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유) 남자가 본 러브, 로지

어느덧 커플들의 1년중 최대 명절인 크리스마스 이브가 하루 앞으로 왔네요. 

옆구리가 허전한 것은 작년이나 올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남들 다 하는 연애, 이번에도 못한다고 생각하니 좀 억울한 마음이 드네요. 

실제 연애를 못한다면 가상의 연애를 하면서 잠시나마 기분 내는 것도 나쁘진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남자임에도 종종 로맨틱 코메디를 봅니다. 

잘 만든 로맨틱 코메디를 보면 정말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물론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을 나서면 비루한 현실로 돌아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요. 


괜찮은 로코가 있나 좀 찾아봅니다. 

커플들 때문에 사랑 영화가 넘쳐나야 할 거 같은데 쓸만한 영화가 별로 없네요. 

러브, 로지란 영화가 눈에 띕니다. 

주인공 릴리 콜린스가 예뻐 보이네요.

주인공의 뛰어난 외모는 로코에 몰입하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오늘은 이걸로 정했습니다. 평점이 그닥 좋은 것 같지는 않지만 괜찮습니다. 

로맨틱 코메디에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거든요. 


크리스마스 시즌에 쓸만한 로코가 없는 것이 역시 맞았는지

러브, 로지를 상영하는 극장과 시간대가 얼마 없는데도

자리가 꽉 차 있었어요. 생각보다 여자 혼자, 또는 여자끼리 온 분들도 많은 것 같구요. 

역시 로코는 여자들을 위한 장르임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영화 자체는 많이 실망스러웠습니다. 

저는 로코에 그리 많은 걸 바라지 않아요. 

근데 이야기가 너무 엉성해서 도저히 몰입이 되지 않더라구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워킹타이틀식 클리셰로 범벅이 된 로코라는 생각입니다. 


뭔가 부족하고 보잘것 없어보이지만 선량하고 선천적인 사랑스러움을 마구 뿜어대는 주인공

언제나 주인공을 보듬어주고 인생의 나아갈 길을 알려주는 현명하고 사려깊은 부모님

생각이란 걸 안 하고 사는 것 같지만 주인공을 항상 위해주는 개그 담당의 가까운 형제자매

자기 생활이란 건 없는 듯한, 주인공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결정적인 조언을 해주는 베스트 프렌드

그리고 이어질듯 안 이어질듯 애간장을 태우다 결국 주인공과 이어지는 근사한 남친 혹은 여친

정말 따뜻하고 행복하고 달콤한 워킹타이틀 월드입니다. 

제 주위 사람들이 모두 워킹타이틀 월드의 사람들같다면 그 곳이 바로 천국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어요. 

제가 보기에 이 워킹타이틀 월드는 노팅힐에서 브리짓존스의 일기, 러브액츄얼리 어바웃 타임까지 이어지는

면면한 전통을 가지고 있어요. 

근데 이 영화는 워킹타이틀에서 안 만들었는데 너무나 워킹타이틀스럽단 말이죠. 

모르겠어요. 또 어떻게 이어지는 끈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제가 화나는 건 워킹타이틀을 베끼려면 좀 제대로 베끼라는 겁니다.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건 주인공의 짝인 알렉스에요. 

알렉스 잘 생겼습니다. 꽃미남이에요. 남자가 봐도 감탄이 나올만 합니다. 

훤칠한 키에 떡벌어진 어깨, 날렵하고 하얀 얼굴, 반짝거리는 금발은 기본이구요,

장난스럽고 순수한 소년의 표정과 진중하고 듬직한 청년의 표정을 오묘하게 버무린 듯한 얼굴을 보자면

어느 여자가 이 남자를 마다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죠. 

하지만 아찔한 외모를 걷어내고 보면 알렉스같은 찌질하고 눈치 없는 사람도 없어요. 


고등학교 졸업파티 파트너 얘기할 때 로지는 분명히 알렉스와 같이 가고 싶다고 말했어요. 

근데 알렉스는 자기 마음이 로지에게 있는 걸 짐짓 무시하고 베사니한테 갔죠. 

이후 보스턴에 로지를 불렀을 때는 당시 여자친구(이름은 까먹었는데)가 임신한 것도 숨겼구요. 

자기 여자친구와 끝낼 마음도 없었으면서 자기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 로지를 이용한 거나 다름 없어요. 

마지막 베사니와 결혼할 때 로지를 부른 것도 그렇죠. 

로지의 마음을 모르지 않을텐데 - 모른다면 그게 더 문제구요 - 너무 잔인한 일입니다. 


영화에서는 알렉스와 로지가 서로 마음 표현을 못 한 것처럼 했는데

이건 알렉스가 잘못한 거에요. 로지는 여자로서는 할만큼 했어요. 

로지는 알렉스한테 상처 받고 얼간이하고 첫 섹스를 하고 졸지에 미혼모가 되고

커리어는 다 망가지고 애 키우다 힘들고 외로워서 마음에도 없는 그 얼간이하고 결혼하고 이혼까지 했어요. 

알렉스 때문에 고졸의 애딸린 이혼모가 된 후에야

알렉스가 짜잔 하고 나타나서 사랑한다고 말해요. 저같으면 귓방망이를 후려갈겼을 겁니다. 

이게 로맨틱 코메디로 잘 포장해서 그렇지 음침하게 각색하면 

테스같이 남자에게 이용만 당한 불쌍한 여자 이야기가 될 수도 있어요. 


