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티님 고민글에 부쳐

저 역시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아마도 연장선상의 30대 후반 버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강남까지 공연 보러 갔다가 오는 지하철 안에서 읽었는데...공연이 별 감흥이 없어서 무척 공감하면서 읽었어요.
그래도 20대초반~30대중반까지 공연(주로 인디밴드) 보는 걸 즐겼으니 키티님에 비해 오래 행복했던 걸까요?

구린 환경이어도, 매우 저렴한 가격의 공연이어도 오래오래 제 마음 속에서 행복하게 기억되는 순간들이 있어요.
쌈지스페이스 같은 사운드도 별로 좋지 않고 기둥도 있고 그런 클럽공연(예를들면 BMX-bandits 공연이나,  언니네이발관 처음 월요병 콘서트 4회...),
빗물이 폭포처럼 쏟아질 정도로 열악한 공중캠프에서도 Fishmans 이카레타 베이비를 떼창했던 순간들..
국카스텐의 미친듯한 광기 같은 것들(확 뜨면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그 기운이 달라지는 거 같아요)

오늘 제가 별 감흥이 없었던 건 그 뮤지션의 탓도, 고급스러운 공연장 환경 탓도 아니고 순전히 제 탓이에요.
역치가 점점 높아지는 거 같아요. 눈과 귀는 점점 까탈스러워지고, 마음은 점점 굳어가고요.
사람 목소리가 귀에 거슬리고 점점 연주곡들을 주로 듣고, 생전 들을 일 없을 거 같았던 재즈/클래식을 더 많이 듣게 되고...
스탠딩 공연은 웬만해선 잘 안가고, 서울아트시네마가 있는 종로까지가 동방한계선이고. 강남은 정말 큰 마음 먹어야 가고.
공연뿐만 아니라 제가 즐기던 영화관람, 독서, 전시회 관람 등 문화생활 전반이 그런 경향이 있어요. 2년 배운 기타도 그만 다니게 됐고...

작년엔 유독 뭘 봐도 감흥이 없고, 그 엄청나던 식탐도 어디 가고, 운동을 꾸준히 하는데도 체력은 점점 바닥이어서 힘든 한해였어요. 
친구들도 결혼/임신/출산 코스에 입문하면서 나눌 상대도 줄어들었고요.

그런데 이게 꼭 싫지만은 않은게 감수성이 무뎌지면서 세상에 대한 기대치도 낮아지고, 자아도 쪼그라들어서
외로움도 덜하고 연애를 못해도 크게 괴롭지 않고 남들한테도 자신에게도 좀 너그러워지고 마음은 편해요.
연말에 너무 너무 일이 많아서 난방도 안되는 사무실에서 수당도 못받으면서 크리스마스, 주말을 모두 반납해가며 일해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어요. 어떤 감상이 파고들 틈이 없을 정도로 바쁜 게 좋기도 하고
크리스마스나 연말 같은 거에 마음이 들뜨지 않는 제 자신이 좀 쿨해 보이고;; 
그저 하루하루를 충실히 기계처럼 살아내는게 맘에 들더라고요. 
제가 제 직업에 만족하고 있는 것과는 별론으로 내 노동으로 내가 먹을 밥을 번다는 건 숭고한 일이니까요. 
아마 체력이 마음 힘든 걸 감당을 못하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모양이에요.
앞서 작년이 힘들었다고 썼지만, 그런 부침도 인생 전체로 보면 자연스러운 거니 언젠가는 또 막 신날 때가 오겠지 해요.
최근의 행복은 새해 첫 영화가 다르덴 영화였고, 흡족했던 거.

그리고 만약 다시 신나지 않는다면...키티님 글의 댓글에서 많은 분들이 얘기하셨던 것처럼 제가 한번도 안해 본 것들을 새로 시작해 보고 싶어요. 
작년 늦가을에 처음 자전거를 배웠는데(!) 아 너무너무 신나서 봄이 기다려져요. 






    • 꺄 이 글 좋아요 ㅎㅎ 왠지 여유가 느껴져요

      저도 뭔가 조금 여유가 생긴다면 컨텐츠를 다시 소비해야겠...
      • 좋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취미 취향이 바뀌는것은 자연스러운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재미있던것들도 어느순간부터 시들시들해지고 예전에는 별 시덥잖게 여기던 것들이 중요하게 다가오기도 하고 말이죠.


      환경이 바뀌니 사람도 바뀌고 사람이 바뀌니 취향도 바뀌는 거겠지요.



      • 동의해요. 그럼에도 끊임없이 새롭고 다른 것을 찾아 헤매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nobody가 되어 있을까봐 불안한 키티님의 고민도 한편 공감이 되구요. 큰 흐름으로 보면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을까요?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꼭 뭐(키티님의 경우엔 멋진 사람)가 되려고 사는 것도 아니고 순간순간의 (일관성은 없어도 다채로운) 즐거움으로 채워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요
    • 저도 이 글 좋아요. 글쓴 분의 행복이 느껴지네요:)

      무엇인가를 소비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결국 한시적이고 불안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저는 그림을 그릴 때 힘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행복하기도 해요.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영화나 책을 보는 것도 물론 즐겁지만 저 스스로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순간만큼은 못하다고 느껴요.
      • 생산할 수 있는 재능(잘하지 못하는 걸 꾸준히 하는 능력을 포함)이 부럽습니다( *◡͐*)b 예술을 소비만 하는 스스로가 참 딜레땅뜨 같고 한심한 적도 있었지만...쓰레기들을 생산하면서 자괴감에 빠지느니 예술작품을 소비하는 방식으로 계속 사랑하기로 결정해서 이 직업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제 일이 즐겁지는 않아도 버틸 수 있어요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돈을 주니까요 이 경우 예술은 상당히 실용적이지 않은가 해요
    • 여러가지 자유로의 여정입니다.

    • 저도,욕심을 접는 수밖에 없다...라는 쪽으로 결론이 나더군요.아주 아주 사소한 성취에 매달리든가 아님.. 좋아하는 음식으로 입이라도 즐겁게.. 근데 저는 아무래도 버티기같군요. 버티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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