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인동 박노수 가옥 다녀온 이야기(사진 없음)
그 왜, 이런류의 글에는 그럴싸한 사진이 같이 해야 구색이 맞을텐데 사진 재주가 없는 터라 아쉽습니다.
검색 조금만 하시면 솜씨있는 분들이 찍은 좋은 사진이 많이 나오니 궁금하신 분들은 찾아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요즘 뜨는 동네 서촌에서도 소위 핫플레이스 중의 하나지요.
과거 '고명하신' 친일파 거부 윤덕영의 저택인 벽수산장 근처에 딸을 위해 지은 2층 벽돌집인데
박노수 화백의 개인 거주 공간이라 저 집이 그렇다 카더라 말만 하고 지나가면서 담 너머로 멀리 바라보기만 했던 곳이었지요.
작년에 돌아가시고, 집이 미술관 형식으로 개방되었어요. 공식 명칭은 종로구립미술관
워낙에 유명한 곳이다보니 이미 다녀오신 분들도 많이 있겠습니다만 저는 기회가 안 되어 벼르고만 있다가 지난주말에 갔습니다.
마침 개방 일주년 행사 중이라 그런지, 날씨 좋은 가을 주말이라 나들이객이 많아서 그런지 건물 입구에 줄이 꽤 길게 서 있었습니다.
오래된 가옥이고, 가옥 자체도 의미가 있는 곳이라 건물 내 입장 인원을 15명으로 제한하고 있어서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1938년에 지어진 집으로 일본 양식이 혼합된 양옥이지요.
바닥은 반질반질하게 잘 관리된 나무고, 최근까지 거주용으로 쓰였던 흔적이 곳곳에 눈에 뜨입니다.
특히 고인이 작업실로 썼다는 2층 큰방에 일본 가옥의 형태대로 불단 흔적이 있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아무리 친일파라도 조선인이 살려고 지은 집에 불단이라. 일제 강점기 말기에 소위 내선일체가 얼만큼이나 이루어졌는가 짐작해볼 법 합니다.
아마 바닥도 처음 지을 때는 다다미였던 것을 후에 개조한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여닫이 문의 양식이며 퍽 일본풍이었거든요.
딸이 아마 혼자 살았던지,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구석구석 신경써서 잘 만든 테가 나더라고요.
부엌 옆에는 식품을 들이고 하인들이 드나들었을 법 한 뒷문도 있었고요.
견식이 짧아 박노수 화백의 이름은 전에 들어본 적이 없지만, 전시된 그림을 보니 아 이 그림! 싶었습니다.
한국화 중에서도 채색화를 주로 하신 듯 한데, 색 쓰는 게 아주 아름답더군요.
그림 볼 줄 모르는 문외한이지만, 이분의 눈에는 세상이 이렇게 보였겠구나 싶어서 좀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집 주변에는 고인의 수집품으로 보이는 돌확이며 분재며 수석 따위가 가득한데 정원은 가지 못하도록 막아놓았어요.
생전 수집품 중의 하나인 돌로 된 야외 테이블과 의자에는 앉아볼 수 있게 되어 있었는데 거기 잠시 앉아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고작 몇년 전만 해도 고인의 친구들이 놀러와서 이 테이블에서 고기도 구워먹고 담화도 나누고 했겠지
지금 우리는 이렇게 한갖 관람객이 되어서 구경을 할 뿐이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마침 건너편에 앉으신 나이 지긋하신 여성분들이 그런 말씀들을 나누고 계시더라고요.
간단한 인삿말을 나누며 이야기 들어보니 어려서 꼭 이 동네에서 함께 자라온 친구지간인데
그때는 여기 신박사라는 분이 살았고, 집도 훨씬 크고 넓었는데 형편이 안 좋아졌는지 뒷쪽 부지를 떼어서 팔고(지금은 전혀 다른 집이 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 집도 팔아서 그 뒤에 들어온 분이 박노수 화백이라고
그러면서 신박사 살 적에 맨날 지나가면서 높은 담장 너머를 궁금해 하기만 했는데 이렇게 개방했다고 하니 꼭 와보고 싶었다고
와서 보니 재밌고 속이 다 시원하다고도 하십니다.
신박사란 양반이 누군가 궁금해져서 슬쩍 검색을 해보니 감리교 목사고 사회사업가인 신흥우 박사를 말하는 것이더군요.
그러니까 윤덕영의 딸(이름은 누군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이 살던 집에 신흥우 박사가 살고, 그 뒤에 박노수 화백이 살고
어? 근데 연도가 안 맞습니다. 인터넷 정보만 가지고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신흥우 박사 사망이 1959년인데 박노수 화백이 이사온 게 1970년대 후반이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럼 그 사이에 살았던 사람이 하나 더 있는 셈이네요. 어쩌면 둘 더 있을 수도 있고.
(주소가 분명하니 등기 떼보면 알 수는 있을텐데 뭐 굳이 그렇게까지야)
아무튼 그렇게 여러 사람의 이름과 삶이 거쳐간 80년 다 된 벽돌집이 거기 있었습니다.
관람객이 많나요? 가보고 싶은데 요즘의 서촌이라면 사람이 많을 것 같고. 관람 분위기가 어떤지 궁금해요.
규모에 비하면 사람이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건물이 주는 분위기 때문인지 미술관이라는 특성 탓인지 관람 분위기는 조용조용하고 괜찮았어요. 실내는 특히나 15인 제한 덕분에 쾌적하게 둘러볼 수 있고요. 지금은 개관 1주년 기념으로 박노수 화백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데, 아마 상설전은 아닐 겁니다.
글을 읽고나니 한번 찾아가고픈 생각이 살풋 고개를 드네요. 오래된 건물에는 특유의 아우라가 있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그런 건물을 지어 살다가 자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건 역시나 지나친 욕심이겠지요. 시간도 돈도 노력도 너무 많이 드는 일이기는 합니다.
사진 많은 기행문보다 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어렸을 때 일제시대 때 지어진 집에 사는 친구 집에 간 적 있는데, 다락방이며, 집 실내 중앙에 있던 화장실이며, 특이했던 부엌이며, 신기하고 좋았던(?) 기억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