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있음] 인터스텔라
매번 후회하면서도 같은 일을 반복해서 안타까운 일이 많이 있지만, 영화를 보고 바로 감평을 작성 안한 것만큼 자주 후회하는 일은 별로 없을 겁니다. [인터스텔라]를 보면서 [그래비티]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떠올렸지만 기억나는게 많지 않더군요. 영화관에서 [그래비티]를 보러 갔을 때 심적으로 고통스러웠던 상황이었고 다 보고 나서 화장실에 들러 세수를 몇 번이나 하고 나왔는데 말이에요. 그래도 잊어버리는게 두려워서 경험을 피하는 건 미련한 일이겠죠. [나를 찾아줘]도 타이밍을 놓치니 도무지 쓸 수 없어져 버려서, 어떻게든 [인터스텔라]에 대한 평을 남겨봅니다.
식량부족에 직면한 지구라, 가능성은 반반입니다. 식량 전쟁과 관련된 교양서적은 09년도에 주식투자에서 빠져 나온 돈들이 선물투자로 흡수되면서 곡물시장을 뒤흔들고 난 다음에야 꽤 많이 나왔고, 그렇기에 그 전에 있었던 녹색혁명이 멜서스를 바보로 만든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최근의 기후협약이 어떻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교토 협정은 미국과 중국이 안 지키는 걸로 엉망이 되어 버렸다고 하고 코펜하겐에서는 얼마나 난리통이었는지 대부분의 책에서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죠. (그러니까 기후변화의 심화를 막는게 더 늦어질테고...) 어쨌거나, 최근 들어서 면적 대비 곡물 생산비율은 최대점을 찍었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아직 인구 증가는 최대치에 도달하지 않았으니, 인내심 게임이 되어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할 때까지 곡물 조달이 불균형 상태에서 저항없이 유지 될 것인가가 전쟁의 유무를 좌우할 꺼에요. 그런데 [인터스텔라]에서는 미국 농업이 큰 타격을 입고 있는데, 미국이 세계의 곡물 수출량 비중을 1위로 차지하고 있다는걸 고려할 때 매우 끔찍한 상황이란걸 알 수 있어요. 아마도 인듀어런스에 있던 수정란들은 힘깨나 쓰는 사람들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우주 산업이 급속하게 영향력을 잃어버리는 과정은 저의 윗세대가 확실하게 느꼈을 것이고, 저도 우주비행사가 꿈이었던 친구들이 많았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한 건담은 보지 않았지만, 여러 형태의 우주 콜로니를 나열하여 설명한 책들이 적어도 3권은 집에 있었고, (그 중 2권은 만화였죠) 결국에 인간은 우주로 나갈 수 밖에 없다는걸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최근의 하드코어(?) 우주 영화들이 맘에 들어요. 제가 신경쓰지 않아서 그런거지 우주산업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겠죠. 궤도 엘레베이터가 지어질지 가장 궁금합니다.
[인터스텔라]는 밀린 방학숙제하듯, 인류가 뒤늦게 망가진 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영화입니다. 지구 밖으로 나가는 비용은 질량 대비 엄청나게 비싸고, 가장 효율적인 선택은 수정란만 가지고 가서 완전히 새로 시작하는 거죠. 우주 관광을 하고 싶어 영화관에 갔지만, 짧은 시간에 주요 관광지를 다 돌아야만 하는 패키지 관광마냥 주인공들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영화는 삼 분의 일 정도는 우주 관광에 시간을 할애하긴 하지만 대부분을 인간 관계를 표현하는데 씁니다. 그리고 나머지라고 하긴 뭐한 삼분의 일 정도는 시간의 상대성을 다뤄요. 거의 동질한 시간대 즉, 1초에 빛이 일곱 바퀴 반을 돌 수 있는 지구 표면에 달라붙어 사는 인간들은 체감하기 어려운 그것 말이죠. 우리는 고작해야 태양이 우리를 비치는가 마는가 정도로 차이를 느끼지만 그건 위치의 문제잖아요. 그러니까, 우주 관광 때문에 [인터스텔라]를 보러가게 되면 저처럼 실망할 수가 있습니다. 행성 씬은 예고편에서 다 보여준 것과 다를바 없거든요. 차분히 우주를 보여주기에는 주인공들이 너무 바쁘고.
