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초록의 아파트

길을 가다가 항상 발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바라보곤 하는 건물이 있습니다. 한 두번도 아니고 그 길을 지날때는 늘 같은 현상이 일어나요.


차도 많이 다니고 빌딩도 우뚝 선 서울의 도심에 뭔가 생뚱맞은 느낌으로 앉아 있는 그 건물을 보면 어떤 데자뷰 같기도 하고 나른한 오후에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난후에 느끼는 생소함 같기도 한 묘한 감정에 휩싸입니다. 저만 그런건지 다른 분들도 그런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고등학교때 수학 성적이 조금만 좋았더라면.. 아마도 건축을 전공했을 거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2때까지 이과였는데 고3 올라오는 겨울에 문과로 바꾼 사람이 전교에 두명인데.. 그중 하나가 저였거든요.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수학을 못했습니다. 그러고도 대학 간게 천운이라고 할 정도로. 생각해보면.. 그런 머리로 어떻게 건축을 하려고 했는지.. 의문이지만 지금도 건축에 관련된 책이나 글을 읽는 건 좋아합니다.


그런데.. 제가 늘 빠져드는 저 건물은 그렇게 건축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도 늘 그렇게 멍하니 쳐다보며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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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건물은 충정로에 위치한 충정 아파트라는 주상복합(?) 아파트입니다. 이 건물에 관심이 생겨서 검색해 보니 1937년에 지어진 최초의 아파트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세상에나.. 그러면 일제 시대잖아요. 이 건물이 세워지고 나서도 8년이 지나야 광복이 된 셈입니다. 하기야.. 교과서에서 배웠던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 라는 수필에도 낙엽을 태우면 갓 볶아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상류층의 부르조아들만 누리던 호사였겠지만 화신백화점에서는 갓볶아낸 커피를 팔고 있었겠고.. 그걸 내려 마실 정도로 이효석의 처지가 넉넉했다는 거겠죠. 그런 시대감각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아무튼.. 1937년에 지어진 충정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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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기에 낡고 허름하고 세월을 못이겨서 조금씩 내려앉으려는 기미가 보이는 이 아파트를 보고 있노라면 겪어온 세월만큼 쌓여있을 어떤 이야기가 생각날 것 같기도 하고 바래가는 초록색의 외관 자체도 우리나라보다는 다른 이국의 장소같은 느낌을 줍니다. 주민들이 싫어해서 이 아파트 내부까지 나와 있는 사진은 없는데.. 제가 예전에 잠깐 들어가 살까하고 들여다봤던 마포쪽의 쓰러져가는 아파트를 생각해 보면.. 아마 욕조도 타일로 마감한 옛날 물건이고.. 구조라던가 인테리어라던가.. 이런 개념은 전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 쓰러져가는 마포의 아파트에서도 느꼈던 묘한 편안함이랄까.. 정같은 게 이 아파트에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거참..


이 건물을 헐고 빌딩을 올려도 돈이 될 것이고 아예 새롭게 주상복합을 올리면 더 큰 돈이 될텐데 아직도 이 아파트가 버티고 서있는 까닭은 아마도 소유자들간의 이해관계 때문일겁니다. 너무 복잡해서 어디서 풀어야 할지 알수 없게 되어버린 그런 물건이 되어 버린 건 아닐지. 도심에는 의외로 그런 빌딩이며 주택이 꽤나 많더라구요. 하지만 그 덕분에 지나다닐때마다 아련하게 쳐다보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저같은 사람도 있으니 다행인가 싶기도 하고.


옛날 물건, 건물, 에전의 것들은 무조건 새롭고 반짝거리는 것으로 바꿔 나가는 이 거대 도시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물이 있다는 건 정말 불가사의 한 일이면서 재미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부디 100년 정도는 버텨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응원해 봅니다. 아니다.. 한 80년만이라도 버텨줬으면. 이제 3년만 더 버티면 되네요. 힘내라, 충정 아파트.


