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도킨스의 강연에 갔었습니다.
정확하게는 강연이 아니고 대담이었습니다.
강연이면 더 좋았을텐데 토크쇼 진행하는 진행자가 너무 말이 많아서 마음에 안 들었어요.
게다가 진행자의 소개 멘트도 뭔가 좀 '위대하신 영도자..' 분위기가 풍겨서 이건 뭐 또다른 컬트집단인가 했습니다. 그 짓 하지 말자는 게 도킨스 주장인데 등장하기도 전에 기립박수 치고 있는 이 사람들은 개종하기 이전에 광신자였을 것 같다는 무서운 생각도 약 0.5초간 들었습니다.
저는 도킨스의 과학적 성취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고 최근의 전투적 무신론자의 행보에는 크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이상의 연구 활동을 안 한다는 것에 오히려 아쉬움이 많아요.
그렇지만 이미 충분한 성과와 업적을 쌓은 사람으로서 그것을 정치적(?)인 활동으로 연결시켜 사회 개혁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존경할 만한 일이라고 봅니다. 아무나 그렇게 용감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게 아니죠.
문제가 된 트위터 얘기도 잠깐 했는데 주의해서 사용해야겠다는 교과서 같은 말을 했고요.
앞뒤 맥락이 끊긴 채 돌아다니는 트위터 멘션은 자기 자신에게 답장을 하면서 번호였나 뭔가를 지우면 관련된 트윗이 모두 딸린 채로 리트윗된다는 기술적 팁도 주더군요. 전 트위터 사용자가 아니라서 무슨 얘긴지 잘 못알아 들었습니다.
질문과 답변은 뭐 그닥 흥미로운 얘기는 없었는데
누군가가 신변의 위협을 느낀 적 없냐고 묻자 너무도 짧고 확신에 찬 태도로 'No'하고는 더 이상의 언급도 없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더군요.
끝나고 책에 싸인 받는 순서가 있다고 해서 저도 줄을 섰습니다. (누구 싸인 받으려고 줄 서 본 건 처음임)
애인님이 혹시나 그런 거 있을 수도 있으니 책 가져 오라고 해서 저도 혹시나 하는 태도로 한 권 가져 갔었거든요.
원래는 제 인생의 책인 '이기적인 유전자'를 가져가려고 했는데 출발 5 분전에 아무리 찾아도 그 책이 안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을유문화사의 '확장된 표현형'을 가져갔습니다.
너무 바쁘신 분이라 자기 이름만 적어주고 일인당 두 권 이상은 안되고 또 당연하게도 도킨스의 책만 된다고 진행자측이 공지를 합니다.
게다가 싸인 받을 페이지 펼쳐서 가져오라고.
덕분에 책에 싸인 받는데 많이 기다리지는 않았습니다.
정말로 기계적으로 이름만 싸인하고 다음! 하고 넘어가는 게 좀 안쓰럽기까지 했습니다. 연세도 많으신데.
하여간 제 차례가 와서 책을 내밀었더니 혼란스런 표정으로 한 참을 쳐다보는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장에서 파는 최근 저서들을 그 자리에서 바로 구입해서 싸인을 받았는데
제가 가져간 책은 한국어판이었는데다가 본인의 저서 중에 가장 덜(?) 유명한…것으로 추정되는 책
그래도 제목이 영어로 워터마크처럼 큼직하게 적혀 있어서 논란은 없었어요.
아마 '내가 이런 책을 썼었던가?' 아니면 '아싸, 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된 건 오늘 처음 보네.' 둘 중의 하나를 생각했을 거예요.
한참을 훑어보더니 'Korean?'하고 묻습니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웃으면서 즐겁게 싸인을 해줍니다.
무슨 공항 입국 심사 받는 것 같았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책 끝까지 못 읽었습니다. 번역이 너무 안습이라 몇 번 시도하며 고전하다가 중단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못 버리고 계속 시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도킨스의 저서 어딘가에서 자신이 가장 아끼는(잘 쓴? 정확한 표현이 기억이 안나네욤) 책이 확장된 표현형이라고 읽은 것 같아요. 고양이님은 인생 책에 사인을 못받아서 어떠실지 모르지만 도킨스는 어쩌면 더 뿌듯했을지도!
그나저나 부럽네요. 부러워요. 부럽습니다. 흠.
그렇다면 저의 첫 번째 가정(내가 이런 책을 썼었던가?)은 명백하게 오류였네요.
아 저는 도킨스의 책은 읽기 힘듭니다.페이지가 잘 넘어가질 않아요. 번역문제일까요, 이사람의 문체가 문제일까요. 제가 문제겠죠. 킁-
번역문제에 500원 겁니다.
그나저나 양자고양이님 진짜 부럽습니다 ㅜㅜ
와 오늘 본 글 중에 제일 부러운 글입니다.
여러분들 부러워하지 마세요. 정말로 이름만 간결하게 적어준 거라 어디가서 친필 싸인본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입니다.
다만 줄서서 기계적으로 싸인받던 많은 사람들 중에 제가 그 사람의 주의를 조금이라도 끌었다는 것은 사실이예요.
우와 한글을 아는 건가요? 저는 이기적인 유전자만 읽어봤는데 퀴니님 말씀을 들으니 확장된 표현형도 읽어보고 싶군요.

인증샷, 웃는 사진이 완전 흔들려서 실망이었는데 인터넷에 올리려니 오히려 이 편이 안심이 되는군요.
와! 정말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