벨 에포크라는 말이 있더군요. 1860 ~ 1910년대 유럽의 "잘나가던 시절"이란 뜻으로 현재보다 과거에 한창 때가 존재한다는, 직선적 발전관을 부정하는 말이죠. 저에게도 지금부터 제가 죽을 때 쯤까지 100억명 정도가 함께 살,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던 시절]이 다른 식의 벨 에포크가 아닐까 싶어요. 인간이 많다고 해서 외로움이 덜어지는건 아니지만 앞으로 좋은 문화 모형(예컨대 아시아 모형과 유럽 모형, 영미 모형)을 선택하여 잘 살리지 않으면 이후 정말 외롭고 외로운 시대가 올 거 같거든요. 각자도생의 시대 말이에요. 개인비용이 많이 드는 우주에 가면 더 심하게 느낄 수 있겠죠. 현재 지구에서도 개인을 독립시킬 때까지의 비용이 늘어날수록 출산률이 줄어드는데, 우주 비용이 추가된다면 그건 도대체 얼마나 적은 인구만이 지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걸까요. (중력방정식은 예외로 하고. 그런데 그 식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간이 중력에 손을 댈 수 있다면 시간도 주물럭 거릴텐데 그럼 모든게 얼마나 바뀌게 되는건지...)
웜홀을 지날 때 딱히 조종할 게 없다는게 신경 쓰였는데, 적어도 수학적으로는 5차원 내지 13차원까지 계산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컴퓨팅으로 어느 정도는 위험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세부 조종이 가능했을 거 같은데 말이죠. 그런 것도 있었지만, 우주선이 마구 떨리는게 마치 어렸을 적 명절 맞아 시골가는 길에 자갈로 깔린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차 안이 생각나서 웃겼습니다. 뭘 어떻게 준비했길래 우주의 고속도로 같은 곳을 비포장도로 달리는 것마냥 불편하게 지나가야 된다니 웃기잖아요. ... 그동안에 대체 뭘 한겁니까!라고 하기엔 거기 나오는 선진 세대가 우리 또래죠. 후세대들에게, 허접해진 지구를 물려줘서 미안하다~~!라고 해야 할 판.
인류 구원이 졸속적인 과정을 통해 진행된다는건 별로 우습지 않죠. 위에서 이야기했던 코펜하겐 건만 봐도 말이에요. 뜨거워지는 물 속의 개구리 이야기는 거짓말이지만, 눈에 보이는 괴수가 나오진 않더라도 인류가 단결할만한 거대 과제를 실제 그러느냐 하면 상당 수의 붕괴한 문명을 보면 그런 일이 없었단 말이죠, 결과론이지만. (그럴싸한 이유들이 있는 것 말고) 적나라하고 일상적인 인류 쇠퇴 영화가 있다면 재미있게 봐줄 수 있을 텐데 안 나오려나요. 간단히 임신만 못하게 된다고 해도 인류 멸종 정도는 120년 내로 일어날 수 있죠. 대리모를 통해 개척지를 건설하겠다는 걸 보고, 대리모들이 참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도는 몰라도, 인간 복제를 다루는 걸 보면 그 때 쯤엔 중국에서 인공자궁을 만들지 않았을까 싶던데.
그래요. 빙글빙글 다른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만, 가장 가슴을 울린 부분은 우주에서의 고독함과 자기희생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위의 100억 인구가 벨 에포크라고 이야기해본건, 짜증날 정도로 인간이 많아서 인류로서 지구에서는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다는 거였죠. 그런데 우주 전체를 놓고 인구 밀도를 따져보면 7억7천5백 광년당 1명이니 얼마나 적어요. 참고로 우리 은하의 지름은 10만 광년, 두께는 1만 광년 정도 되는데 인간이 우주에 촘촘히 퍼져 있다고 하면 대략 2명 정도 살면 되겠군요. 우리 은하에 2000억 개의 별이 있다고 하니 한 명당 1000억 개씩 가지면 이야, 별 부자네요. (다 대충 계산한거라 왕창 틀릴 수도 있어요.) 과연 엄청나게 먼 곳에 혼자 가서 실패하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버튼을 누를 수 있을까요. 후, 저럴 때를 위해서라도 로봇공학을 빨리 발전 시켜놓을 필요가 있겠어요.
