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생각나는 여자애

토토가를 보고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그 여자애가 생각이 났어요.

90년대의 청춘을 공유하고 있지도 않지만, 그 여자애를 만난건 2000년대 였지만,

저는 그 애를 만났을 때 어렸고 어설펐고 미숙했고 

그래서 애틋하고 아련했던 느낌 같은게 어딘지 닮아있어서 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첫사랑이라던가 첫 이별이라던가 하는 대단한건 아니에요.

그냥 뭐라고 말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래서인지 아직까지 마음에 남아 가끔 생각이 나곤 하는 그런 기억이에요.


저는 그때 재수 학원에 다니고 있었지만 딱히 공부를 하지는 않았고 

설렁설렁 학원이나 다니며 놀고 있었고요.

그 아이는 같은 반 학생이었는데 

낯가림이 심하고 수줍음이 많아서인지 반 아이들이랑 잘 어울리지는 못했어요.

누가 말을 걸면 당황해서 그런건지 얼굴이 붉어져서 말을 더듬곤 했거든요. 

근데 전 그게 되게 귀엽다고 생각했어요. 얼굴이 예뻐서 그랬을지도 몰라요ㅋ 

제 기억속에 그 애는 참 예뻤거든요. 


아무튼 그렇다고 제가 먼저 접근해서 꼬신다거나 친해지려는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부끄럽더라고요. 또 한참 제 멋에 살때라. 그냥 남들 몰래 훔쳐보기만 했죠. 

딱히 여자애들을 어려워하거나 했던건 아닌데, 그 전에 여자친구도 몇번 사귀어봤었는데

이상하게 그 여자애 앞에선 말이 잘 안나오더라구요. 


그러다 여름쯤이었나 주말에 문제집 가지러 학원에 갔는데 그 애가 교실에 있었어요.

문제집만 가지고 와서 애들이랑 놀러가려고 했는데 바로 약속을 취소하고 책상에 앉았죠.

그 애는 정말 열심히 공부만 하더라고요ㅋ 

하루종일 그렇게 앉아서 그 아이는 문제집을 풀고 저는 졸다가 책 좀 보다가 다시 졸다가.

책장 넘어가는 소리, 연필 소리, 그냥 저는 그 소리가 좋았어요.

집중하는 그 애 옆모습도 좋았고요.


그렇게 그 아이가 집에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교실 정리를 하고 나왔죠.

하루종일 같이 있었지만 서로 말 한마디 오가진 않았어요.

그 다음부터 몇번의 주말을 그 아이와 그렇게 보냈죠.

어떤 날은 다른 아이들이 몇명 더 오기도 했고, 

어떤 날은 그 애가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매 주말이 되면 그 교실로 갔어요.


그리고 수능이 얼마 안 남았을때 편의점에서 대충 끼니를 떼우고 

그 아이에게 줄 딸기우유랑 초코우유랑 바나나우유를 샀어요.

그 애는 항상 단 우유들을 마시곤 했거든요.

근데 막상 주려고 하니 엄청 부끄럽더라구요. 그게 뭐라고. 

한참을 줄까 말까 어떻게 주어야할까 고민하다 미지근해진 우유를 어렵사리 건넸죠. 


그 여자앤 당황했는지 얼굴이 발그레 해져선 고맙다고 했어요. 

그리고 자긴 이거 다 못먹는다면서 바나나우유를 제게 주더라고요. 같이 먹자고.

그때 처음으로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주고받았어요.

넌 어느 대학에 가고 싶은지, 어느 동네를 사는지, 고등학교는 어딘지, 

애들한테 전해들었다던 제 얘기도 맞냐고 물으면서.

의외로 제 생각보다 조곤조곤 말을 잘 하는 아이였어요. 

그리고 마지막엔 항상 자기를 기다려줘서 고맙다고 하더군요.