주인공보다 더 이해가 안 되는 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캐릭터를 만들었는지 모르겠는 사랑의 라이벌들입니다. 

이들은 말그대로 단세포적인 악당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로지와 엮이는 그렉은 몸짱일뿐 무뇌아에 가까워요. 

한 때는 로지와 딸에게 충실한듯 한데 로지와 알렉스의 재결합에 방해가 되는듯 하자

참으로 편리하게 바람난 걸로 처리해 버립니다. 그렉의 심경변화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은 아예 없어요. 

알렉스와 엮이는 보스턴 여자친구도 마찬가지에요. 

처음엔 우아하고 당당한 미국여자처럼 보이더니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갑자기 편집증적인 성격으로 변하구요. 

로지와 알렉스의 재결합에 방해가 되는듯 하자

참으로 편리하게 바람난 걸로 처리해 버립니다. 역시 왜 그런지 설명은 생략합니다. 그냥 그런 거에요. 

마지막 연적인 베사니는 그저 재수없는 셀레브리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평면적인 캐릭터입니다. 

이런 독수리 오형제 만화에서도 안 나올 수준 낮은 악당들 때문에

이야기의 설득력은 더 떨어집니다. 


워킹타이틀 영화의 단점 중 하나라고 제가 생각하는 게 그저 주인공 이야기를 빛내주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부속품에 불과한 비현실적인 조연들인데요, 이 영화의 조연들은 한술 더 뜹니다. 

로지의 베프는 같이 일하는 호텔에서 만난 동료인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베프가 돼 있고,

베프가 친구 결혼식의 들러리로 간다니까 자기 일도 아닌데 거금을 들여 대서양을 같이 건너가구요,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데 공항에서 만난 사람과 첫눈에 결혼하기로 약속합니다. 왜, 도대체 왜!!!!

더 이해가 안 가는 건 로지의 딸의 남친이 거기도 따라간다는 거죠. 

그 남친이라는 아이는 여친의 어머니의 친구의 결혼식을 무슨 생각으로 따라갈 생각을 했을까요?

아무래도 이들은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로맨틱하게 빛내주기 위해서 개연성 없이 동원된 것 같아요. 


로지의 딸은 그냥 해맑고 갈등 없이 자라납니다. 엄마한테 의젓하게 사랑의 조언도 해 줘요. 

아빠 없이 자라면 그 빈자리도 있을 거고 비록 얼간이긴 했지만 아빠가 바람도 폈다면 상처가 있을 법한데

그냥 밝아요. 사랑스럽기만 할 뿐이에요. 이러면 조연이나 단역이 아니라 소품으로 봐도 좋을 정도입니다. 


캐릭터와 이야기가 총체적 난국이니 영화가 끝나도 별 여운이 없더군요. 

건진건 알렉스와 로지의 미모 정도?

그 둘의 미모는 대단하긴 했어요. 왓챠 보니깐 두 배우들의 미모로 영화를 용서하는 여성 분들이 많더라구요. 

로코의 목적 중 하나가 선남선녀가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안구 정화하는 것도 있으니까요. 

근데 저는 용서하기가 힘들더군요........


여담1

영화들을 보니 미국에서는 고등학교 졸업파티에 같이 갈 이성 파트너가 있느냐 여부가

고등학교를 보람차게 다녔는지 판단하는 척도가 되는 것 같더라구요. 

그리고 고등학교 다니면서 섹스를 못한 것이 왠지 창피하게 여겨지는 것 같기도 하구요. 

그렇다면 미국 고딩들도 다른 의미로 스트레스 받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근데 이 영화에서도 미국같은 졸업 파티 문화가 있는 거 같더라구요. 

영국같은 유럽에도 미국 졸업 파티 문화가 상륙해 있는 건지 궁금하네요. 


여담2

요 몇년간 미국이나 영국 영화들을 보면 섹스에 대해서 직설적으로 말하는 게 대세가 된 거 같아요. 

물론 프랑스는 이미 여배우들이 가슴 노출 성기 노출 등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단계에 이르렀지만요. 

어쨌든 섹스를 얘기할 때 돌려 말하지 않아요. 

'나를 찾아줘'에서도 vagina라는 단어를 파티에서 거리낌 없이 쓰는 걸 보고 살짝 놀라기도 했구요. 

그리고 이 영화에서도 누가 누구와 섹스를 한다는 게 그렇게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는 거 같구요. 

섹스, 출산, 미혼모, 결혼, 이혼의 결정이 그렇게 절대적이지 않아요. 항상 변할 수 있는 거죠. 

물론 이 영화에서 과장한 부분이 있겠지만 

유교의 나라인 한국의 기준으로 볼 때 막장드라마 수준의 시나리오가 상업영화에 통과된 것을 보면

미국이나 유럽에서 전통적인 결혼이라는 제도가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가족의 형태가 어떻게 변할지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구요. 

우리나라도 결국은 서구를 따라가게 될텐데 그게 언제가 될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 여담2에서 미국과 유럽 이렇게 서구로 묶어서 말 해 버리기에는 서로 너무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는 미국은 가족, 결혼 이런 면에서 꽤나 보수적이고 가까운 미래에 미국에서 전통적인 결혼제도가 대단한 변화를 겪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영화가 묘사하는 사회는 어쨋거나 상당한 과장이 들어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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