였죠.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즉흥시인'을 인상깊게 읽은 기억이 나네요.
독서교실에서 같은 책상을 쓰는 6명 조에 인근 여중에서 온 중3 여학생 누나가 있었어요. 단아하고, 차분한 그런 여학생이었죠.
책보다 그 누나 얼굴을 훔쳐보는 시간이 점점 늘어만 갔어요.
서로 책 이야기를 나누곤 했지만, 항상 조금씩 서먹하더군요.
여름은 빨리도 지나고, 독서교실은 마지막날, 장기자랑 시간을 가졌어요. 뭐, 늘 그렇듯 썰렁 개그와 약장사가 난무했고. 그런데 언제나 주변에 사람들을 시끌벅적 몰고 다니던 나이키 잠바에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중3 형이 나와서 부른 노래는,
".... 기도하는!"
"꺄악~"
네, 용필이 오빠의 '비련'이었고, 장내는 광란의 분위기...
앵콜의 외침 속에 여유 있게 장내를 정리한 형은, '이번에는 노래 말고 춤을 잠깐 출께요." 하더니, 무슨 '젊음의 행진'에 나오는 '짝꿍' 류의 허슬/디스코 춤을 엉덩이를 흔들어대며 추기 시작하더군요.
옆눈으로 그 누나의 얼굴을 훔쳐보았는데, 그녀는 천박하게 눈동자가 하트 모양이 되어 있다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그냥, 조용히 웃고 있더군요.
저는 뭘 했냐구요?
다 한가지씩 해야 하는 분위기에서 어쩔 수 없이 끌려 나가서는,
머리가 하얗게 된 상태에서, 할 줄 아는 것은 없고. 몇 초 멍하니 서 있다가,
.....'시'를 암송했어요. 집에 굴러다니던 삼촌의 '세계의 명시선" 어쩌구 해적판 책에서 열심히 읽었던.
금빛 은빛 무늬 든
하늘의 수놓은 융단이
밤과 낮과 어스름의
푸르고 침침하고 검은 융단이 내게 있다면
그대의 발 밑에 깔아 드리련만
나 가난하여 오직 꿈만을 가졌기에
그대 발 밑에 내 꿈을 깔았으니
사뿐이 걸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하늘의 융단,
W. B.예이츠
.......네, "기도하는!" "꺄아~" 다음에 말이죠.
그래도 당시의 중학생들은 스파르타식 교육때문인지, 쉽게 누굴 구타하거나 하진 않더군요.
얼굴이 빨개져서 들어와 앉은 전, 그 누나를 흘깃 훔쳐보았어요.
그녀는 깔깔대거나 수다 떨고 있는 여학생들 틈에서 왠지 진지한 표정으로 제 쪽을 쳐다보고 있더군요.
저는 가슴이 뛰고 머리가 멍했어요.
모든 행사가 끝나고 다들 작별인사를 나눈 후 집으로 가는데,
골목길 많은 효자동의 길모퉁이에서 괜히 서서 실은 그 누나를 기다렸어요.
마주쳐봐야 잘 가라고 인사나 한번 더 했겠지만...
한참만에 나타난 누나는 동행이 있더군요. 예상하셨겠지만, "기도하는!".
얼른 숨어서 지켜보는데, 둘은 원래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 사이 같았어요.
약간 구강 돌출형의 "기도하는!"은 계속 오두방정을 떨어대며 수다를 떨고 있었고,
조용한 누나는 미소를 띤 채 그 수다를 들어주며 걷고 있더군요.
....홀로 돌아가는 골목길에 개똥은 왜 이렇게 많은지.
젠장. 시청은 세금으로 다 뭐하는 거람.
그날밤, 레넌의 'Girl'을 백만번 들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러게요..그게 기억이 안 나니 묘한 일이죠. 우르르 합창 같은 것 하는데 구석에 있었던 것도 같고.
영화 같은 이야기네요..
따져보니 83년이네요. 자율화 첫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