[라마]를 읽으면서 장편 소설을 읽는 재미와 도킹이 엄청나게 빡세다는걸 배웠는데 이렇게 재미나게 도킹 장면을 만들 줄이야. 만 박사는 도무지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더랍니다. 곧 죽어도 지구에 돌아가겠다는 건지, 12개 항성 중 다른 곳을 들러보겠다는건지. 나눠가질 보물도 없는데 사람을 줄일 이유는 뭐랍니까. 전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제 뇌 사실 분?... 이라 하기엔 제가 봐야 되서.. 여튼, 이런 공학적인 우주 영화가 나올 때마다 즐겁네요.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이런 영화를 볼 때 살아 있길 잘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 뭐 [갤럭시 오브 가디언즈] 같은 것도 나쁘진 않지만 이 쪽 비중이 더 많아졌으면 해요.
P.S. 드디어 스포 있는 다른 분들의 인터스텔라 감평을 읽고 있는데, 천체 설정의 오류를 잔뜩 다루고 있군요. 크흑, 사실 그래요. 관객을 위해서 놀이터에 블랙홀도 가져다 놓고 몹쓸 조건의 행성들을 잔뜩 풀어놓은거 아니겠습니까. 말도 안되는 대기권 이탈속도라던가.
키드_ 전혀 모르는 상태로 다시 즐기고 싶다는 의미요.
12명의 과학자/탐험가를 보내서 12개의 행성을 조사하고 조사결과를 보낸뒤에는 인공수면에 들어가서 구조대(겸 선발대)가 오기를 기다린다는 계획이었습니다만, 12명의 대원들 모두 자신이 탐사한 행성이 거주불능일 경우 구조대가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죠. 만 박사는 가족도 없고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는 어느정도의 희생이 필요하다면서 나머지 11명을 설득한 인물이었다는 설명이 나왔었고요.
그런데 정작 만 박사는 자신이 고른 행성이 거주불능이라는 것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다른 행성'을 조사하려고 했죠. 지구로 돌아가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가라_ 아, 나머지 행성으로 이동하려고 한다면 행동의 일부분이 이해가 되네요. 쿠퍼를 살려놓는다면 지구로 돌아가버릴까봐 그런 거였군요. 꼼짝없이 추운 곳에서 죽느니 한 번 더 다른 곳을 살펴보겠다(아니면 적어도 사람들이 자기를 구하러 오기는 할거다) 이 이야기였네요. 그렇다면 로밀리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죽은건지...
냉정하게 생각하자면, 영화 전체에서 탐사를 통해 해낸건 정착이 아닌 특이점 조사를 통한 중력방정식 완성이었고 아무래도 그게 대기권 이탈 비용을 감소시켜서 대규모로 우주 진출이 가능해졌다 이런 이야기가 되는 것 같은데. 생각할수록 뭔가 찝찝해요. 지구를 버리고 다른 행성에 정착할만한 기술수준은 되지만 지구를 복구시키는 기술수준은 안되는 미묘한 구간은 어디인건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안좋은 행성은 테라포밍해야 할텐데 그게 지구나 화성을 테라포밍하는 것과 뭐가 다른건지. 보니까 냉동수면은 안정기에 다다랐던데 화성 가면서 좀 자고, 화성 테라포밍하면서 또 자고 하면 안되나 싶더군요. 또 (중력방정식이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 모르겠지만) 우주에서 농사지을 능력 있으면 지구 궤도에다가 올려서 지으면 되잖아요. ... 이런 쪽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