늘 자기 갈때까지 기다렸다가 뒷정리 하고 가는거 안다고. 넌 공부도 안하잖아ㅋㅋㅋ 라고요.


그리고 그게 다에요.

곧 수능이 다가와서 학원은 어수선했고 더 이상 그 여자애랑 둘만 있을 수 있는 시간도 없었어요.

수능이 끝나고 그 아이 싸이를 몇번 염탐 하기도 했지만, 용기를 냈다면 따로 연락을 해볼수도 있었겠지만

전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만약 그랬다면 같이 밥을 먹고 영화를 보거나 술을 마실수도 있었을라나요.

손도 잡아봤을지 몰라요.

어쩌면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가 되어있을수도 있구요.


하지만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정말 별 거 없는 얘기로 남았죠.

요즘 유행하는 그린라이트니 썸이니 하는 것까지도 갈 수 없는 진짜 시시해서 말하기도 그런 이야기.

아마 이 글도 재미 없을거에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실수도 있구요. 쓰고보니 더 별거 없네요. 

맥주 한잔에 혼자 감성 폭발 같기도 하고요.


그래도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차분해지고 따스해지는 기분이 들어요.

제가 그렇게 어리고 순진했던 시절이 있었다는게 부끄럽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요.

그 아이는 지금 뭘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디에서라도 잘 지내주었으면 합니다.

제 기억속에 그 아이는 그럴것 같아요 근데.


    • 서로 맘에 있어하면서 아무 말도 않고 지나는 경우 많죠.


      근데 나 이제 알았네요 띄어쓰기 틀리면 빨강 줄이 나오는 걸 요.


      걸요도 시비 거네요.

      • 서로 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을 했었다면 지금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ㅋ 띄어쓰기는 모바일로 쓴 거라서 그런가봐요.
    • 미소가 지어지는 글이네요 잘먹고잘살고있을거에요 그냥기억속에묻어두고 가끔꺼내보는게 좋아요 전 실제로 만났다가 후회한적있거든요

      가영/포킹이 모르는것도있어요? ㅎㅎ

      • 저도 잠결에라도 생각나는날에는 자다가말고 내가 그때 손을잡았다면.. 하고 상상도해보고 아이고 답답아 하고 머리도쳐보고 앉아서우두커니 생김새를떠올려보기도해요 점점희미해서 잘안보이지만.. 가끔 수지가 겹쳐보이기도해요 그리고 해피엔딩.. 수지미안..
        • 저도 그래요. 또렷히 떠오르는건 그때 그 느낌이라던가 분위기 뿐이고 생김새는 점점 더 희미해져요. 이젠 길에서 스쳐지나가도 몰라볼지도요. 제 기억속에서 자체 보정되어 그때 그 모습보다 더 예쁜 느낌일지도 모르겠고. 그러니 마음 속에 담아두는것이 제일 좋다는게 맞는 말 같아요.
      • 전 그런 후회 같은 마음이 있는 한 명이 생각이 나기도 하는데


        아무 것도 없었으니 어쩌구니 없는 생각이지만


        분명 같은 맘이었을거란 생각으로(나의 오해일 가능성 30%-그러면서 살죠)


        분에 넘치는 그대에게 말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희미하다 꺼져 다른 길로 간 기억 물론 후회는 없죠.

    • 좋은 이야기네요. 그럴싸한 해피엔딩도 없고 드라마틱한 전개도 없어서 글쓴님 이름처럼 조금 덜 한 이야기지만 그래서 조금 더 상상의 여지가 있는 이야기. 추억을 담을 공간이 있는 이야기.

      • 감사합니다. 별 것 없는 이야기를 좋게 봐주셔서요. 다들 남들 몰래 이런 시절을 담고 자라나봐요.
    • 세번째는 아니 만나는 것이 좋았으리라

    • 소설 같아요. 그러고 보니 나도 그런, 기억할 만한 남자애들이 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글로 쓰신 분이 부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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