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대화는 죄다 '홍상수 영화'스러워서 '홍상수 영화'를 좋아합니다.


얼마전 사람들의 대화를 회의록으로 작성하거나 녹취할 일이 좀 있었습니다.
그 녹취록을 컴퓨터로 정리하다보니 참으로 홍상수 영화 스럽더군요.

 

일반적인 드라마나 연극의 정형화된 대화들은 조리가 있고 맥락이 있습니다.
물어본 말에는 그에 맞는 대답을 하고, 말을 많이 끊거나 중언부언하지도 않습니다.

 

홍상수 영화의 대화, 특히 술자리의 대화는 서로 하고 싶은 말을 합니다.
딴소리도 하고, 사람들간에 왜 저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말을 내뱉습니다.
화제의 전환도 생뚱맞습니다. 왜 갑자기 저 소리를 하는거야??갑자기 왜 저게 생각났대??
그 와중에 무의식을 반영하는 헛소리나 의미심장한 말실수(프로이트가 보면 좋아할만한)를 합니다.
대화는 대개 주제가 없고, 자기 자랑이 섞이거나 서로의 입장만 재 확인하고, 대화를 통해
공감되거나 중요한 결론이 나오는 경우도 없습니다.
그래서 교수나 영화감독은 제 권위를 내세워 대화의 주도권을 잡으려 합니다.

 

현실도 이와 같더군요.
당최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아는 것만 늘어놓으며 잘난 척을 하기도 하고,
정말 진지하고 서로 공감하는 대화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와서 적어보니 우문현답, 동문서답, 모든 종류의 커뮤니케이션 장애를 다 볼 수 있었습니다.

 

 

홍상수 영화는 정말 보물입니다.

    • 전 교수 사회가 아닌데도 홍상수 영화 속의 술자리 대화는 정말 우리와 비슷하다라고 많이 느끼는 걸요.

      사실 다른 감독의 영화 속 대사 장면처럼 정말 필요한 말, 이치에 맞는 말만 하는 대화자리가 많나요?
      (앞 뒤 문맥 딱 맞고 이런거...술자리에서는...)

      전 홍상수 영화에서 약간 생뚱맞게 처리 되는게 진짜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어요.
    • ㅎㅎ 교수사회는 잘 모르지만...
      그런데 그래서 홍상수 영화를 어느샌가 안보게 되는 저같은 사람도 있어요.뛰어난 감독이 아니라는 얘기는 아니고요.
      홍상수 영화속 주요 인물들을 견디기가 어려워요.현실에서 그런 인물들-상대를 꼭 알아야 하고 나를 꼭 알아달라는 오지랖 넓은 사람들-을 같은 자리에서 마주친다면 능력(?)이 허락하는 내에서 1초가 아깝다고 최대한 도망가거든요.영화라는 안전장치(?)속에 있다해도 굳이 들어주고 싶지가 않아서요.영화의 구조적 재미에 감화되기 전에 일단 도망가는 거죠.
      제겐 대부분의 호러영화가 취향이 아닌 이유랑 같달까요?;;
    • 저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강원도의 힘, 오! 수정 이후에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못 보고 있어요. 세 작품 모두 재밌고 진지하게 잘 봤는데....그냥 그 이후부터는 못 보겠더라고요. 정확한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 저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어느 순간 홍상수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사람들이랑 하는 대화가 꼭 홍상수 영화 속의 대사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하면 할 수록 중언부언, 그러다가 결국 입을 다물고...ㅎ
    • 저부터도 말해놓고나서 '이건 너무 홍상수 영화 대사 같군' 할 때가 있어요.
    • <강원도의 힘>에서 남자 주인공이 교수들과 술자리를 갖는 씬의 대사들을 두고 홍상수의 지인이
      '내가 한 얘기 옮긴 거지?' 라고 그랬다는데 홍상수의 작업 방식을 염두하면 일리가 있는 얘기겠지만
      홍상수가 그 장면의 대본을 쓸 때 결백하게 자기가 만든 대사였다며 반박 했었다죠.
    • 홍상수 영화가 불편하게 생각되는 건 역시 우리의 일상이 여과없이 표현되기 때문이겠죠.
      영화에서 기대하는 건 일상으로부터 떨어진, 어떤 이상의 기대치 같은 것, 대리만족 같은 것이기 때문인데 말이죠.
      하지만 근래의 홍상수는 초기작보다는 굉장히 부드러워졌습니다.
      저는 밤과 낮 빼곤 홍상수 영화를 다 봤어요, 어떤 영화는 두번 세번씩 봅니다.
      그나저나 밤과 낮은 언제 어떻게 볼 수 있을런지... 개봉 때 놓친 게 참으로 뼈아프네요.
    • jim/<밤과 낮> 케이블에서 종종 하더군요. 늦은 시간에.
    • jim/ 저는 <밤과 낮>을 홍상수의 가장 걸작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밤과 낮> 이후의 영화들까지 다 포함했을 때 유난히 튀는 다른 축을 가진 영화였습니다.
      그 이후 대체 어떤 식으로 다른 축을 뻗어나가려는 것인가 싶은 기대를 가지고 다음 작품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
      를 봤다가 그런 맥락에서 좀 실망을 했지만요. 새로운 홍상수의 축은 좀더 시간을 갖고 기대해봐야겠습니다.
      - 홍상수가 매번 같은 얘기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차이와 반복-대구 의 구조와 형식을 갖고 있는 기존의 홍상수 영화 성질을 생각해봤을 때 <밤과 낮>은 그런 구조와 형식이 아닌 다른 게 꿈틀대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안타깝게도 dvd가 출시가 안돼니 어쩌다 스크린 아니면 볼 일이 없는데 이럴 바엔 차라리 유럽에서 출시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TV에서는 했었나요? - 라고 묻는데 바로 위에 러시님이 답해주셨군요.)
    • '옥희의영화'에서 정유미 말하는게 저랑 똑같더군요.
    • jim 님과 비슷한 감상! 길 가다가 듣는 소소한 대화 같은 것도 '후후, 홍상수 영화 속 인물들이 지나간 거 같애' 라고 생각할 때가 많아요. (앞뒤가 바뀐 거겠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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