PS : 여기 사는 입주자들 만나서 사는 얘기 한번 들어보고 싶습니다. 아무 목적 없이.. 그냥 어떻게 사는지.. 진짜 궁금해서요.

      • 링크 잘봤습니다. 오래된 건물이니 사연이 없을리 없겠지만 참 드라마틱하네요.

    • 몇번 지나친 적 있는데 확실히 눈에 띄는 곳이죠.
      • 색감이 참 독특하더라구요.

    • 거꾸로 저는 건축을 전공하긴 했지만 건축을 업으로 살진 않네요. 하지만 저도 이런 글이 그냥 지나쳐지지 않는 거 보면 아직 미련이 남은 거겠죠. ㅎㅎ 독립문 맞은편 언덕배기에 있던 금화시범아파트였던가요? 서울 살 때 늘 근처를 지나다니며 그 낡은 건물을 쳐다보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질을 빚어 공간을 만들어내긴 하지만, 한 번 만들어진 공간이 시간을 거치고 나면 그건 이미 물질만의 이야기는 아니게 되지요.
      반가운 마음에 링크 두 개 드리고 갑니다.

      하나는 회현시범아파트 이야기,
      http://artemix.tistory.com/346

      그리고 이건 낡은 아파트를 주제로 작업한 정재호 작가 블로그예요.
      http://nardoldol.egloos.com/1913669
      • 기억이 희미한데 회현 시범 아파트는 식객에서 주인공인 성찬이가 살던 아파트의 모델로 등장하기도 했었던 것 같아요. 주신 링크 잘봤어요. 감사합니다. 만들어진 공간에 시간이 지나면 단순한 물질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데 깊이 공감합니다.

        • 영화 <귀여워>에서 기억나는 건 예지원이 출연했다는 거랑 황학동 삼일아파트가 배경이었다는 거 딱 두 개네요. ㅎㅎ

          • 일단 귀여워라는 영화를 본 몇안되는 관객으로써 동질감 느끼고요. 그러게요. 배우들보다 배경이 더 인상깊었다는 기억도 살짝 나고 그러네요.
    • 이 글도 그렇고 댓글에 소개된 이야기를 링크링크 타고 가다보니 저하고 취향맞는 분들도 이젠 꽤 많아졌네요. 서울의 저런 모습들 정말 좋아해요.

      • 인터넷 덕분에 같은 취향을 공유하기가 예전보다 훨씬 쉽지요.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그게 문제라는 생각도 들어요.

    • 서울은 워낙 지하철 이동권이라 이런 집들 보는 기회가 흔치 않은 거 같아요. 그래서 시간이 더 걸리고 멀리 돌아가더라도 육상 이동을 자주 하려고 합니다.


      저도 이 글에 회현시범아파트 얘기하고 싶었는데 위에 늘보만보님이 얘기해 주셨네요 ㅎ


      길을 나서면 오래된 집이나 허무는 집, 폐가들을 눈여겨 봅니다. 군산에서도 그런 멋집 집들이 많아서 정말 신나 했었어요. 통영, 부산 등지에 그림 벽화 등으로 일부러 치장하는 그런 모양새 말고 순순히 그 자체의 아우라들을 가지고 있는 모습들을 볼 때마다 감격스럽습니다. 


      서울에도 이런 건물이 많이 숨어 있을텐데 북촌, 서촌 탐방식의 책만 있고 이런 숨은 건물들의 이야기책은 없는건지 제가 발견을 못한 건지...이 소재로 책 나와도 좋을 거 같아요.


      3·1운동 소식을 전 세계로 알리고 독립 운동가들을 도왔다는 UPI 통신사 특파원 알버트 테일러(Albert Taylor)가 1923년 지은 주택,  ‘이상향’ ‘행복한 마음’이라는 뜻의 힌두어 ‘딜쿠샤' 건물도 문화재청과 관련 기관들이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이 역사적 건물을 관리하지 않아 내/외부 망가져 가는 상태도 안타까웠어요. 입주자분들은 기초생활수급받으며 일용직하시는 분들이라 참 복잡한 상황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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